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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고난과 기독교 여성 - 2) 일반 여성단체 활동 2.

Joyfule 2007. 3. 3. 02:14

2) 일반 여성단체 활동

(2) 사회주의 여성단체들

 

 

그러면 구체적으로 고난받는 여성들의 상황에 직면해서 기독교 여성들은 어떤 일을 했는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그전에 우선 사회주의 여성들의 단체활동은 어떠했는가 살펴보기로 한다. "부인의 해방이란 것을 규약과 강령에 직접 내걸고 부인운동을 전개시킨 것은 1924년대 정종형,허정숙,정칠성,박원희 등의 손으로 조직되었던 조선 여성동우회가 그 효시이다."83)

 

1924년 5월 발족된 이 조선여성동우회는 "우리 조선의 무산 녀성은 현재의 이중노예의 상태에서 버서나자"는 의미의 선언을 발표하고 30여명 전도가 모여 창립하였다."84) 또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선언을 하였다.

"녀자는 다못 가뎡과 임금과 성의 노예가 될 뿐이오 각 방면으로 생활에 필요한 일을 힘긋다하야 사회에 공헌을 하여 왓스나 용감한 남성들이 녀성에게 주는 보수는 교육을 거절하고 모성을 파괴할 뿐이라 하엿다... 더욱 조선여성은 그 우에 동양풍 도덕의 질곡에서 울고 있게 하니 이러한 비인간덕 생활에서 분거하야 굿세게 굿세게 결속하자 하였다."85)

 

이러한 선언의 취지하에 조선여성동우회는 그 강령을
(1) 본회는 사회진화법칙에 의한 신사회의 건설과 여성해방운동에 立할 일군의 훈련과 교양을 期함.
(2) 본회는 조선여성해방운동에 참가할 여성의 단결을 기함 86)으로 채택하였다.

이 회는 사회주의 여성의 정예분자들로 조직되어 신흥 기분이 충만하였고 그 활동에 있어서도 기민성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87) 그녀들의 사업은 주로각 지방에 40여개의 지부를 조직하고 교양에 주력하여 순회 강연과 토론, 강좌 등으로 부인운동의 정신을 선전하여 신문,잡지 등 언론기관을 빌어 사회의 여론을 환기시키기에 노력하였다고 한다.88)

 

그들이 벌인 사업은 이념에 따라서 원대하고 방대하게 펼칠 계획인 것을 알 수가 있다. 즉 1926년에 개최된 여성동우회 정기총회는 회원이 50여명이었고 방청자는 수백 명이었는데 당일 결의사항은 노동부인, 농촌부인,직업부인,가정부인,무산여성 등 전여성을 포함하고 있고 여성운동도 여자청년운동,여학생운동,여자사상운동 등 전운동을 포함하고 있다.89)

 

그러나 조선여성동우회는 창립부터 경찰의 심한 감시대상이었고 또한 존립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이념을 구체화하는 운동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즉 그녀들은 노동부인 이안음악회와 같은 소극적 사업을 개최하기도 하였고 90) 또한 무산부인을 위한 기념 강연은 금지를 당하기도 하는 등91) 활발한 활동을 벌이지는 못하였다.

그 뒤를 이어 1925년 1월 21일 주세죽,허정숙,김필순 등에 의해서 창립된 경성여자청년동맹은 여성동우회보다는 한층 더 노동문제에 깊이 관여하였다. 창립시부터 인천철공조합,인천정미공장조합, 인천무산청년동맹,인천선미여공조합 등과 관련을 맺고 있으며 국제부인의 날의 기념식을 갖기도 하고 노동부인들을 위한 야학과 교양강좌를 개최하기도 하였으며 노동부인 위안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또한 여성해방동맹,경성여자청년회,푸로여성동맹,중앙여자청년회 등도 사회주의 여성단체로 여성노동운동에 깊이 관여했으며 결의사항이나 활동도 부인 노동자 임금이나 시간에 관한 것,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야학활동을 主로 하였다.

이와같이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단체들은 여성해방의 기치를 들고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된 여성들의 문제를 다루고자 하였다. 그들의 시도는 주로 노동여성들에게 행해졌다. 비록 그 전략이 낭만적이고 성숙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 시달리는 노동여성들에 대한 관심은 여성문제를 여성의 고유한 문제 즉 성적 억압의 문제로만 다루지 않고 사회문제와 함께 다루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여성노동자들의 문제가 아무리 심각하였다 하더라도 1922년 조선의 여성 노동자의 인구수는 전체 여성인구의 4%에 불과했다.93) 즉 여성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농촌여성의 문제에는 실천적인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것은 산업 사회에 이루지 못한 한국의 사회구조를 무시한 체 무조건 사회주의를 수입하여 실천하려면 사회주의 여성 단체들의 맹점이었다고 하겠다. 즉 노동문제를 중시하는 사회주의 사상이 한국사회에 수입될 때의 과도기적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뭏든 1920년대에 들어와 일기 시작한 사회주의 여성운동은 미숙하나마 사회구조적 해결 방법에 접근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시작된 기독교계 여성단체들은 계급성보다는 주로 교육,계몽활동에 초점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