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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점쟁이 - 백사겸

Joyfule 2018. 1. 23. 00:42

 

 

맹인점쟁이 - 백사겸

 

23. 술 담배 미신추방 기도인 "맹활약"-전근대적 구습의 개혁

 

한국기독교는 초기부터 술 담배 아편 축첩을 금하는등 구습 개혁에 노력했다. 사진은 기도교 사회운동이었던 절제운동의 하나로 전개된 1922년 대구 금주대회 광경.

러시아공관에 연금(아관파천) 됐던 고종이 1년여만에 환궁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등극한 1897년에 경기도 고양에서는 남감리교 최초의 교회인 고양읍교회가 설립됐다. 5월2 일 리드목사 (C.F.Reid)의 주례로 성인 24명, 유아 3명이 세례를 받았는데 이들 중엔 맹인 점쟁이 출신 백사겸과 그 가족이 있었다.


 

맹인점쟁이 백사겸 입교

일찍 부모를 잃고 설상가상 눈병으로 장님까지 된 거지 백사겸은 생계를 위해 당시 맹인의 천직으로 여겨지던 (합방 직후 통계론 조선 점쟁이의 8할이 맹인)복술업을 배워 일찌감치 명성을 날리다 끝내 기독교로 정착, 초기 수많은 교회를 개척한 전도인이다. 그의 회심의 계기는 감리교 매서인 김제옥이 건내준 '인가귀도' (정도교회 발행, 1894년)라는 책 한권.

이 책은 중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직후 회개하고 전도인이 된 이선생의 사적을 이야기식으 로 꾸민 것으로 돈많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던 이선생이 노름과 주색잡기 아편에 중독 되어 가출, 자식까지 남에게 팔아먹고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된 후 개과천선하여 가정을 다시 일으키고 전도에 평생을 바치다 하늘나라에 간다는 내용.




의료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조선시대에는 병마를 쫓기 위한 굿이 자주 벌어졌다. 병자인듯한 한 노인이 누워 향로를 잡고 무당의 주문을 듣고 있다.

점쟁이로 일찍 성공, 명성에 재산까지 모았지만 '참된 도리가 아닌 단순기술로 어리석은 백 성을 속이고 있다'는 내면 갈등에 시달리고 있던 그에게 이 책은 한줄기 샘물이었다.

'회개한 고양읍 백장님'의 소문은 곧 퍼졌고, 그는 이웃 행주교회를 시작으로 전국을 돌며 간증집회를 인도하게 됐다. 후일 백정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하던 무어선교사를 만나 결국은 정식 전도인이 되기까지 이르렀다.

굳이 맹인점쟁이 백사겸의 개종이야기를 거론하는 것은 그가 기독교가 이룬 한국사회 구습 개혁의 한 전형이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 특히 초기 선교사들의 눈에 비친 당시 한국사회의 구습은 △술 담배 아편 △제사 문제를 비롯한 미신 우상숭배 △지방관들의 부패 △지나친 사법 행형 △여권신장과 관련된 축첩제도 △혼인.장례의식 등을 꼽을 수 있다.

넓게는 개화운동의 일환이었던 이런 구습개혁은 교회와 학교 신문을 통한 민중의식 계몽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래서 한때 기독교인은 '개화꾼', 전도부인은 '개화저고리'라 불리기도 했 던 것이다. 
 

밑으로부터의 횡적 개혁

초기 (1880년대)에는 실학이 맥을 이은 몇몇 양반들과 선각자들에 의해 주도됐던 위로부터 의 개화가 90년대 후반부터는 아래로부터의 횡적 시민운동으로 확산된 것도 민중계몽과 무 관하지 않다.

백사겸의 예에서 볼 수 있듯 애당초 기독교는 사회에 만연돼있던 미신타파에 주력했다. 무 당이나 점쟁이 풍수지관들의 개종이 현저했다. 점쟁이 안종찬, 지관 차시현 등의 개종이야기 가 당시 교계 신문을 장식하기도 했다. 입교한 많은 신자가 집안의 복주와 토주 삼신항아리 등을 부수고 불살랐다.




선교사들의 청교도적 경건과 절제를 이어받은 한국교회는 술 담배 문제가 신암심의 정도를 판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사진은 소반위에 신식 양주병이 놓인 1900년의 한 주막 모습.

