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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음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Joyfule 2023. 2. 1. 23:04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무릎 꿇음



감옥 안에 있는 그를 접견할 때였다. 감옥 안의 건달들이 멀리서 그를 보기만 하면 머리통이 거의 바닥에 닿을 듯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마치 신이나 왕을 대하는 태도였다.
앞에 마주앉은 조폭두목출신의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중학교 이학년부터 저는 싸움을 하고 다녔습니다. 학교 안에서 다른 아이들을 제압하고 다른 학교에서 주먹으로 이름이 난 아이가 있으면 찾아가 싸웠죠. 어떤 때는 대장이 되어 아이들을 데리고 다른 학교 아이들과 집단으로 싸우기도 했어요. 고등학교 때도 그랬고 힘이 부족할 때는 야구방망이나 칼을 들기도 했어요.”

건달출신들의 성장 과정은 대개 그런 것 같았다. 주먹으로 이름나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기성 폭력조직의 멤버로 가입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대개의 건달들은 집안 환경이 좋지 않은데 저는 그렇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지방유지셨죠. 농토가 많고 정미소와 술도가도 했어요. 덩치가 좋고 힘센 아버지는 인품도 좋고 학식도 많으셨어요. 나는 그런 아버지를 존경했어요. 제가 싸움질을 많이 했지만 머리도 좋고 학교에서 공부도 잘한 편이었어요. 지방도시지만 우리학교에서 일등이던 아이가 판사가 됐는데 저는 그 아이 바로 밑으로 이등 정도 했으니까요. 저도 건달이 되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으면 고시에 합격했을지 몰라요.”

그의 말에는 후회가 묻어있는 느낌이었다. 그 사이에도 접견실 유리문 밖으로 지나가던 근육질의 남자들이 그를 보고 정중한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존경하는 듯한 얼굴들이었다. 그들의 인사를 점잖게 받고 나서 그가 말했다.

“솔직히 저는 건달 세계에서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게 두렵습니다. 이 교도소 안에서 조폭 두목의 또 다른 모습을 보십쇼. 초라한 죄수복에 주전자를 들고 교도관 뒤를 쫄랑쫄랑 따라다니는 처량한 신세입니다. 건달영화에 나오는 화려한 모습을 보고 열광하는 어린 일진들에게 그런 것들이 다 허상인 걸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그보다도 저는 스무살 때 정신을 차리고 건달 세계를 일찍 빠져나온 계기가 있어요.”

“그게 어떤 건데요?”

“스무살 무렵 건달 세계로 들어가 폭력을 쓰다가 구속이 됐어요. 내가 수갑을 차고 포승줄에 묶여서 젊은 검사한테 조사를 받고 있을 때 아버지가 검사실로 들어오셨죠. 아버지는 거의 아들 같은 젊은 검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고 또 비는 겁니다. 아버지는 우리 아들을 제발 살려달라고 절규했어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는 아버지가 그리고 내가 검사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게 하겠다고 결심했죠. 그리고 사업에 뛰어들어 나름대로 성공을 했죠.”

아들을 감동시킨 아버지의 무릎 꿇음이었다. 그는 그 후 제과점도 하고 음식점도 하면서 큰 호텔의 오너가 됐다. 나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업가가 돼서도 나는 특히 검사 앞에서는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았어요. 오히려 덤벼 붙어 싸웠습니다. 죄가 없으면 무서워할 이유가 없죠. 그러다 골프장에서 한 검사와 악연이 시작됐죠. 그 검사는 소설 쟝발잔에 나오는 쟈베르 경감같이 저를 끝까지 조폭 두목으로 간주하고 뒤를 캐는 거예요. 검사와 저의 싸움이 ‘모래시계’라는 드라마로 나왔을 정도니까요. 저는 억울합니다. 거기 나오는 악랄한 조폭 두목이 제가 아니기 때문이죠.”

나는 선입견 없이 그의 말을 들어주었었다. 그가 한 얘기 중에 그 아버지의 무릎 꿇음이 지금까지 기억에 생생하다. 아버지가 무릎을 꿇는 순간 아들의 가슴에 아버지의 사랑이 흘러 들어간 것 같았다. 아들을 위해 검사 앞에 무릎을 꿇은 그의 아버지는 훌륭한 사람이 맞는 것 같았다. 나도 검사실에서 아들이 조사받을 때 옆에 있었던 적이 있다. 아들을 범죄자로 모는 검사에게 분노했었다. 어설픈 자존심 때문에 허리를 굽히지도 못했었다. 용감한 자는 굽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을 굽힌다 해도 아무것도 잃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대신 빈다. 그리고 십자가에까지 매달렸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 아닐까. 아버지의 무릎 꿇음을 보고 그 사랑을 어렴풋이 이해한다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