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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고난과 기독교 여성 - 2. 단체활동

Joyfule 2007. 3. 1. 01:06

2. 단체활동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구국을 위한 참여는 열성적이었고 그에 따른 희생을 치루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보조적인 역하을 담당하였다. 왜냐하면 이런 사회적인, 민족적인 문제를 여성의 입장에서 다룰 수 있는 조직적인 기반이 마련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일상적으로 다룰 수 있는 조직의 필요성이 생겨났고 3.1운동 이후의 조직활동은 기본적으로 여성문제를 기본으로 대응하는 것이었다.

여성들의 조직활동은 기본적으로 여성문제로 기본으로 해야 한다. 사회문제를 여성문제적 시야에서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

따라서 여성들이 그 당시 어떠한 상황하에서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즉 그 당시 여학생들은 어떠 어떠한 상황하에서 있었는데 기독교 여성들의 조직활동은 그 상황을 얼마나 철저하게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는가 하는 것을 규명해야 한다.

물론 기독교 여성들의 조직 활동은 그 대상을 결코 교회여성에게만 국한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피조물들은 모두 다 그들이 고백하든 안하든지간에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그에 따른 인격적인 대우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여성들은 이 땅에서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는 모든 여성들을 위해 그들과 함께 어떠한 일을 했는가가 중요하다.

1) 1920,30년대 여성들의 상황

우선 교회여성들의 단체활동이 시작된 1920-30년대 여성들의 상황은 기독교가 전래된 초기보다는 나아졌음을 알 수 있다. 소수이긴 하지만 여성들은 교육을 받을 수도 있었고 그 교육을 바탕으로 제한되어 있긴 하지만 사회활동을 할 수도 있었다.

1910년 이전까지는 여성으로서 전문직에 종사한 사람의 수가 극히 소수였을 뿐 아니라 그 직업의 종류도 극히 제한되었는데, 1920년대에 와서는 문인,기자,무용가,여배우,은행원 회사사무원, 속기사,타자수,비행사,운전사,차장,미용사 등의 다양하고 광범위한 전문직 및 기술직 업종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교육을 받은 여성들의 주류를 이루는 직업은 주로 교사와 간호원에 국한되어 있었다. 1912년과 1946년 사이 35년간 국민학교 교사의 총수가 증가하는데 여고사의 수는 굴곡이 있지만 꾸준히 증가되고 있으며 전교사의 수에 대한 여교사의 비율도 1928년에 11.5%이던 것이 1938년 14.0%,그리고 1946년에는 12.9%로 약간 감소하긴 했지만 대체로 해를 거듭할수록 여교사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표>     국민학교 교사 년도별 통계
 년 도     총 수    남교사   여교사  총수에 대한 여교사의 비율
 1912      888명       -명      -명             %
 1928    9,214     7,807    1,057          11.5
 1938   14,953    12,863    2,090          14.0
 1946   28,975    25,238    3,737          12.9
                 한국경제연감,조선은행 조사부,1949,p.IV-227.
또한 여성이 의료직에 종사한 초창기부터 여자가 많이 차지한 부분은 간호부와 산파로서 1911-1943년까지의 32년 동안 그 수가 산파는 1,795명 간호부는 1,853명이 증가되었다.

간호부 양성은 구한국시대에 이화학당 부속의료원인 보구여관과 세브란스 의전에서 양성하고 있었고 경성제대 의학부 부속의원에서는 1928년에 비로소 산파,간호부 양성과를 설치하였다. 1940년에는 도립병원등에 간호부, 산파양성소가 전국에 17개소 설치되고 이미 간호원 양성소를 설치했던 세브란스 동대문 병원을 비롯해서 선교계통 병원의 간호원 양송소는 8개소로 늘었다.

