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또 하나의 가족 - 권일주

Joyfule 2015. 1. 20. 01:15

 

 

또 하나의 가족 - 권일주

 

정희 씨가 예의 그 환한 얼굴로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그녀도 우울한 날이 있을까? 상상이 쉬이 가지 않을 만큼 오늘도 역시 그녀는 해바라기처럼 웃고 있다. 잇몸을 살짝 드러낸 기분 좋은 그 웃음을 보아 온 지 10년하고도 이태가 더 지났다.

기분 좋은 일이 있었나 봐요.

기분 좋은 일이요? 후훗! 엄마한테 뒈지게 혼나고 나오는 길인 걸요.

그를 만나면 매번 그러하듯, 나는 많이 당황스럽다. 엄마라는 말도 뒈지게 혼났다는 말도 오십을 훌쩍 넘긴 나이에 어울리는 말은 아니다. 입 밖으로 채 나오지 못한 그런 내 속마음을 재빨리 그녀가 먼저 알아차렸나 보다. 거침없이 다음 말을 쏟아 놓았다. 그는 내 속내를 늘 본인인 나보다도 먼저 알아차리고, 내 마음이나 뜻이 단어가 되어 나보다 먼저 입에서 튀어나오는 순발력과 재주가 뛰어난 아주 유쾌한 사람이다.

 

얼마 전 길에 버려진 고양이 한 마리를 집으로 데려왔는데, 이놈이 시름시름 해서 병원엘 데리고 갔단다. 그리고 급기야 관절염 수술을 해 주는 데에 이르렀다. 응당 의료 보험도 없다. 거금 27만 원이 들었다.

어쩌겠어요, 그놈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는데 불쌍해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집에 돌아와 그녀는 자초지종을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다.

이것아! 그 돈 있으면…….

대뜸 날이 선 어머니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큼 나오는 길이에요.

말은 그러면서도 그녀는 어머니의 벼락을 피하려 황망히 나와 버린 얼굴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 속에는 병원에서 돌아와 세상모르고 평화로운 잠에 빠져 있는 고양이의 모습이 서려 있는 듯했다.

 

일본의 종합 월간지 ≪文藝春秋≫에는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화보 페이지가 오랫동안 잡지 앞쪽에서 당당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주인공과 그와 함께 살고 있는 반려 동물, 개나 고양이가 한껏 다정한 포즈를 하고 찍은 사진이 매호마다 실린다. 벌써 70회가 되었으니 6년이 다 되는 셈이다. 페이지를 펼칠 때마다 안온한 기운이 종이 위에 가득한 느낌이다. 사실, 처음에는 지식인을 상대로 한다는 일본의 대표적인 월간지가 어떻게 이런 기획을 했지? 하는 기분이었다. 나 또한 털이 달린 동물이 있으면 가던 길도 멀리 방향을 바꾸어 돌아가는 위인이었으니, 자연히 눈여겨볼 생각도 없이 팔랑팔랑 페이지를 귀찮은 듯 넘겨버렸다. 그런데 어느덧 새 책을 받으면 가장 먼저 찾아 펼치는 페이지가 되었다. 오는 듯 마는 듯 내리는 이슬비에 나도 모르는 새에 내 옷은 흠뻑 젖어 있었다.

 

하기야 어제 오늘의 새삼스러운 이야기는 아니다. 뒷산을 오르든, 동네 한 바퀴 산책길에 나서든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온 사람들보다는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난다. 지난 주말만 해도, 금방이라도 사위어들 것만 같은 시월의 가을빛이 너무 아까워 쉬엄쉬엄 뒷산을 올라가던 중, 아가야!하고 부르는 소리가 있어 돌아보다가 아기 대신 동그랗고 새카만 유리알 같은 강아지의 눈과 마주쳤다. 엄마한테 와야지! 하는 손뼉 소리를 따라가다가 뒤뚱뒤뚱 걸음마 하는 아기가 아니라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달려가는 강아지의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만나기도 했다. 애 데리고 병원에 가야 해요. 이 소리도 물론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화보에서 만나든 길가에서 만나든 조금만 자세히 보면 함께 있는 반려 동물과 그 주인이 희한하게 서로 닮아 있다. 딱히 얼굴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분위기인지 무엇인지 모르겠다. 강아지 한 마리가 저만치 앞서서 쫄랑쫄랑 뛰어가고 뒤에 여러 명이 우르르 올 경우, 뒤에 오는 그들 중에 누가 앞서 간 강아지의 엄마 아빠인지를 쉽게 가려낼 수 있다. 또 우리 집과 작은 뜰을 사이에 두고 있는 건너편 댁에서는 치와와 한 마리를 십 년 넘게 키우고 있다. 하필이면 딸아이 방의 창문 밖이 바로 그 댁의 뒤뜰에 해당하는지라 그 댁의 마나님이 뜰에 나와 손자를 어르는 말소리도 불러 주는 자장가 소리도 고스란히 아이 방으로 들어온다. 어느 날. 아이가 자못 의미심장한 듯 말했다.

이상해요. 치와와 짖는 소리와 그 댁 할머니가 뜰에 나와 아기를 어르는 노랫소리의 톤이 똑같아요.

가족이라는 말을 새롭게 실감할 때가 바로 그런 순간들이다.

 

 

생물학적인 아버지는 제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얼마 전 어떤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내뱉던 대사 한 마디가 내 귀에 크게 들려온 것도 그런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즈음 또 아침 신문에서 생후 6개월 만에 프랑스로 입양되었던 아이가 올해 다시 집권한 사회당 정부의 한 장관이 되었다는 기사가 났다. 그녀는 우리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내년쯤 한국에 갈 예정이지만 혈연을 찾을 생각은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런 것에 자꾸 눈이 가고 귀가 가는 것을 보면, 가족이라는 것에 대한 나의 생각이 어느덧 변화하는 세월의 등에 훌쩍 업혀 있다는 것을 느낀다. 혈연이라는 것에 단단히 묶여서 어떠한 경우에도 떠나지 않는 사람, 늘 그 자리에서 지켜봐 주는 누군가라고 생각하던 가족이라는 말에 대한 경계가 이렇듯 예서 제서 슬슬 무너지고 있다. 여전히 구식 사고에 젖어 있는 나로서는 혈연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헛헛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각의 폭이 넓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려고 한다.

 

오늘도 현관에 들어서면서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허키야! 엄마 왔다.

허키는 12년 전에 우리 가족이 된 고양이다.

 

 

수필가, 번역가

수필집 ≪낮에 나온 반달≫ ≪혼자놀기≫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