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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기 강물 같은 인생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Joyfule 2023. 2. 5. 00:51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한줄기 강물 같은 인생



실버타운의 윗층에 혼자 사는 칠십대 중반의 임기장이 저녁을 같이 먹자고 나를 초청했다. 평생 항공사에서 보잉기를 몰았다는 분이었다. 그가 바닷가에 갔다가 투망으로 물고기잡는 사람한테서 연어를 사왔다는 것이다. 해질 무렵 그의 방으로 갔다. 노인이 차린 밥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접시 위에 두박하게 잘린 연어조각이 수북이 담겨 있었다. 그 옆에 초장이 있고 반투명 플라스틱 박스에는 공동식당에서 얻어온 밥과 국이 들어있었다.

“커다란 연어를 냉동실에 뒀더니 얼음덩어리가 됐어. 그걸 톱으로 썰어서 조각을 만드는데 어떻게 힘드는지 몰라. 초청한 시간은 됐지 고기는 안 잘라 지지 연어 한 마리 썰기가 이렇게 힘든지 몰랐어. 비행기 운전보다도 힘들어.”

그가 아이 같은 순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위층에 사는 팔십대 중반의 잠수부 출신 노인도 그 자리에 초청받아 와 있었다. 청력이 약했다. 그래도 상대방의 입술이나 표정을 보고 눈치로 다 알아듣는다고 했다. 맑은 소주가 담긴 잔을 부딪치면서 혼자 사는 노인들의 얘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잠수부 출신 노인이 입을 열었다.

“내가 해병대 출신인데 여기 노인 중 한 사람이 자기가 해병대 100기 출신이라고 하더라구. 나보다 한 기 위인 거야. 자기는 해병대를 마치고 경찰이 되어 총경으로 경찰서장까지 했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경례를 부쳐줬지.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인 거야. 그런데 나이를 비교해 보니까 아무래도 나보다 해병대 기수가 위일 수가 없어. 그래서 여기 동해에 있는 함대사령부에 가서 해병대 명단을 확인해달라고 했지. 알고 보니까 그놈이 나한테 사기 친 거야. 경찰서장을 했다는 것도 거짓말이야. 산골 파출소장한 걸 가지고 뻥친 거지. 그래서 만났을 때 너 좀 맞아야겠다고 하니까 도망가더라구.”

늙었어도 마음속은 아직도 아이였다. 그 노인이 임기장을 보면서 말을 계속했다.

“넌 하늘을 날았지만 나는 사십년 동안 수심 사십미터 아래의 어두운 바다 속을 헤맸다. 그래도 나는 바다에 빠져죽은 사람 찾아내는 데는 귀신이라는 소리를 들었어. 바다에서 죽은 사람은 찾기가 힘들어. 그래도 난 잘 찾아냈어. 조류를 아니까 어디쯤 흘러가서 바위에 걸려있겠구나하고 아는 거지. 틀림없어. 시신을 찾아내고 수고비로 천만원을 받은 적도 있어. 신났지. 그런데 죽은 사람을 건져주면 다 고맙다고 인사하는데 산 사람을 건져주면 인사 한마디 없이 꽁무니 빼고 그걸로 끝이야.”

여러 사람의 생명을 구한 그는 자신의 선행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냥 일상이었다. 그 노인이 기장 출신에게 물었다.

“난 깜깜한 바닷속을 기어 다녔지만 넌 하늘 높이 구름 위를 날아다녀서 좋았겠다 그렇지?”

“좋긴 뭐가 좋아? 맨날 정해진 항로를 따라 갈 뿐이야. 조금도 벗어나지 못해. 커다란 뭉개구름이 있거나 번개가 칠 때 허락받고 조금 다른 길로 움직일 수 있을 뿐이야. 관제탑에서 레이더로 비행기를 보고 있기 때문에 꼼짝도 못해.

하는 말이 다 녹음되기 때문에 옆에 있는 부조정사하고 말도 못해. 그냥 깜깜한 밤하늘을 보면서 가만히 앉아 있었어. 평생을 계기가 가득 들어찬 상자 같은 조정실에 갇혀 살았어.”

그는 우울한 표정이었다. 그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벽장에 가서 가방 하나를 꺼내왔다. 그리고 쟈크를 연 다음 그 안에 있는 커다란 납덩어리들이 달려 있는 벨트를 보여주면서 내게 말했다.

“이 잠수부 형이 자기가 평생 물속에서 몸에 달고 다니던 귀한 납벨트를 내게 하사하셨는데 이걸 왜 나한테 줬는지 몰라”

아마도 자기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 잠수장비를 선물한 것 같았다. 실버타운의 현명한 노인들은 자기가 귀하게 보관하던 물건들을 주변에 주려고 했다. 살아서 줘야지 죽고 나면 받기를 꺼려 한다는 것이다. 기장의 말을 못알아들었는지 잠수부 출신 노인은 부리부리한 눈을 껌뻑이면서 뜬금없이 이런말을 내뱉었다.

“너 이 납덩어리 벨트를 두 개만 차고 바닷속으로 들어가면 절대 못 나온다 한 없이 깊은 바다 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

왜 갑자기 그 말이 튀어나오는지 뜻이 애매모호했다. 노인들의 간소한 저녁 파티는 바로 끝났다. 모두 자기 위해 적막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나도 방으로 돌아와 생각에 잠긴다. 나나 노인들의 인생이나 한줄기 강물이었다. 모두들 소년에서 장년으로 그리고 노년으로 흘러 이제 넓은 바다를 앞에 두고 저녁의 넓은 강 하구에서 빙빙 돌고 있는 것 같다. 열매가 익으면 저절로 가지에서 떨어지듯 인간도 삶이 다하면 미련 없이 선뜻 버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한 때인 것 같다. 살아있을 때 다른 존재들과 따뜻한 가슴을 나누어야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따뜻한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