이들 간호원들은 그리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즉 1927년 2월 18일자 [매일신보] 1928년 2월 7일자 [동아일보]에 "구호의 여신,간호부"라는 제호하에 간호원들의 종합적인 호소로 의사의 인격적 압박,종과 같은 대우,다른 사람의 죽음을 많이 겪는 일, 월급이 박하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1921년 11 월에 일어난 평양 기독병원 간호부들의 파업은 그러한 실태를 반영해 준다.59)

 

그러나 이들 직업여성들은 1920년말부터 일본제국주의의 격화로 경제불안이 만성적으로 지속되고, 따라서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적 수탈이 더욱 가혹해져 가고 있던 당시의 비극을 한 몸에 안고 살던 농촌여성,근로여성들에 비해서는 혜택받은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그 당시 농촌의 경제사정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일제의 식민지 농업정책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조선을 일본의 식량공급지로 묶어두는데 있었고 그에 따라 농업정책을 맞추어 간 것이다. 식민지화 이후 첫 경제정책으로 단행된 "토지조사 사업"은 농토를 일시에 일본인 및 일본기관 소유로 만들고 자본주의 발달에 희생된 일본농촌을 대신하여 조선을 그 식량공급지로 정착시키기 위한 기반을 마련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기반 위에서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함으로써 일본으로 보내는 쌀공급량을 늘릴 수 있었고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도발한 후에는 이른바 "농촌진흥 운동"을 일으켜 농민을 독려하여 식량공급에 차질이 없게 했으며 태평양전쟁을 도발할 무렵에는 곡물의 공출제도를 실시하여 일본인을 위한 식량공급을 강요했던 것이다.

 

다음 식민지 농업정책은 지주제를 강화하여 보호한 대신 자작농 및 자소자농을 몰라시켜 소작인으로,더 나아가서 이농민으로 만들었다. 자작농 및 자소작농의 몰락은 농촌인구를 지주와 소작인의 두 계층으로 고정시켜, 농촌 부르조아지의 성장을 저지했고 농민운동을 탄압하고 지주제를 강화하여 이 농민을 증가시킴으로써 값싼 노동력을 대량으로 만들어 침략전쟁에 이용한 것이다. 식민지 시대를 통해 농민분화도 급격히 일어났고 상업적 농업도 어느 정도 발달했지만 그것이 농촌 부르조아지의 성장이 아니라 오히려 지주 소작제를 강화시켜 나간 과정이었다는 점에 식민지 시대 경제사,나아가서 전체 역사의 성격이 담겨 있다.60) "토지조사사업","산미증산계획","농촌진흥운동","공출제도"등으로 이어지는 식민지 농업정책으로 조선농민을 몰락 일로에 있었다. 농민 몰락의 구체적 과정은 자작농 및 자소작농의 완전한 소작농화, 소작농의 세궁민화,세궁민의 유랑민 및 걸인화로 이어져 갔다.

 

1925년의 조선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총농가호수의 46.6% 연간 평균 야4 12원의 적자영농을 하고 있었다. 1926년의 통계에는 세궁민이 총인구의 약 11%,약 215만명이고 걸인이 1만명이었으나 1931년 통계에는 세궁민이 약 520만으로 총인구의 25%로 증가했고 걸인의 수도 16만명으로 급증했다. 소작농민의 75%가 부채가 있고 그 호당 평균 부채액은 65원이나 되었다.

 

식민지 농업정책의 결과로 절대적인 빈곤에 빠진 농민들은 결국 농촌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1925년의 경우를 예로 들면 1년간에 농촌을 떠난 인구는 15만명 이상이었으며 이후에도 이농인구는 계속 증가했다. 이농인구는 최악의 경우 걸인이 되거나 아니면 산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었으며 혹은 일본,만주,시베리아의 노동시장으로 흘러가거나 국내외 각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모여드는 이른바 토막민이 되었다.61)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의 농촌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이중적인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신여성]1926년 1월호에 실린 "조선의 농촌여성"에는 농촌여성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 그들은 농촌에서 얼마마한 노동을 하고 잇는가 함일 것입니다. 대개 도회에서 생장한 사람들은 추측하기를 여자따위가 농촌에서 일을 하면 얼마나 하랴 하지만 실제는 농촌여성이 농촌의 남성보다 적어도 2배는 한다고 해도 과연이 안임니다. 일의 종류로도 그러코 시간으로도 그럿습니다. 남자의 하는 일은 농사라는 단순한 일을 마터하지만 여자고 보면 대개 이상에 말한 것은 매일의 과정임니다. 종류가 그러함에 따라 시간도 그렇습니다. 남자는 조반후 석반전까지 대개 일을 하지만 여자는 조반전은 조반준비 석반후는 옷짓기 이러케 男이 만치 일을 하며 살어가는 것이 농촌여성입니다.

