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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판사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Joyfule 2023. 3. 22. 13:54





행복한 판사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동해에서 서울로 올라와 친한 선배와 서래마을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함께 가을 햇볕이 내려쬐는 반포천 길을 산책했다.

그는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기소됐을 때 재판장이었다. 정주영 회장에게 그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판결문을 쓴 사람이었다. 겸손까지 포함해서 그는 이 땅의 재벌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 법관이었다. 어느새 그도 칠십대 중반을 넘은 노인이 되어 있었다.

“요즈음은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계세요?”

내가 물었다.

“집에 우리 부부 둘이만 살아. 나는 하루종일 집에서 글을 쓰고 있어. 작년에 첫 소설집을 냈는데 지금은 두 번째 작품을 쓰고 있어. 내가 대표로 있던 로펌도 그만두고 변호사일도 아주 접어 버렸어. 더 이상 사건에 신경 쓰고 시간 뺏기고 그렇게 살기 싫어서야. 일생 살아오면서 지금이 제일 행복한 시간인 것 같아. 아내는 아침이면 밖에 나가 친구도 만나고 하다가 저녁에 돌아와. 내가 글을 쓰라고 배려해서 그렇게 하는 것 같아.”

늙은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는 점에서는 나도 동감이다. 더 이상 돈을 벌지 않아도 된다. 어떤 의무도 사라졌다. 많은 걱정들을 세월이 풍화시켰다. 황혼과 밤 사이의 평화로운 작은 틈이라고 할까. 나는 그가 하는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수십년 한 판사 생활을 돌이켜 보면 남이 싸우는 얘기들을 평생 들어야 하는 직업이잖아? 또 대부분 하는 짓이 더러운 거짓말대회잖아? 서로 멱살 잡고 물고 뜯는 지옥 같은 그 광경을 억지로 봐야 했던 시절이지. 판사실 책상 위에 산더미 같이 쌓여있는 기록도 얼마나 지저분한 내용들로 가득 차 있었어? 그 안에는 이를 가는 분노의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똥물 같은 탐욕의 악취가 풍기기도 하지. 또 자기만 보는 어리석은 외눈박이들을 보아왔지. 판사란 누군가 해야 할 일이기는 하겠지만 인간들이 싸우는 시궁창 속에서 살아온 세월이 아까운 것 같아.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그 시간을 얼마라도 돌려받고 싶은 심정이야.”

내가 보기에 그 선배는 세태나 권력에 흔들리지 않는 심지가 굳은 판사였다. 그는 특히 법원만이 검찰 권력을 통제할 수 있고 판사들은 그렇게 깨어있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입법을 담당하는 국회의원들이 검찰의 수사를 받을까 두려워 하는 세상에서 양심을 가진 판사들 아니면 검찰 권력을 통제할 길이 없다고 해서 미움을 받았다. 그는 판사라는 법복 속에 갇혀 살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가 젊었던 시절 어느날 우연히 그의 사무실을 들린 내게 그는 이런 말을 했었다.

“나는 말이야 돈이 없어서 그렇지 조금의 여유만 있다면 지혜가 있거나 좋은 사회명사들을 만나 점심을 대접하면서 지혜로운 얘기를 듣고 싶어. 그러면 많은 걸 얻고 삶이 풍요로워질 것 같아.”

판사의 박봉으로는 외부와 차단된 판사실에서는 그렇게 살기가 힘들다는 얘기였다. 젊은 시절 그와 같은 아파트의 위 아래층에 살았다. 내가 돈에 궁할 때 아내는 동네 꼬마들 몇 명을 모아놓고 그림을 가르쳤다. 그때 그림을 배우러 온 아이중 하나가 그 선배의 아들이었다. 판사 월급에 일이만원 내는 것도 쉽지 않은 눈치였고 아내가 그렇게 번 돈으로 나는 도움을 받았다. 판사인 그 선배의 집에는 칙칙 거리는 흑백텔레비젼이 놓여 있었다. 세상이 모두 컬러텔레비젼으로 변해 있을 때였다. 그렇다고 그 선배가 나같이 궁색한 흙수저 출신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청렴한 대법관으로 유명한 분이었다. 아들인 그는 사법고시에 수석합격을 했다. 처가는 학원 재벌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아 보였다. 심지어 독일유학을 가서 단기간에 학위를 따내어 독일교수들을 놀라게 했다는 소리도 들었었다. 그런 사람이 스스로 낮은 자리에 임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그걸 청빈이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검찰을 법원이 견제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 때문에 그는 공작에 의해 억울하게 법원에서 나왔다. 그 억울함마저 세월에 풍화되고 그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덧붙였다.

“소설을 배우려고 문인들을 만나봤지. 거기도 어떤 틀이 있더라구. 난 매이지 않기로 했어. 팔리지 않으면 어때? 대중에게 인기가 없으면 어때? 남을 의식할 필요가 뭐 있어? 꼭 문학적인 묘사나 미문(美文)일 필요가 뭐 있어? 그냥 나만의 창조적 작업을 하면서 나머지 인생의 여백을 채우는 거야.”

나와 헤어지고 사라져 가는 선배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