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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

Joyfule 2018. 2. 27. 00:33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

 

위대한 선교사 데이빗 브레이너드


김홍만 (국제신대원, 역사신학)
교회사 속에서 가장 탁월하고, 감동적인 선교사를 든다면, 데이빗 브레이너드 (David Brainerd)를 제 1순위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복음사역자들이 타 문화권으로 건너가서 사역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았음에도, 아메리카 인디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이다. 18세기에 그는 인디언에게 가서 사역을 하는 가운데 성령이 부어주시는 부흥을 경험하였고, 이로 인하여 인디언 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다. 그가 병으로 사역을 오래 할 수 없었으며, 결국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일기가 조나단 에드워즈의 손에 의하여 편집되어 책으로 출판되었고, 이 책을 통하여 19~20세기에 수많은 선교사들이 해외선교에 헌신하게 되었다. 그가 죽은 이후에 그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을 선교사로 불렀던 것이다. 이렇게 교회사 속에서 가장 탁월한 선교사인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사역, 그리고 신학에 대해서 살펴보고 오늘날 우리의 선교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성장배경

브레이너드는 1718년 4월 20일 미국 코네티컷트 주의 하뎀에서 태어나 청교도 가정의 배경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같은 청교도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영적인 것에 대해서 상당한 고민과 생각들을 한 것으로 보인다. 7, 8세에 구원에 대해서 고민하였으며,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두려워하기도 하였다. 그는 청소년기를 지나서 20세에 이르기까지 외적 종교적 의무를 다하고 목회자가 되어야 하겠다고 생각도 했지만 그는 아직 회심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1738년 초겨울, 그는 늘 하던 대로 기도하러 산책을 가고 있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리라는 생각에 압도되었다.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에 대한 성령의 책망이 그의 영혼 위에 계속되었다. 이러한 죄에 대한 책망의 역사가 거의 1년 이상이나 지속되었고, 1739년 7월 12일 금요일에 드디어 자신의 죄가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해서 용서받는 체험을 하였다. 브레이너드는 말할 수 없는 영광이 자신의 영혼에 비추어지는 것을 체험하였다. 이러한 회심의 체험으로 인하여 이제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신적인 것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달라졌다. 하나님의 주권의 위대하심과 그의 능력의 강력함을 맛본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탁월함과 충족성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하고 그것은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사랑과 그 은혜의 무한하심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이 크게 일어났다. 브레이너드는 이제부터 주를 높이려는 심령이 간절하였으며, 자신의 생애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예와 영광에 두었다. 그래서 브레이너드는 자신이 전에 세웠던 계획을 버리고 이제부터 오직 구세주의 영광을 높이고자 하였다.


영적대각성의 체험

그가 예일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영적 대각성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740년에 조오지 휫필드가 와서 설교하였으며, 1741년에는 길버트 테넨트가 와서 설교하였다. 그들의 설교는 불과 같아서 많은 대학생들로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게 하였고, 이러한 영적 움직임 가운데 학생들이 크게 영적으로 각성하였으며, 회개가 일어났다. 이러한 은혜 속에 있으면서 대학에 와서 설교한 강사에 대해서 부주의한 말로 인하여 제적을 당하였다. 그에게는 어려운 시련들이었다. 이때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때까지 브레이너드는 인디언 선교에 대해서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면서 더욱 그리스도에게 헌신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며, 영적 성장에 있어서 더욱 진보를 이루는 시기가 되었다. 그의 1742년 4월 27일자 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인자하신 나의 주님, 인자하신 나의 주님, 하늘에서는 주 밖에 누가 나에게 있겠으며, 땅에서는 주님 외에 내가 사모할 자가 없습니다. 내가 천 번을 산다고 하여도 나의 영혼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위하여 천 번의 삶이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단번에 드리겠습니다.


사역으로 부르심

1742년 7월 브레이너드는 장로교 목회자 협회로부터 교리들과 신앙의 체험에 대해서 시험을 치렀다. 그리고 시험을 통과한 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그러면서 이때부터 브레이너드는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있는 인디언 부족들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이끌고자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인디언의 회심을 위해서 벌써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 당시 인디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으며,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기도하면서 인디언에 대한 복음전도 사명이 더욱 분명하여 졌다. 바로 이 당시 장로교의 뉴욕노회의 목사인 에벤에젤 펨버튼이 브레이너드에게 편지를 보냈다. 일찍이 인디언 선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던 펨버튼이 보낸 편지의 내용은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에 대한 문의였다. 1742년 11월 25일 브레이너드는 펨버튼과 그 협회의 사람들로부터 심사를 받았고, 인디언을 위한 선교사로 지명 받았다. 그리고 그해 뉴욕의 롱아일랜드에서 교회를 섬기면서 1743년 봄부터 인디언 사역을 하기 위해서 준비하였다.