 

농촌여성은 이상에 말한 바와가치 일을 만히합니다. 따라서 그마만치 노예적 지위가 명백함니다. 그것은 단순히 일을 만히 함으로 노예란 말이 안이오. 일은 만히 하지만 자유로 못하고 굴종적으로 하며 또한 그 작물에 대하야도 사용의 자유가 엄슴으로 씨임니다.

 

농촌의 여성! 며느리 노릇이 노예노릇이며 안해노릇이 노예노릇입니다. 도회지 여자는 대개 남편의 버러주는 것을 먹고 지내니까 비록 멸시를 당해도 괴치 안치만 농촌여성은 자기가 스사소 땀흘니고 버러 먹을뿐 아니라 다른 가족 까지라도 버러멕이면서도 자기의 의사는 끗끗내 세워 보지 못하고 우마가티 굴종하니 이것이 노예가 안이고 무엇입니까.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농촌여성은 뼈가 부러지도록 부리울 뿐이오 자기의 가사에 대하야도 이것은 이리케하고 저것은 저리케 하자는 의사를 용납해주지 안는다는 말이웨다. 별명을 부치자면 '부조노동기'라는 것이 글으지 안을 듯 함니다. 참부려먹기 좃슴니다. 옷을 못 지음이니까 밥을 못지음니까 아해를 못 기름니까 농사를 못함니까.그 외에 가즌 심바람을 다 식혀도 한번도 반대업시 순종하니 이에서 더 조흔 노예가 어되 또 잇겠슴니까."62)

 

즉 농촌여성들은 남성들이 당하는 고통 외에 여성만이 당하는 성적 억압이 또 있다는 것이다.

또한 농촌여성들 외에 일제의 자본주의 세력이 침투하기 시작한 구한말부터 우리나라에는 여성노동자들이 생겨난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여직공 모집은 1900년 초에 있었다고 한다. 1900년 정부의 전환국에서 최초로 지폐를 만들게 될 때 15명의 여공을 모집한 일이 있는데 응모자가 25배나 몰렸다는 기록이 있다. 두번째로는 1901년 동령동 한성제직 회사의 여공 모집이었다. 일본에서 직조기를 도입한 이 회사는 기숙사 시설까지 갖춘 규모로서 당시 황성신문에 정식으로 남녀직공 모집광고를 내어 임금과 일의 성질을 밝히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여직공의 취업은 점점 증가하였다. 일제의 식민지 경제의 침략과 더불어 공장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정미소는 비교적 초기에 인천, 평양 등 도시에 설립되었으며 1906년엔 경성 동아연초회사와 목포 조면회사가 창립되었다. 이들 회사들은 비교적 여직공을 많이 고용한 회사였는데,1909년,1910년에 걸쳐 동아연초 회사에서 여공을 모집한 기록이 있다. 1910년 기록엔 "국문 약해자에 한함"이라는 자격규정까지 실려 있음을 발견한다.

 

1910년의 한일합방 후에는 일본에서 여직공을 모집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예도 많이 있었다.

