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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점쟁이 - 백사겸 자손들

Joyfule 2018. 1. 24. 00:51

 

 

 

어머니 백민희(白敏姬)권사
숨은보배 백사겸의 손녀,백남석의차녀

 

 부산피난시절 - 영도바닷가로 가족나들이-이때는 2남1녀  이었지만(42년 ,44년은 산파실수로 사망,

 46년,48년,51년,53년,55년,59년,64년 8남매를 낳으셨다.

 피난온 분들이 서울에서는 성도교회를,부산가서는 서북교회를,9.28수복후 서울로 돌아와서는 북아현동

 산3번지에 모여들 살며 충정교회(지금은 일산으로 옮겨감)를,세우는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며 살았다.

                                                                               (좌측위사진-부산서북교회 야외예배때3남매와)

 

어머니 백민희 권사는 1918년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산일번지 연희전문 사택에서 출생 했다.당시 외조부 백남석(白南奭)은 연희전문( 현 연세대학) 의 영문과 교수 였었다. 그의 부친이 백사겸 이었고  백남석은 개성 송도고보(윤치호 가설립)를 졸업 한후에,  윤치호 의 장학금 을 받아  미국의 에모리대학 으로 유학, 에모리대 와 컬럼비아대 를 졸업, 연희전문 에서 영어를 가르쳤다.(윤치호의일기-역사비평사 출판 p.129 ) 당시 연희전문 교수의 사례는 여유로워서 보일러를 때며 서구식 생활에 풍족했던 것은 월급이  백미 30가마(보통 월급이 백미 한가마상당) 였다고 한다. 백남석은 결혼하여 백영희와 백민희를 낳고 후에 재혼하여 7남매를 더 낳았다.

  

1945년5월 평양에서 교회동료들과 월남 하여 부산까지 함께 피난민 으로 살았다. 언니 백영희는 평양에서 남편(남궁요셉)이 의사로 잘살았으며, 동생을 중매섰고 늘 옆에서 함께 살기를 원했던 언니 백영희는 북한의 사회주의 혼란기에 김일성을 피해 중국 상해로 이주(동생 백민희가족도 동행하여 평양역 에서 상해로 가려다가 유복자인 부친을 홀로키운 시어머니를  남기고 떠나지 못하여  발걸음을 돌리게 ?다. 그후 삼신탄광 업무부장인 부친은 북한노동당 당원이 될수없어서 일찍 평양을 떠나 피난길에 이르게 되었다. 상해에서 장개석의 패전으로 백영희는 홍콩으로,동경으로,미국으로 이민생활,(3남 토니남궁은 스텐포드 아세아문제 연구소 부소장으로 미국측 교섭특사, 북미관계 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짐)70년대초 미국에서 언니 백영희 는 매해 한국을 방문 동생인 백영희를 만나서 가족이민 초청을 하였다.  (사진 1968년 동생을 찾은 백영희 언니 동생부부 와 )

                    

여섯달된 나를 등에업고 피난민들을 잡으러오는 내무서원들을 피해 종로까지 피난와서 안정을 ?은후

나를 앉고 찍은 어머니

     

San Francisco 로 이민온후 상항제일장로교회 에서 성가대로 봉사 하였다.(사진-3남,4남,차녀와 함께)

백남석은 현재명작곡 '가을' 의 작사자 이며 어머니의 모친은 당시 바이올린을 하였다. 그래서

어릴때는 KBS어린이 합창단 이었고 평생 을 성가대원으로 섬겼다, CBS의 '다이얼 Y를 돌려라 ' 라는

 음악프로를 를 애청 하시곤 하여, 나는 어릴때 부터 그런 음악을 듣는것에 익숙했다.

 

 

 1976년 Lake Tahoe,상항제일장로교회 시절                     1992년 12월24일 가족들

 

백영희는 배화고녀를 다닐때 남궁 혁(南宮 爀)의 아들 과 신촌역에서 자주 마주치며 연애를 시작했고 그는 세브란스의전을 다니고 있었다,그의 부친 남궁혁은 미국 프린스턴과 유니언에서 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평양에서 시작한 장로회신학대학의 한국 최초의 신학박사교수로 부임하여 가르치고 있었다. 후에 유학파 박윤선 등이 장로회 신학대에서 가르쳤다. (한국신학사상의 흐름-장신대출판, 참조)

그의 아들 남궁요셉 은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후(세브란스 민광식박사와동창) 백영희와 결혼하여 평양으로 가서 개업의가되었는데, 유일한 동복동생인 백민희를 평양으로 불러서 중매를 서게 되었다.백민희는 평양의 창동교회에서 숭 인상업을 졸업하고 삼신탄광 업무부장으로 재직중인 나의 부친과 만나 결혼에 이르게 된다.

      

   

50 이 다되어 막내 은주를 낳고.........83세에 오랜지병인 당뇨합병증 으로 투병하다 83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음. 내 기억으로는 40대 초반부터 당뇨였으나 당시 한국에서는 치료할수있는

혜택이 어려울때 였고 이민온후에야 의료혜택을 제대로 받을수 있어서 그래도 오래 사신것이다.

*부산피난시절에는 양키담배장사,서울에서는 우동장사,호로병에담은물감음료장사,박상튀기장사

8남매와 살아가기에는 험난한 세월을 견뎌내셨다.

 

*남궁혁-1986 년 배재학당 에 입학,특히 영어를 잘 구사할수 있을정도록 영어에 조예가 깊

             어,김성수,김병로,장면박사의부친등 이 그에게서 영어를 배움. 1900년 배재학당을

             졸업 하면서 인천세관에 취직 이곳을 거처 목포세관에서 일하게 되었다.

             1903년 목포 양동교회에서 Eugene Bell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후 남장로

             교 선교사들을 통해 신학을 권유받고 목사가 되기로 결심 미국유학길에 오른다.

             ( 자료;한국신학사상의 흐름,한승홍 저)-장신대출판부 )-아직 작성중-추후 자세히 올릴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