인디언 사역의 시작

1743년 4월 1일 브레이너드는 메사추세추 주의 카우나우미크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인디언을 위해서 일 년 동안 통역자의 도움을 받아 설교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브레이너드는 언어를 배웠으며, 시편의 일부분을 번역하였고, 인디언을 위한 학교도 시작하였다. 그는 사역에 앞서서 항상 기도하였는데,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숲에 들어가 기도와 묵상을 하였다. 1744년 5월 1일 카우나미크를 떠나서 델라에워 지역으로 옮겼다.

 이 당시 카우나미크에는 백인들이 인디언을 몰아내고 땅을 차지함으로 인디언들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5월말에 뉴왁으로 가서 목사 안수를 받을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1744년 6월 11일 브레이너드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때 펨버튼이 설교하였는데, 이 설교는 그의 사역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것이었다. 펨버튼은 사도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이방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강권하라는 내용으로 설교하였다. 그리고 강권하는 것은, 인간이 본성상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라는 것을 잘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성령의 역사 가운데,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그래서 그들에게 죄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복음의 사역자들은 죄인들로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죄에 대해서 주께서 심판하시는 것을 분명하게 설명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영적으로 각성된 죄인들로 그리스도에게로 달려가도록 만들어야 하며, 이때에도 복음 사역자들은 복음 안에 있는 용서와 위로를 잘 드러내야 하는데 이것이 복음 사역자의 의무라고 하였다.

 

 펨버튼이 브레이너드의 목사 안수식에서의 설교는 그 당시 영적 대각성 가운데 전도자들의 설교의 주된 내용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보다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전문가들이었으며, 전도에 있어서 성령의 일하시는 원리에 대해서 정통해 있었던 자들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이제 목사 안수 받는 브레이너드에게 선교의 원리로 강조하였던 것이다. 안수를 받은 후에 브레이너드는 델라웨어 강을 중심으로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광야에 흩어져 있는 양들을 찾아 나섰다. 이 당시 브레이너드의 기도는 인디언의 회심에 온통 초점을 두고 있었다. 단 한명의 회심을 위해서 그는 간절히 숲속에서 거의 날마다 기도하였다. 인디언들 가운데 우상 숭배와 마법을 행하는 자들과 무당들이 브레이너드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독살시킨다는 위협을 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브레이너드는 실망하지 않았으며, 인디언의 회심은 피조물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에서 내려오는 능력에 의해 된다는 확신이 있었다. 이렇게 1년 동안 델라웨어 지역에서 사역을 하였지만, 브레이너드는 단 한명의 회심자도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파송해준 선교협회에 부담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내년까지 성공의 기미가 포이지 않는다면 사역을 포기할 것을 고려하였다. 
 
크로스윅숭 부흥

브레이너드는 1745년 6월 19일 뉴저지 주의 크로스윅숭으로 가서 설교하였다. 그곳의 인디언들은 다른 곳의 인디언과는 달리 브레이너드의 설교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았으며, 귀담아 들었다. 브레이너드의 설교에 대한 관심은 여러 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가 도착한 지 삼일 만에 청중이 17명에서 30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들 모두는 브레이너드의 설교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브레이너드는 자신의 설교 위에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시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의 설교를 듣는 회중 가운데, 죄의 각성이 일어나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 울면서,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구원해주기를 바라는 기도를 드리는 이도 있었다. 브레이너드는 다시 8월 3일에 크로스윅숭을 방문하였다.

지난 6월에 있었던 성령의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8월 5일에 설교하는 가운데 설교를 듣던 인디언들 가운데,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울부짖는 소리들이 일어났고, 설교 후에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틀 후인 8월 8일에 약 65명가량의 인디언들이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설교하는 가운데 성령의 역사하심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을 그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말씀을 전파할 때 한 사람씩 더욱 힘있게 역사하시는 주님의 도우심을 느낄 수 있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이 하나님의 능력이 모임 위에 내리는 듯하더니 모든 사람을 압도해 버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놀라운 힘에 사로 잡힌 듯했다. 불어난 홍수나 휘몰아치는 격류가 견디기 힘든 무게와 압력으로 그 앞에 거치는 것들을 휩쓸어 버리는 현상에나 비유할 수 있을 까? 그들은 거의 한 결같이 집안 곳곳에서 하나님께 긍휼을 간구하며 울부짖어 기도하고 있었다.” 즉, 크로스윅숭의 인디언에게 부흥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러한 성령의 부흥의 불길은 델라웨어의 휙스 지역에서도 그해 (1745년)에 일어났다.