합방 당시인 1910년에는 공장수 151개소,8,203인에 지나지 않던 전체 종업자 수가 1922년에는 2,900개가 되어 54,667명을 넘고 그 중 10인이상 노동자를 사용하는 회사 및 공장수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664개소에 노동자수는 총 48,043인이며 이 중 여직공이 9,870인으로 20.5%나 차지하고 있다. 그후 1930년부터 공장수가 증가함에 따라 전체 직공의 수도 증가하는 한편 여직공이 차지하는 비율도 3할을 넘고 있으며 이러한 추세는 1936년까지 계속하여 이해는 5,927개소 공장에 거의 15만명의 직공이 취업하였으며 여자는 이들의 33,3%나 되는 5만명이 넘는다.이러한 근로여성들의 산업별 분포율은 1931년부터 1938년까지 방직업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 외에 1931년에는 화학과 식품계 제조업이 각각 30%의 비율을 점하고 있다. 그리고 남자에 비해 적은 비율이긴 하지만 각종 산업분야에 약간씩이나마 참여하였다. 1938년엔 식품 제조업의 참여가 없지만 요업과 화학제조업에 각각 24%씩, 그리고 다른 산업분야에는 적은 비율이 취업하였다.63)

 

이 여성 노동자들은 어떠한 조건하에 처해 있었는가, 우선 여성 노동자의 임금은 그야말로 최저의 기아임금이었다.

1924년 3월 12일자 동아일보는 저임금 때문에 여성 노동자의 파업이 잦았던 인천의 정미소 중의 하나인 사이또 정미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종래 그 정미소에 다니는 여자는 칠팔세된 어린아이로부터 삼사십에 가까운 여자까지 합하여 삼백명이나 되는 터인데 그들은 정미소의 쌀고르는 방을 자기의 생명으로 알고 해가 뜨면서부터 해가 서쪽바다로 숨을 때까지 잘 고르는 여자는 이삼십말로부터 어린 여자와 늙은이는 에닐곱말 가량을 고르는데 그 삭전은 한말에 삼전씩으로 한사람 평균 하루 사십여전을 받는 터이라 한다..."64)

 

일제하 전반을 통하여 노동쟁의의 가장 빈번한 이슈로 등장했던 이 임금문제는 도급제도 및 벌금제도를 통한 유인 위협전술을 통하여 노동자를 더욱 철저하게 괴롭혔다. 1927년 10월 21일자 [동아일보]에는 당시 파업중이던 황해도 암리농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보도를 하고 있다.

"...매일 아침 7시반부터 저녁 6시까지 열시간 노동을 하여 오게되는데 아침에 출근이 좀 늦으면 벌금이 5전씩이다. 점심시간에 좀 늦으면 십전, 작업중 한 사람의 과실됨을 직공들이 누구라고 말하지 않으면 오전 내지 십전,너무 곤하여 잠간 조는데는 의례이 심오전씩,이 모양으로 벌금을 받아 어떤 때는 임금보다 벌금이 많게 되어 그 다음날 임금중에서 제하게 되는 때도 비일비재라고 하며 좀더 심하면 구타까지도 능사로 하여 왔다고 한다..."65)

 

또한 당시의 여공들의 작업환경은 마산의 조면 공장의 파업시의 요구조건에서 알 수 있다.

1.식사시간은 매일 30분씩 2회 허락하여 줄 事
2.남녀 직공에게 마스크를 줄 사
3.공장내에 직공사용의 목욕탕을 설비할 사 66)

 

말하자면 식사를 위해 30분의 시간마저 허락되어 있지 않았고 먼지가 많이 나기로 유명한 조면공장에서 직공들에게 마스크도 제공하지 않았던 것이다. 67) 또한 여공들을 많이 고용하고 있던 공장들은 부속기숙사를 두었는데 기숙사 생활은 노동력 착취를 위한 더욱 조직화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동아일보]1927년 6월 25일자 신문에 의하면,
"평양 부하 대동군에 있는 일본사람 소유의 어떤 방직회사에는 삼백여명의 이십새 이내의 소녀 직공들이 있는데 그들은 기숙사에 감금되어 출입을 자유로 못하고 혹 눈에 거슬리는 일이 잇으면 감독에 구타당하는 일이 종종 있어 여직공들은 시시로 탈주하려고 노력이 심하여 대개는 발각되어 그것이 원인이 되어 더욱 매ㅁ자게 된답니다. 이와같은 소녀 직공의 학대는 그 공장에 한한 것이 아닙니다. 어느 공장을 물론하고 대개 그렇습니다. 방직회사는 대개 소녀 직공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첫째로 삭전이 싼 것. 둘째로는 약하여 반항하지 않는 것 때문입니다. 공장주인은 소녀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왕왕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모든 잔악한 짓을 합니다. 몇해간만 그 생활을 하면 그들의 육체나 정신은 모두 파괴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과한 노동,불결한 거처, 약한 음식 등은 다시 더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그들은 출입의 자유,심지어 통신의 자유까지 빼앗깁니다."68)

