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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리빙스턴 - 검은 대륙의 개척자

Joyfule 2007. 9. 3. 07:16

데이빗 리빙스턴 -  검은 대륙의 개척자


검은 대륙의 개척자 David Livingstone (데이빗 리빙스턴)

"아프리카 대륙을 사랑하여 탐험과 선교를 그치지 않았던 리빙스턴,

그는 60만 명 이상의 토인들을 하나님께 인도했으며,

 노예 무역으로부터 그들을 지키고자 평생을 바쳤다"

▲ 길이 없어도 올 수 있는 사람...

어느 날 영국에 있는 몇몇 친구들이 아프리카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는

리빙스턴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겠다는 생각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그에게 보냈다.

"리빙스턴, 낯선 땅에서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자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네.

먼 나라에서 고생하고 있는 자네를 생각하면 여기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네.

그래서 자네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우리가 자네를 도와줄 사람을 몇 명 그곳으로 보내려 하네.

그러니 그곳까지 가는 길을 상세하게 적어 다음 편지에 보내 주면 좋겠네.."

 

 하지만 편지를 받은 리빙스턴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답장을 보내 정중하게 그 제의를 거절했다.

 

 "마음은 고마우나 이곳까지 오는 길이 있어야만 오겠다는 사람들이라면 나는 사양하겠네.

 이곳에서 진정 필요한 사람은 길이 없어도 스스로 찾아오겠다는 사람이거든."

리빙스턴은 19세기 최대의 선교사로서 검은 대륙에 하늘의 빛을 심은 광명의 사도였다.

그는 발길이 닿는 곳마다 병자를 고쳐주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며 검은 원주민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두터운 우정을 맺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했다.

그는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과 하늘나라와의 관련성을 끊는다면 아무 가치도 찾아 볼 수 없다고 했으며,

지리적인 탐험을 하는 목적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는 전도하기에 가장 편리한 곳을 찾기 위해 아프리카의 정글 속을 누볐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발견한 호수나 강이나 폭포는 모두가 전도의 부수적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원한 것은 오직 아프리카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는 사나운 원주민들에게 에워싸여 죽음을 각오해야 할 위기에 몰렸을 때를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856년 1월 14일 저녁, 그 넓은 지역의 수많은 주민들을 위해 일하려는 나의 모든 계획이

내일이면 일부 원주민들에 의해 모두 깨어질 것을 생각하니 몹시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나는 주의 말씀을 잊을 수 없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것은 가장 위엄있고 거룩하신 분의 말씀이다. 그러나 결코 거짓말일 수 없다.

내가 어찌 이런 분을 피할 수 있으랴!

설사 나의 계획이 모두 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일 할 일의 계획을 오늘 밤 세워야겠다.

아, 이제야 내 마음이 아주 평안하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는 특히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에 밑줄을 쳐놓았다.

그는 가장 위엄있고 거룩하신 분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두려움도 능히 이겨 나갔으며,

그가 아프리카 대륙에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한 사람은 무려 60만 명에 이르고 있다.

그는 검은 대륙의 베일을 벗겨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대로를 아프리카의 밀림 속에 닦아 놓았다.

서구의 교회들이 세속주의에 굴복하고 아시아의 교회들이 토착종교의 거센 저항 속에서 고투하고 있는 오늘날,

아프리카의 교회들만이 비상한 성장을 보이고 있는 것은

선교의 밑거름이 된 리빙스톤의 헌신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식민지주의자들과 합세하여 서구 팽창주의에 가세했던 직업적인 선교사가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검은 대륙의 밀림 속까지 심기 위해서는 가족과의 생이별도 불사했고

비인도적인 백인 노예 상인들에게 여지없이 날카로운 힐책을 가했던 것이다.

1872년 3월 19일 리빙스턴이 59회 생일을 맞아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의 주, 나의 왕, 나의 생명, 나의 모든 것...

나는 다시 한번 나의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칩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나를 받아 주옵소서.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나의 사업을 완성케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마지막 생일인 1873년 3월 19일에는 다음과 같이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내 생애의 여로에서 지금까지 나를 지켜 주신 것에 대해 전능하신 인간의 보호자에게 감사를 드린다.

내가 궁극적인 성공을 희망할 수 있을까? 너무나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

오 나의 선하신 주님, 사단이 나를 억누르지 못하게 해 주소서!"

1873년 4월에 접어들자 그는 비참할 정도로 기력이 쇠퇴하여 동행하는 토인들이 그를 들것에 싣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목사님, 기운을 내십시오".. 한 토인이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응, 내 걱정은 말고 모두들 돌아가 자거라..." 그는 눈이 잘 보이지 않았던지 손만 내저으면서 대답했다.

이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긴 말이었다.

이튿날 29일 새벽 4시경에 토인이 그의 오두막에 가보았더니,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이미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기도하면서 마지막 길을 떠났던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는 이미 10년 전에 세상을 떠나고 옆에는 한 사람의 수행원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토록 많은 시련과 고난을 통해 그를 지켜 주신 그 분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천사가 그의 영혼을 하늘나라로 인도해 갔던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무엇을 기원했을까? 그는 검은 대륙인 아프리카를 위해,

이교도의 나라 중국을 위해, 온 세계를 위해,

특히 하나님의 복음의 씨가 아직 뿌려지지 않은 땅을 위해 축복을 빌고

노예제도가 하루 속히 없어지기를 기원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까지 자기를 보호하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올렸을 것이 틀림없다.

 리빙스턴의 두 제자인 수지와 추마는 유해를 건골로 만들기 위해 심장을 비롯하여

그밖의 내장을 모두 꺼내어 큰 나무 아래 묻고, 그 나무 껍질의 줄기에

'1873년 5월 4일'이라고 새겼다. 리빙스턴의 심장은 이리하여 그가 사랑하는 땅의 흙으로 변했다.

 

그러나 리빙스턴의 제자들은 위대한 선교사의 유해를 이곳에 장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영국으로 돌려보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의 유해는 14일간 햇볕에 쬐어 건골로 만들어 영국에 이송되었고,

 1873년 4월 18일 유해는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안치되었다...

리빙스턴의 죽음 이후 아프리카는 기독교가 들어오도록 여러 지역을 개방하게 되었으며,

아프리카를 위한 거대한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지금도 아프리카를 위한 여러 선교협회와 교단 선교회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리빙스턴에게 있어서 뛰어난 점은 그의 인격적인 면이다.

그는 남을 위한 친절과 사랑과 관심과 관대함에서 탁월했다.

또한 그는 놀라운 의지와 확신을 가지고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면서 나아갔다.

또한 그는 언제나 규칙적인 기도뿐만 아니다. 수행원들과 더불어 예배를 철저하게 드렸다.

리빙스턴은 선교사역과 탐험을 통하여 아프리카에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밖에 없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본 적이 없었다.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복음화를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