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 좋구나 - 한혜경
지난 토요일 서울시와 대산문화재단이 주최하고 서울문화재단에서 후원하는 한강문학축전에 다녀왔다. 선유도한강공원에서 가을의 정취를 더할 수 있는 여러 문학행사가 진행되었는데, 그 중 문예창작과 대학생들의 문학낭송공연 대회에서 심사를 맡게 되어서이다.
문학낭송공연은 문학작품을 낭송하는 대회인데, 지난해엔 첫 행사라 정확한 지침이 없었다. 5분 안으로 낭송해야 하며 배경음악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두 가지만 알려주었을 뿐이다. 우리대학 학생들은 고지식하게 시 한 편만 낭송했는데, 다른 대학 팀들은 화려한 의상에, 소도구를 준비하기도 하고 노래며 연극이며 다양한 방법을 총동원했다.
기가 죽은 학생들에게 괜찮다고 준비해온 대로만 하라고 했지만 나도 내심 기분이 좋진 않았다. 5분을 넘긴 팀들도 많았건만, 시간과 상관없이 볼거리가 많은 팀들에게 상이 돌아간 것이다. 심사를 맡은 선생님들을 위한 저녁자리에서도 흥이 덜 났다.
올해엔 1학년 학생들 4명이 참가해보겠다고 해서 작년의 분위기를 말해주면서 이번에는 연극적 요소나 노래를 좀 활용해보라고 권했다. 뒤늦게 2학년 여학생이 함께 하고 싶다고 해 모두 5명이 출전하기로 했다.
내용은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을 활용했다. 취업 때문에 앞날을 걱정하는 청취자의 사연을 읽어주고 이를 위로하기 위해 김수영의 ‘풀’을 음악에 맞춰 들려주는 것이다. 노래방까지 가서 연습하는 등 열심히 했다고 해서 이번엔 상 좀 타려나 기대가 되었다.
행사당일도 날씨가 좋아 선유도의 풍경과 가을의 정취가 조화를 이룬 듯 아름다웠다.
낭송대회까지 시간이 좀 남아 다른 심사 선생님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팀의 대표인 대영이가 의논드릴 일이 있다면서 다가왔다. 뒤늦게 합류한 2학년 수경이가 사실은 1학년인 영식이를 좋아하는데 좋아한다는 고백을 우리 공연할 때 무대 위에서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영식이는 수경이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상태라고 하며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물었다.
처음엔 황당했다. “요즘 애들이란…… 하여튼……”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수경이의 마음이 얼마나 진지한 것인가는 둘째고 행사 진행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우선이었다. 조금 생각하다가 일단 사회자에게 맡겨보자고 했다. 사회를 맡은 선생님은 아직 젊어서인가 그 학생의 소망이 너무 간절한 것 같으니 도와주고 싶다고 했다.
드디어 대회가 시작되었고 우리 순서가 되었다. 실수하지 말아야 하는데, 하는 마음 과 수경이 고백은 어찌 되려나, 하는 걱정이 섞인 채 지켜보았다. 학생들은 실수 없이 잘 마치고 퇴장했다. 이제 사회자가 어떻게 진행하려나 생각하니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사회자는 “지금 막 따끈따끈한 편지 하나가 전달되었어요.” 하며 운을 떼더니 “처음엔 선후배 사이였는데 어느새 그가 이성으로 느껴졌어요. 그런데 그는 아직 내 마음을 모른답니다.”는 요지의 편지를 읽어주었다. 그리고는 “이 주인공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무대로 모셔볼까요?” 했더니, 예상 밖으로 관중들이 열광적으로 호응하는 게 아닌가.
무대로 올라온 수경에게 사회자가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상대방은 이 사실을 아는지 등을 물어보는데, 대부분 20대 대학생들인 관중들은 손뼉도 치고 환호도 하며 재미있어했다. 좋아하는 상대가 이 곳에 있느냐는 질문에 수경이 그렇다고 대답을 하자 관중석은 더욱 열광했다. “보여줘! 보여줘!” “올라와! 올라와!” 낭송공연은 뇌리에서 지웠다는 듯 신나게 외치는 것이었다. 행여 진행에 누가 될까 걱정하던 나는 열띤 분위기에 완전히 마음을 놓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무대를 지켜봤다.
영식이가 쭈뼛거리며 올라오자 관중들은 또다시 “안아줘! 안아줘!”를 연호한다. 사회자는 영식이에게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이겠느냐고 묻고 영식이는 곧바로 대답을 못한다. 관중들은 또다시 “받아줘! 받아줘!”를 연호하고. “오늘은 이 두 사람을 찾지 마세요.” 사회자의 재치있는 말에 모두들 파안대소하는데, 영식이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수경이를 살짝 안았다. 환호와 박수 속에 두 사람이 무대를 내려올 때 마침 날이 어두워져 그들 뒤로 후광처럼 조명이 환하게 빛났다.
한 15분 정도 흘렀을까. 10월의 쌀쌀한 저녁을 뜨거운 열기로 덥힌 시간이었다.
예전엔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고백하기가 쉽지 않았다. 며칠 밤을 뜬 눈으로 새우거나 혼자 끙끙 앓으며 용기를 내어 편지나 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스스럼없이 공개하는 요즘 젊은이들은 용감하다고 해야 할까, 거침없다고 해야 할까, 많이 달라진 것을 느낀다.
개인의 내밀한 감정이 이벤트로 소모되는 느낌도 있지만 어쨌거나 젊을 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는가. 옆의 교수님들 몇 분은 저렇게 공개고백까지 했는데 나중에 헤어지면 어떻게 하냐고 미리 걱정을 하기도 했는데, 나는 오늘만큼은 그들 편에 서기로 했다. 내일은 어찌 되더라도 오늘 이 순간을 즐기는 것, 그것이 젊음의 특권 아니겠는가.
젊어서 참 좋구나. 풋풋한 젊음들 속에서 10월의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계간수필》로 등단(1998년)
현 명지전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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