그러나 한국사회의 모든 전통풍속이 우상숭배로 간주됨에 따라 사회적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조상 제사문제에 있어 '살아 생전에는 부모를 거역하기만 하다가 죽어서 신주를 모시며 효도를 한다는 것은 우상숭배와 무엇이 다른가'라는 다분히 도덕적인 명제는 한편으 로 수긍 됐지만 경북 영주 땅의 권성화라는 이가 예수를 믿고는 어머니의 신주를 폐하자 '불효'를 비관한 그의 부인이 자살을 한 사건(1920년 8원27일)은 사회의 여론을 들끓게 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무고한 기독교의 희생자'라며 이를 기사와 사설로 크게 다루었고, 양반식 자 교인인 이상재 박승봉 장로 등이 나서 '조상에게 길흉화복을 빈다는 것은 신자로서 있을 수 없으나 그 생전을 사모하고 회고하는 것은 반대할 필요가 없다'고 개인적 견해를 밝히기 도 했다. 양속으로서의 전통문화와 종교적 신념이 빚을 수 있는 갈등이 미처 정리되지 못한 탓이었다.

한편 한국교회가 음주를 금한 것은 선교초기부터였다. 그 단호한 의지는 1890년대 중반의 기록에서 처음 보인다.

'술을 아주 끊기는 쉬워도 적당히 마시기는 어렵다하니 이는 주도의 격언이라...우리 교회는 한 두잔도 금하고 술장사하는 사람과도 상관이 없는지라' (조선그리스도인 회보.1897년 6월 30일)

교회는 계주론을 지어 금주를 적극 권장하고 감리교 선교사들은 공식적으로 금주를 결의, 이를 어기면 출교까지 했다. 
 

항일성격 아편투쟁도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술은 인간성을 해치고 패가망신할 우려도 있는 '개화에 크게 해가 되는 물건'정도로 규정돼 금주의 핵심은 경제적 도덕적인 면에 있었다. 제물포의 한 사람이 입교한 후 술을 끊자 '예수교는 참 사람 고치는 곳'이라 소문이 날 때였다.

금주의 성서적 근거가 강조된 것은 1900년대부터.

'형제들아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인줄 알지 못하느냐. 교인들도 술 담배를 먹지 못하려니와 전도선생들은 더욱 그럴지니...'(대한그리스도인 회보.1900년3월7일)

술의 죄는 △하나님께 대한 죄 △교회법의 불이행 △부모형제 처자에 대한 폭언 △자기 몸 에 대한 해독 등으로 정리되었었다.

성서가 기록될 당시의 유대사회에는 담배란 게 없었으므로 금연에 대한 성서적 경계는 아 예 있을 수 없다. '흡연은 사람에게 백해무익한 고로' 금연은 처음부터 건강. 경제상의 문제 로 취급됐다. 교계 신문들은 신도들의 금연기사를 계속적으로 게제했다.

교회가 이처럼 금주 금연에 적극 나선 것은 선교사들의 정신적 바탕이었던 미국의 근본주 의 신학과 청교도적 생활 이념에서도 기인한다. 아무튼 한국기독교는 이렇게 특성화됐다.

아편에 대한 교회의 투쟁도 치열했다. 정부의 금제조치도 미흡할 뿐 아니라 일본상인들의 공공연한 아편판매에 맞서 항일 민족구원이란 차원도 이에 작용했다. 
 

잔인한 형벌 개선노력

세수증대를 노린 총독부의 아편재배 예산은 매년 늘어났고 약이 귀했던 당시로선 일부 가 정구급약으로 쓰였다고 하더라도 평양의 한 교회병원에 한달 평균 35명의 회생불능 중독자 가 몰렸다고 하니 조선인의 폐해는 심각했음을 짐작케 한다.

미신타파 술 담배문제 외에도 교회는 '형언할 수 없도록 잔학한' 조선의 행형제도 개선에도 나섰다.

1896년 평양의 리목사가 감옥을 찾아 성탄절 헌금으로 성경과 음식을 마련해 주자 '온 시 내가 칭송'한 일을 효시로 1901년에는 벙커목사가 서울의 감옥전도를 허락받음을 계기로 이 승만이 '옥중성경학교'를 개설한 일등이 기록으로 전한다.

또 매관매직한 관리들의 가렴주구와 폭정에 맞서 부당세금 불납운동, 비리관리 고발 등에 도

교회가 앞장서 관리들이 '예수교 있는 고을'을 기피하는 일까지 있었다. '조선사람이 기독교 인이 된다는 것은 그의 생활의 전면적인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혁명은 개인 인격의 재생, 그리고 이를 통한 사회의 정화로 드러났다.

개화를 동반한 교회의 사회개혁은 점진적 온건적 방법을 표방한 청교도적 윤리의 구체화였 다.

/전인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