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자유롭게 자기답게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Joyfule 2023. 4. 8. 11:47





 자유롭게 자기답게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이십대 무렵 나는 추리소설에 빠졌다. 소설속에 등장하는 집념이 강한 주인공 형사에게 강한 매력을 느꼈다. 기사소설을 많이 읽다가 기사 흉내를 낸 돈키호테처럼 나도 잠시 경찰이 되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청의 특채공고에 지원서와 이력서를 내 보았다. 법 전공자를 경찰서 수사과장으로 발령을 내려는 것 같았다. 경찰청에서 간단한 테스트와 면접이 있었다. 법과 관련이 없는 주제를 주고 그에 대한 의견을 써보라고 했다. 별로 힘들지 않았다.

면접을 보기 위해 경찰 총수가 쓰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감색 제복 위에 은빛 나는 왕무궁화를 몇 개씩 단 사람이 다섯명가량 앉아 있었다. 번쩍거리는 경찰의 최고위급 간부인 것 같았다.

“경찰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중의 한 사람이 내게 물었다.

“솔직히 좋은 인식이 아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경찰서에서 떡을 해놓고 초청을 해도 가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다고 할까요?”

“어?”

그들이 모두 예상외의 대답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말을 불쑥 해 놓고나서 적당히 둘러댔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솔직하기는 한데------”

경찰 총수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면접관들은 내가 한 말을 자신들의 조직에 대한 비난으로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선망한 건 소설속에 나오는 주인공 형사였다. 어려서 동네 파출소에서 본 독사같은 눈을 가진 순경이 아니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은 싫어했다.

면접관들의 얼굴에 덜 익은 감을 씹는 떫어하는 표정이 보였다. 뭔가 나에 대해 반격을 하고 싶은 얼굴들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왕 무궁화를 두 개 단 사람이 벼르는 어조로 내게 물었다.

“제출한 이력서를 보니까 취미란에 음악이라고 써 있던데 진짜요?”

그는 내가 적당히 쓴 것으로 추정하는 것 같았다. 나는 중학교때부터 학교 밴드반이었다. 대학 이학년까지 음악을 했었다. 그들 앞에서 그걸 얘기해야 할까 속으로 망설였다.

갑자기 속이 뒤틀렸다. 면접관들이 서로 눈짓을 하면서 같이 나를 혼내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너 한번 혼나 봐라’하고 노골적으로 트집을 잡으려는 것 같은 낌새가 느껴졌다.

“이력서의 취미 기호란에 쓰라고 해서 그저 형식적으로 쓴 거죠.”

그런 말이 툭 튀어 나갔다.

“허어”

면접관인 그들의 입에서 묘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오히려 그들이 난감해 하는 표정이었다.

“음악에서 메트로놈이 뭐 하는 건지 알아요?”

질문을 던졌던 왕 무궁화 두 개가 잘 걸렸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박자를 세는 기계를 물으면 그의 음악에 대한 지식을 알 것 같았다.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았다. 비틀즈의 노래가 자유이고 신 바람인걸 그가 알까 의문이었다. 제복과 번쩍 거리는 계급장을 달고 있는 그들에게서 옹졸한 인간을 보는 것 같았다. 실망스러웠다. 그 며칠 후 합격을 했다는 통보서가 날아왔다. 의외였다. 경찰청 인사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임관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소설 속같이 집념을 가진 멋진 경찰관들이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인사담당이 분노한 어조로 소리쳤다.

“우리들은 수십년 걸려도 그 계급에 가지 못해요. 그런데 그걸 안 하겠다니?”

미안했다. 그렇지만 나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다. 아예 발을 들여놓지 않기로 했다. 그들이 나를 면접한 게 아니라 내가 최고위 간부들을 면접한 것 같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고 사법시험 면접관을 몇 년 한 적이 있다. 면접의 전문가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고시를 합격한 사람들의 왼쪽 뇌는 다 좋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나 한 번도 검증되지 않은 것이 오른쪽 뇌입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거기 들어있으니까요. 대부분 응시자들이 지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어떤 대답을 할 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는 독특하게 자기 심정 그대로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솔직한 건지 아니면 사회와 동떨어진 사람인지 잘 평가하셔야 할 겁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를 다시 돌아보았다. 경찰청 면접 때의 나는 솔직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사회와 동떨어진 사람이었을까. 그 둘 다 인 것 같기도 했다. 주위를 보면 내남없이 위선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판검사나 변호사들에게 왜 법을 공부했느냐고 물으면 정의를 위해서라고 한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도우려고 한다는 게 모범답안이다. 실제로는 어땠을까. 고시공부를 할 때 보면 경주마 같이 앞으로만 달린다. 출세해서 잘 먹고 잘살고 싶었다. 세상에 대해 복수하고 싶은 쇠꼬챙이 같은 마음도 숨어 있다. 그런 내면의 야망을 가린 채 이중성 속에서 살아온 건 아닐까. 그런 속에서 또 다른 소리가 들렸었다. 자유롭게 자기답게 살라는 그 분의 속삭임이다. 그 분이 말해주는 건 소리가 작지만 항상 진리였고 은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