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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했던 내 소원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Joyfule 2023. 4. 10. 09:52





 망각했던 내 소원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나의 기억에 지워지지 않는 한 잔상이 남아있다. 기울어져 가는 초가집 부엌 한쪽에 차곡차곡 쌓여져 있던 장작더미다. 초등학교 시절 방학이 되면 강원도 깊은 산속 마을에 사는 할머니의 초가집에서 묵곤했다. 나뭇가지를 때서 진흙구둘방을 덮 히고 밥을 했다. 그 지설 불쏘시개로 쓰는 솔잎 한 웅큼 나뭇가지 하나도 정말 귀했다. 산마다 임자가 있어서 주인의 허락 없이 함부로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 하나도 주워오기 힘들었다. 보따리 장사를 하던 할머니는 장작들을 구해 초가 부엌의 벽에 쌓아갔다. 마침내 벽의 위까지 가득 찬 장작을 바라보며 할머니는 흐뭇해 했다. 어린 나도 그걸 보며 마음이 넉넉해지는 느낌이었다.

십여년 전 나는 잡목이 우거진 험한 돌산을 하나 구입하게 됐다. 사람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악산(惡山)이라고 했다. 공시지가로 싸게라도 군청에 팔아치우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자식들에게도 부담만 준다고 했다. 법적인 인허가가 힘든 우리의 산은 설사 괜찮다 하더라도 산수화의 배경으로서 이외에는 마음대로 개발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천대받는 산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졌다. 어린 시절 초가 벽에 쌓아놓았던 할머니 꿈의 확장이라고나 할까.

멀리서 나무가 울창한 산을 바라보면서 가수 조영남씨의 ‘언덕 위 작은 예배당’이라는 노래가사 한 귀절이 떠올랐다. 그 산 자락에 아담한 기도장소 하나를 만들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막연한 몽상일 뿐 나는 실행 능력이 없었다. 조그만 길을 내려고 해도 허가를 받아야 하고 돈이 들었다. 길을 낸다고 해도 한 해만 지나면 풀이 자라나 길은 없어진다고 했다. 책상물림인 나는 작은 집 한 채도 지어본 적이 없다. 심지어 내가 구입한 산에 몇 년이 지나도록 잡목과 넝쿨 때문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매가 믿는 그 분은 나의 힘에 부치는 일은 시키지 않을 것으로 믿고 있다. 나는 요즈음 성경 속 시편 23장을 깍두기 공책에 한 자 한자 또박또박 쓰고 있다. 미루었던 걸 이제야 실행해 보는 것이다. 어느 판사로부터 시편 23장을 천 번 쓰면 소원을 성취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판사는 고등학교시절 담임선생님한테 그 말을 듣고 실행해 봤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다니던 지방고등학교에서 전무후무하게 서울법대에 진학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대학 때 다시 그걸 실행해 봤다고 했다. 재학중 고시에 합격했다고 했다. 사법연수원시절 다시 한번 간절한 마음으로 시편 23장을 천 번 썼다고 했다. 그랬더니 사법연수원을 수석으로 졸업하게 되더라고 했다. 나는 종이학을 천 번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미신 비슷하다는 생각에 실행을 미루었다. 그러다 몇 달 전부터 진지하게 시편 23장을 쓰기 시작했다. 내 소원이 뭘까?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그분이 알아서 처리하시겠지 하고 생각했다. 몇 달 전 쯤 한 남자가 우연히 내게 나타났다. 그 산의 잡목들을 모두 잘라내 가져가고 좋은 나무를 심어주겠다고 했다. 나무장사였다. 나는 운반로가 생기면 산을 들어가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더 반가왔다. 얼마후 작업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와서 나는 현장을 한번 가 보았다. 경사가 급한 산자락에 포크레인이 달라붙어서 나무를 자르고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보기에도 위태위태해 보였다. 급경사의 길로 트럭이 올라와 나무들을 싣고 내려가는 모습이었다.멀리 저수지가 보이고 논밭이 펼쳐진 마을이 내려다 보였다.

어제는 나무장사가 내가 사는 동해로 찾아와 뜬금없이 이런 말을 했다.

“작업을 해보니까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악산(惡山)입니다. 경사도 급하고 바위투성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요. 산에 있는 돌들을 사용해서 언덕에 작은 예배당을 하나 지어보고 싶은 겁니다. 그리고 그 예배당에 이르는 길을 아름답게 꾸며 보고 싶어요. 길가에 놓인 바위나 나무를 그대로 이용하는 거죠. 자연을 훼손하기는 쉽지만 나무를 다시 자라게 하는 데는 삼십년이 걸립니다. 그러니까 좋은 나무는 자르지 않고 보존하는 거죠. 사람들이 그 나무 아래서 기도할 수 있게 하는 겁니다. 나무 장사의 눈으로 이 산을 보던 내 마음이 갑자기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농원을 만들어 우리 부부가 백화 나무를 심고 벌을 쳐서 꿀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 산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휴식처가 되게 하고 싶습니다. 원래 돌투성이의 악산(惡山)에서 최고의 명소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의 머리 속에 이미 어떤 그림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가끔 이상한 생각이 든다. 내 기도가 그분께 닿으면 그 분의 영이 관계된 사람의 영에 들어가 그 마음과 행동을 조종하는 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나와 헤어진 후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터무니 없다는 생각을 할 지도 몰라요. 내가 보기에는 본인의 의사와 전혀 다른 말을 입에서 내놓고 있는 것 같아요.”

그는 이익을 추구하는 장사였다. 나무를 다 베어 팔아야 돈이 된다. 그런데 엉뚱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저는 하나님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드는 겁니다. 나도 이상해요. 하여튼 작은 예배당을 짓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이게 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시편 23장을 사백번 밖에 안 썼는데 그 분은 내 소원을 일깨워 주고 직접 실행까지 해 주시는 것 같다. 영적인 세계는 내가 모르는 여러 신비한 작용이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