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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걸음걸이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Joyfule 2023. 2. 4. 00:37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인생의 걸음걸이



꿈속에서 나는 다시 검정 교복을 입은 까까머리의 고등학생이 되어 있었다. 대학입시가 코 앞에 닥쳤다. 그런데 수학이 공부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입시는 수학이 관건이다. 떨어질 게 분명했다. 안달이 났다. 인생이 꼬이는 것 같았다. 미리미리 공부해 두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됐다. 

그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나이 칠십고개 노인인 나를 발견하고 안도감이 왔다. 고비고비 인생사에서 해방이 된 것이다. 여러 번의 시험을 치르면서 세월을 보냈다. 


고시 공부를 할 때였다. 가난 때문에도 빨리 합격해야 할 것 같았다. 수북이 쌓인 두꺼운 법서를 앞에 놓고 막연했다. 

그걸 다 암기하려면 평생 해도 안될 것 같았다. 

재학중 빨리 합격한 사람들을 보면 시험에 나올 것 같은 문제를 백문제 가량 선정해 그걸 달달 외웠다고 했다. 

복권 당첨처럼 예상 문제가 적중하면 출세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고층으로 단번에 올라간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해 봤다. 대학삼학년시절 고시 시험장에서였다. 사일 동안 치르는 시험에서 마지막 날 오전까지 다 내가 달달 외우고 있던 예상문제였다. 합격할 것 같았다. 행운의 여신이 나를 보고 미소 짓는 것 같았다. 드디어 오후의 최종 시험시간이 됐다. 시험장 앞에 붙어있던 문제를 적은 두루마리가 풀어져 내렸다. 하얀 종이에 검정 매직펜으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피의자 보전에 대해 논하라’

나의 예상 문제 속에 ‘피의자 보호’라는 게 있었다. 그것 같았다. 신나게 답안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분쯤 시간이 흘렀을 때 우연히 앞에서 시험 치는 사람의 어깨를 통해 그가 써가는 답안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나와 정반대의 내용을 쓰고 있었다. 나는 내가 문제를 잘못 봤다는 걸 알았다. 방향을 바꾸어 다시 답안을 작성할까 생각했다. 순간 내면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건 컨닝이고 부정행위였다. 그렇게 해서 합격을 한다면 평생 양심의 가책을 받을 것 같았다. 

정의를 추구하는 법조인이 되려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신은 속일 수 없다. 나는 잘못된 답안을 그대로 쓰고 나왔다. 

예상대로 그 과목 하나가 잘못되어 평균점수 영점일 차이로 나는 떨어졌다. 

마음만 바꾸었다면 주위의 찬사를 받고 소년 등과해서 세상출세길이 열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다음해쯤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나는 계속 시험에서 떨어졌다. 뒤늦게 그 이유를 깨달았다. 예상 문제만 외우는 방법은 위험했다. 복권의 일부 숫자가 뒤틀리듯 문제가 전부 적중할 확률이 희박한 것이다. 그때 오랜세월 고시공부를 하고 아주 뒤늦게 고시에 합격한 선배가 이런 조언을 해 주었다.

“열매를 생각하지 말고 꾸준히 물만 준다는 자세로 공부하면 어떨까? 

그러다 때가 되면 열매가 열리는 게 아닐까?
내가 합격하고 그동안 읽은 반복해 읽은 법서의 양을 계산해 봤어. 이십만 페이지가 되는 것 같아. 병목까지 물이 차듯 그런 독서량이 되야 합격한다는 걸 깨달았어. 독서량이 되면 어떤 문제가 나온다 해도 기본점수는 받지. 거기다 몇 개의 예상 문제가 적중하면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게 되는 거야.”

명언이었다. 

그 선배의 말이 지금도 뇌리에 깊게 각인이 되어 있다. 인생은 옳은 길을 가되 적절한 속도와 걸음걸이로 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 젊은 시절 개천에서 벗어나 출세의 사다리를 타고 높이 올라가고 싶었다. 같은 나이에 사다리의 높은 곳에 있는 친구를 보면 부럽고 질투도 났다. 

그러다가 그 사다리가 놓인 벽면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그 벽면이 탐욕으로 도색 된 지위나 돈의 벽인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높이 올라갔느냐보다 깨끗하고 바른 벽에 사다리를 놓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장거리를 걸어야 하는 인생이기도 했다. 그 걸음걸이도 문제였다. 발돋움을 하고 걸어가는 인생은 피곤하다. 다리를 너무 벌리고 걸으면 제대로 걷지 못한다. 자기에게 맞는 보폭이 있었다. 

사람마다 박자가 다른 음악을 들으면서 인생을 걸어가는 것 같았다. 자기취향의 음악을 들으면서 그 박자에 맞추어 자기의 걸음으로 가야 즐겁다는 걸 알았다. 그 결과에 매달리지 않기로 했다. 

내가 도착해야 할 곳은 하나님이 성공으로 축복해 주신다. 

내가 가지 말아야 할 길은 실패로 방향을 바꾸게 하셨다. 성공이나 실패나 다 그분의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