 그리고 10월에 다시 크로스윅숭에서 성령의 역사가 더욱 강력하게 일어났다. 부흥을 통해서 인디언들 가운데 신실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 많이 일어났다. 이렇게 부흥을 경험한 브레이너드는 그해(1745년) 11월에 부흥에 대해서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점에서 인디언 가운데 이 일을 시작하신 것이 분명하다. 내가 알기로는 이 시점은 나의 힘이 한계에 도달해 있을 때였다. 하지만 이때가 하나님이 일하시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였다. 모든 희망과 인간적인 소망이 완전히 깨어져 버렸을 때,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역사하셨다. 내가 약할 때에 곧 강함을 하락하여 주셨다. 여기서 나는 흑암과 절망의 늪에 있을 지라도 맡은 일을 끝까지 감당해야 함을 깨달았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 146) 자신의 사역에서 일어난 부흥에 대하여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27세의 젊은 청년 선교사의 고백이다.


교리 설교의 중요성

1745년에 부흥을 크게 경험한 브레이너드는 부흥의 원인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살폈다. 그는 사역의 초기부터 말씀을 가르칠 때 인디언들로 죄인 됨을 깨우치기 위해 역설하였다고 하였다. 더욱이 죄를 회개함에 기초를 두지 않은 신앙은 모래위에 성을 쌓는 것과 같다는 것을 강조해왔다. 그리고 막 2:17절 말씀과 같이 주님이 절실히 필요함을 깨달았을 때 그들을 주님께 초대해야 하며, 이때 죄인 됨을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1746년 3월에 다시 크로스윅숭에서 가서 설교할 때에도 부흥이 일어났는데, 이때에는 회중이 14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이때에도 부흥의 수단이 무엇이었을까를 그가 신학적으로 생각하였다. 그것은 교리 설교와 함께 교리문답식의 성경공부가 그들에게 영적 각성의 수단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브레이너드는 교리 설교와 강의가 그들에게 성경적 지식의 진보를 있게 하였고, 이로 인하여 그들이 진리에 대하여 궁구하도록 만들었으며, 그들이 이러한 궁구함 속에 있을 때, 성령이 역사하셔서 영적 각성이 일어난 것으로 확인하였다. 사실 이러한 그의 사역은 이미 그가 영적대각성 당시에 체험하였던 것이며, 더욱이 그를 목사 안수하였던 펨버튼으로부터 사역에 있어서 지침으로 당부 받았던 내용들이다.


마지막 사역

브레이너드는 이렇게 사역을 하는 가운데, 자신을 잘 이해하고 항상 도와주었던 조나단 에드워즈를 통해서 그의 둘째 딸인 제루사를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기보다는 광야에 흩어져 있는 인디언들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의 사역은 더욱 계속되었다. 1746년 8월 11일 전도 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은 그의 마지막 사역이었다. 서스퀴한나의 패스톤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미 그의 병은 깊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디언들을 향하여 주께 돌아오라고 설교하였다. 11월에 서스퀴한나 사역을 마치고 뉴잉글랜드로 돌아왔다. 봄까지 계속 휴식을 취하고 쉬었지만, 병은 더욱 깊어갔다. 1747년 6월 보스톤을 방문하는 동안 의사로부터 진단을 받았는데, 폐에 궤양이 생겨서 소생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병이 깊은 브레이너드를 받아 준이는 조나단 에드워즈이었다. 1747년 7월부터 에드워즈 집에서 간호를 받았다. 그에게 있는 시간들은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피를 토하면서 때로는 혼수상태에 있으면서도,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었다. 1747년 8월 23일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오늘 아침 나는 생각이 매우 상쾌하여 그리스도의 왕국을 확장시키고 싶은 기대와 희망을 가졌다. 내 바벨론이 더 이상 일어날 수 없으리만큼 망해버린 때가 가까이 왔음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나로 영적인 묵상을 하게 하였고, 나를 새롭게 했다.” 결국 브레이너드는 1747년 10월 9일 금요일 오후 6시에 그렇게 그리워하던 주님 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 임종 직전까지의 기도는 오직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선교이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중요한 수단인 부흥을 갈구하였다. 그래서 보스톤의 목회자들을 향하여 부흥을 위하여 왜 기도하지 않느냐고 한탄하는 말도 하였다.

브레이너드는 29세의 청년선교사로 주님 품에 안겼지만, 오늘날에도 그의 선교의 정신과 방법은 우리에게 도전을 준다. 비록 그의 사역이 4년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인 성령의 쏟아부어주심을 경험하였다. 그의 사역은 기도로 시작하여 철저한 하나님 말씀의 강해와 성령의 역사에 절대적으로 의존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주님에 대한 사랑은 교회사 속에서 어떤 성도보다 탁월한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대한 갈망과 그것을 위한 기도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도전을 주고 있다. 한국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이 브레이너드가 갔던 그 길을 따라감으로 역시 선교지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인 부흥을 경험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