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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륜(徐相崙)과 소래(松川)교회 설립(1884)

Joyfule 2018. 3. 1. 00:40

  

  서상륜(徐相崙)과 소래(松川)교회 설립(1884)

 

1884년 서상륜이 성경을 봇짐 속에 몰래 넣어 국내로 들어오려고 하다가 국경지역에서 검색에 발각되어 투옥되었으나, 다행히 친지의 도움으로 빠져나와 고향인 의주에 돌아와서 동생 서경조(徐景祚)와 함께 전도를 하던 중 금교령이 풀리지 않은 때라 신변상의 위협을 받아 삼촌이 살고 있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長淵郡 大救面 松川)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열심히 전도한 결과 20여명이 믿게 되고 1884년에 주민들의 힘으로 초가집 예배당을 마련하였다. 이 예배당이 한국에서 최초로 세워진 소래(松川)교회이다.

 

예배당을 마련한 후 얼마 되지 않아 58호의 주민들 중에서 50호의 가정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서경조는 우리나라 최초의 7인 목사중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소래교회에서 세례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소래교회를 효시로 각 지방에서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으며 서상륜은 다량의 로스성경을 반입하여 서울지방 전도에 힘썼다.

 

서상륜(1848-1926)은 만주에서 홍삼장사를 하는 부유한 상인이었습니다. 장티푸스에 걸려 죽을 뻔 했는데 만주 선교사 매킨타이어

 

의 도움으로 살아났습니다. 이후 1882년 만주 심양에서 선교사로스에게 세례를 받고 개신교 최초의 전도인이요 권서(돌아다니면서

 

전도하고 책을 파는 사람)가 되었습니다.

 

황해도 소래라는 곳에서 사람들을 많이 전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입국했을 때 서상륜이 언더우드를 만나,

 

세례 받고자 하는 사람 수십 명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여 언더우드가 놀라기도 했습니다. 서울에 와서 언더우드 밑에서 권서와 조

 

사(목사를 도와 전도하는 교직)로 사역을 했습니다. 1890년 언더우드의 정식 조사가 되어 정동교회에서 설교와 전도를 했고, 여름철

 

선교사가 휴가를 가면 서울 지역 목회를 그가 다 책임지다시피 했습니다. 1888년 이후 목회자 교육을 받았으나, 1887년 정동교회에

 

서 두 명의 장로가 피택 되었을 때, 서상륜은 피택되지 못했습니다.

 

동생 서경조가 1900년에 장로가 되고 1907년 목사가 되었지만 그는 장로도 목사도 되지 못했습니다. 아내가 두 명이었기 때문입니

 

다. 선교사들의 의견이 대립되었습니다. 강경론과 관용론자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지만 결국 강경론이 이겼습니다. 서상륜은 집사로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서상륜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아내가 둘인데 내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평생 집사로 봉직하는 것이 기독교인으로 책임 있게 사는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황해도 소래에 정착해 본처를 데리고 와, 함께 살지는 않았지만 불편 없이 살 수 있도록 돌보아 주며 속죄의 길을 걸

 

어갔다고 합니다.

 

서상륜은 장로가 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의 교인들이 무엇을 느꼈을까요? 서상륜처럼 훌륭한 전도자, 위대한 신앙인이 결

 

국 장로가 못 되었는데, 그후 감히 어떤 사람도 첩을 데리고 산다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서상륜 사건은 축첩제도가 한국 사회에서 사라지게 하고 평등의식을 고양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