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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아진 사회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Joyfule 2023. 3. 21. 05:38





맑아진 사회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우리가 어린아이였던 시절 어른들은 툭하면 커서 무엇이 되겠느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장관이 되겠다고 하기도 하고 장군이 되겠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높은 사람이 되면 남들 위에서 군림하고 평생 잘 먹고 잘사는 것으로 생각했다. 나의 세 대는 부패가 많던 독재정권 시절을 거쳐 왔다. 은행을 독점하고 외국 차관을 관리하는 장관은 돈을 배분하는 과정에서 떡고물이라고 칭하는 돈을 먹었다. 정치인들도 거기 달라붙어 이익을 공유했다.

군사 정권시절 장군 출신이면 그 다음에 장관으로 발탁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공기업 사장을 맡곤 했다. 무기를 도입하거나 외국의 석유메이저들로부터 뒷돈을 받아 손자 대까지 잘 사는 모습을 봤다. 언론인들은 그런 권력의 부패에 짓눌리기도 하고 또 적당히 타협하면서 이익을 나누기도 했다. 나는 그런 세상에서 소외된 가난한 서민의 아들로 성장했다. 그런 불공정과 모순 속에서도 민주화와 산업화가 서서히 진행됐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사회가 조금씩 맑아지는 걸 경험했다. 얼마 전 장관을 지낸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장관을 했던 사람들 모임에 나가보면 의외로 쪽박을 찬 사람들이 많아. 아주 가난하게 된 거야. 사유를 보면 여러 가지야. 자식들 사업하는데 집을 담보잡혀 주거나 보증을 섰다가 망한 경우도 많아.”

나의 근거가 약한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막연히 그들은 잘먹고 잘 산다고 여겼다. 그러고 보니 내무부 장관과 중견정치인으로 유명했던 사람이 치과의사한테 돈을 빌리고 갚지 않아 소송을 제기당하는 것도 봤다. 큰 돈도 아니었다. 전직 장관인 친구가 이런 말도 덧붙였다.

“며칠 전 만원인 지하철 안에서 예전에 밑에 있던 공무원을 봤어. 깜짝 놀라 내게 인사를 하면서 장관이 어떻게 지하철을 탈 수 있느냐는 표정을 짓더라구. 잠시 입었던 장관의 관복을 벗으면 자연인이고 평민인데 당연히 지하철을 타야 하는 거 아니야? 장관을 했었다는 사실이 사는데 정말 불편해. 어떤 자리에 가든 대접을 받는 데 말이야 품위를 유지하려면 밥이라도 사야 하는데 돈이 있어야 말이지.”

전직 장관인 친구의 말을 통해 우리 사회가 보다 정화된 걸 실감했다. 한번 장관을 하면 대대손손 잘살던 전근대적 풍토가 없어진 것이다.

얼마 전 내가 군 초급장교 시절 사단장이던 분을 우연히 지하철역엘리베이터에서 만났다. 몇 만명의 부하들 앞에서 붉은 별판을 단 차를 타고 사열을 하던 분이었다. 그는 육군대장까지 승진한 후에 전역을 하고도 대사와 대학총장등 화려한 경력을 가진 분이었다.

그 분을 식당에 모시고 가서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그와 얘기를 하던 중 이런 말을 들었다.

“얼마 전에 전직 대한민국 장군들 백 명이 모이는 자리가 있었지. 회의가 끝나고 밥을 먹어야 하는데 명색이 별들을 달았던 장군들 출신인데 그 자리에 곰탕 한 그릇씩이라도 낼 수 있는 경제적 여유를 가진 장군이 없어. 나라에서 주는 작은 연금으로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어. 그래서 할 수 없이 그중 제일 높은 별 네 개 출신인 내가 밥을 샀지. 장군 출신들 대부분 가난하게 살아.”

과거의 부패한 장군들의 화려한 삶에 비해 초라함을 느낄지 모르지만 나는 악취나는 구정물이 흐르던 개천이 맑은 물로 바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평생을 법관 생활을 했던 분이 있다. 그분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한번은 재판을 하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는데 누가 사과상자를 놓고 갔더라구. 그 안을 봤더니 돈다발이 들어있는 거야. 누가 보냈는지 대충 짐작하겠는데 참 난감하더라구. 그래서 그 사과상자를 들고 그 집을 찾아갔지. 골목 안에 있는 집이었어. 문이 잠겨있고 그 사람이 집에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았어. 그 집 대문 앞에서 기다리는데 추적추적 비가 오더라구. 새벽까지 사과 상자를 머리에 이고 기다리는데 이게 뭔가 하는 한심한 생각이 들더라구.”

그는 청렴한 판사였다. 나중에 변호사를 했어도 평생 반듯하게 살았다. 그는 연립주택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명예와 지위를 가지고 있던 그들에게는 가난이 고통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그건 사회가 점점 건강해지고 있다는 징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시절 잠시 대통령 직속 기관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이따금씩 중진 언론인들을 호텔에 초청해서 식사를 제공하면서 정책을 설명하기도 하고 그들의 의견을 들었다. 그런 자리가 있을 때면 관례처럼 돈이 든 봉투가 언론인들의 식탁 자리마다 그 옆에 놓여 있었다. 대통령이 주는 촌지라고 할까. 그들이 돌아간 후에 보면 식탁보 아래 돈봉투가 조용히 숨겨져 있는 경우가 있었다. 겸손하게 돈을 거절하는 언론인의 청렴한 모습이었다. 그런 언론인들이 쓴 컬럼을 보면 그 행간에서 맑고 향기로운 기운이 퍼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그런 능력 있고 깨끗한 언론인들이 세월이 흐르니까 하나씩 둘씩 회사에서 퇴직을 하는 걸 본다. 


글쟁이인 그들은 퇴직해도 글쟁이였다. 개인적으로 인터넷신문을 창간하고 수십년 쌓아온 경륜을 그대로 발휘하고 있다. 그런 분들의 개인 언론은 어떤 매체보다 품질이 우수한 것 같다. 그들의 수십년 경험과 능력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사라는 조직의 우산 아래서 월급을 받을 때와는 형편이 달라진 것 같다. 직접 모든 일을 해야 하고 돈에 쪼들리기 마련인 것이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조직에서 나와 개인 법률사무소를 차렸을 때 우울한 마음이 그들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바르게 살겠다고 마음 먹을수록 돈은 더욱 멀리 도망치는 성질을 가진 것 같다. 우리 사회가 조금이라도 맑아진건 자기 소명에 충실하고 소박하게 살아온 사람들의 숨은 노력에 있지 않을까. 한 부패사건이 터지면 매스미디어가 집단적 공격적으로 보도를 해서 사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물 한방울을 바다인 것 같이 과장하기도 한다. 나는 그래도 맑고 향기로운 사람들이 더 많다고 믿는다. 그리고 역사는 좋은 쪽으로 진보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