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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종치기 체험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Joyfule 2023. 4. 12. 13:48





젊은 날의 종치기 체험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대학 시절 책 몇권을 들고 강원도 깊은 산골의 절에 들어가 묵었던 적이 있다. 그 절에는 스님 한 분이 계셨다. 스님은 매일 법당에서 목탁을 두드리면서 “지장보살”을 부르고 있었다. 같은 단어를 그렇게 무한 반복하는 게 무슨의미가 있을까 의문이었다. 종교에서 만트라라고 해서 같은 음절의 단어를 반복하면 마음에 어떤 공명을 일으키고 그 게 신이 존재하는 곳의 기슭에 물결친다는 소리도 얼핏 듣기는 들었다. 어느 날 그 스님이 내게 새벽 예불이 시작될 무렵 종을 쳐 주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혼자 있는 스님이 예불과 종치는 두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별 생각 없이 승낙하고 종치는 간단한 요령을 배웠다. 그 절에는 전기시설이 없었다. 다음날 새벽 네시경 나는 촛불을 들고 종각으로 갔다. 붉은색 각살창 안에 거대한 종이 매달려 있었다. 내가 ‘두둥’하고 짧게 먼저 소리를 내고 이어서 줄에 매달려 있는 나무둥치를 뒤로 길게 밀었다가 자연스럽게 종으로 다가가게 했다.

“퉁”하는 소리를 내면서 둔중한 음이 너울을 일으키며 낮게 퍼져나갔다. 내가 치는 종소리가 끝이 나면 거기에 화답하듯 스님이 대웅전 안에서 나무망치로 판철을 치는 소리가 음악의 크레센도 같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목탁소리가 나고 강물같은 독경소리가 이어졌다. 종교적 신앙심 없이 시작한 행위라 얼마가 지나자 싫증도 나고 겁도 났다. 밤중에 오줌이 마려워도 멀리 떨어져 있는 절의 화장실이 가기 싫었다. 매일 새벽 촛불을 들고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종각에 가기가 두려워졌다. 그만둘까 하다가 ‘그래도 약속은 약속인데’ 하는 생각에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점심무렵이었다. 스님이 이런 말을 했다.

“어제 낮에 혹시 졸음이 올까 봐 똑바로 서서 목탁을 머리 위에서 치면서 지장보살을 부르고 있었어. 그런데 마군(魔軍)이 와서 내 양 손목을 꽉 잡는 거야. 아무래도 기도를 망친 것 같아 이제부터 다시 백일기도를 시작해야겠어.”

귀신이 방해한다는 소리에 나는 은근히 쫄았지만 내색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주문이라는 건 뭐고 귀신은 뭔지 궁금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아니라 귀신에 대해 하는 말을 ‘진언’이라고 한다고 했다. 부처가 한 태을주라는 진언을 계속 염송하면 그 주문의 마디 마디 마다 어떤 영적인 존재가 감응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적 존재를 통해 어떤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조선의 선조때 김경흔이란 특이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여러 주문들을 수집해서 직접 실험해 보았다고 했다. 그는 그중 ‘태을주’가 가장 효력이 있다고 주위에 알렸다. 조선말 종교의 천재인 강증산은 그를 따르는 도인들에게 태을주를 권했다.

지금도 그를 받드는 대순진리회에서는 태을주를 염송하고 있다. 인도철학등에서 보면 일정한 음절을 계속 반복하면 내면에 공명이 생기고 그것이 우주와 통하기도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스님의 ‘지장 보살’ 무한반복은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대학 시절로 기억을 다시 되돌리면 그 마지막 날이 정말 힘들었다. 

그날 새벽녘이었다. 밤인데도 내 앞에 단청을 한 대웅전이 환하게 보였다. 갑자기 대웅전의 푸른 창살문들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누런 베옷을 입은 수십명이 걸어나오는 게 보였다. 머리를 빡빡깍은 아이도 있고 어른도 있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싱글벙글 밝게 웃으면서 재갈거리며 내 앞을 지나쳐 절문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들이 누군지 궁금했다. 

순간 눈을 번쩍 떴다. 꿈이었다. 눈앞은 농도 짙은 어둠이었다. 눈을 감고 있으나 뜨고 있으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머리맡에 놓은 성냥곽을 더듬어서 그 옆에 놓아두었던 초를 켰다. 으스스한 기분이 들면서 무서웠다. 꿈에서 본 존재들은 지장기도의 대상이었던 영들 같았다. 종각으로 가지 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괜한 부탁을 받고 생고생한다 싶었다. 그래도 마지막 날이고 사나이가 한 약속은 지켜야 했다. 그날따라 종각 입구의 붉고 푸른 단청이 더 기괴해 보였다. 그 안의 어둠 속에 뭔가 웅크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라도 들리면 기절할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 마지막 종을 치고 한숨을 푹 쉬었다. 


벌써 오십년이 된 그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나는 기억속의 그 팩트를 놓고 늙은 지금의 시각으로 재해석해 본다. 성경을 보면 예수는 직접 주기도문을 제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주기도문이나 주문이나 같은 게 아닐까? 반복해서 염송하면 성령이 감응할 것 같다. 찬송가도 곡조 있는 기도라고 한다. 기도의 방법은 다양할 것 같다. 일정한 음절을 쓰면서 무념무상의 상태로 돌입할 수 있을 것 같다. 노년에 하는 여러형태의 기도행위가 있을 것 같다. 각자 자기에 알맞은 기도를 하는 것도 삶을 풍성하게 하는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