 

또한 남녀간의 임금에 있어서 차이가 나는데, 1929년의 남성 임금은 여성의 1,7배였는데 1937년에는 거의 2배 가까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의 국제수준에서 저수준이라고 불리던 일본인 노동자들에 비하여 그 절반도 못되는 한국 성인 남자 노동자의 임금과 다시 그 절반도 못 되는 성인 여자노동자의 임금,이것이야말로 일제 한국 여성노동자의 노예적 생활을 무엇보다도 잘 증명해 준다. 69)

다음은 [동아일보]1929년 11월 3일자에 "어느 여공의 하소연"이라는 제목하에 실린 기사인데 그 당시 여성노동자들의 비참한 상황을 잘 드러내 준다.

 

"저는 3세때 아버님을 여의고 일곱살 먹은 옵바와 함께 어머님이 방아간에 다녀 15세에 보통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옵바도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양곱 직공으로 일하다가 20세에 병으로 죽자 그 길로 저는 연초회사 여직공이 됐습니다. 그때가 제 나이 17세되는 봄이었찌요. 임금은 매일 10전씩이나 3주의견습동안엔 하루에 6전씩 한달에 30여전으로 감독이나 순사에게 아양을 부리면 하루가 곱게 넘어가고 비위를 거스르면 종일 욕먹고 온갖 고초를 받아 겨우 20전에 불과하답니다.

사자굴 같은 그곳에 들어갈 때는 도수장에 들어가는 소와 같이 싫습니다. 또 남공들의 무서운 색에 주린 무서운 유혹은 그칠 날이 없습니다. 그나 그 뿐인가요. 퇴사할 시는 경찰서에서 죄인 다루듯이 일일이 검사하지요.

 

여러분 놀라지 마세요.십 칠세 처녀의, 그 무지한 감독손에 유방에서 하부에 이르기까지 조사를 당합니다. 얼마나 원통합니까.17세 처녀의 몸에 그 무지한 행동을 달게 밧고 저주의 피눈물을 먹음고 한낫 돈 30여전에 억매인 생활을 삼년이란 긴 세월을 하게 되었습니다.

 

19세 되던 겨울철에 어떤 사람의 말이,부산 모 방직회사로 가면 견습 기간이 3개월인데 식비 제하고 15원을 주고 3개월 후에는 한달에 평균 50원을 준다는 말에 어찌나 기뻣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시여 놀라지 마셔요. 부산을 당도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웁니다. 먹는다는 밥은 양쌀밤에 된장국 하나와 작업시간을 12시간이지요. 작업은 주야 2회로 합니다. 또 작업 장소는 90여도나 되는 삼복에도 문을 꼭 닫습니다. 그 이유는 공기가 들어오면 실이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감독의 무리한 경향이 일반이지요. 얼굴이 반반하지 못하면 연초회사와 같이 고통이 막심합니다. 준다고 하는 것은 견습기간에 식비 제하고 30전이요,3개월이 지나도 불과 일원이 최상일 것 같습니다. 그 뜨거운 물에 열손가락이 짓물러서 보기에도 숭없거니와 손을 붙잡고 울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이시여 30전이나 1원을 받아 일가족에 도움이 되느냐 하면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돈과 사회 조직이 이와 같은 이 사회 여러분이시여 한개 여공의 하소연이나 말끔이 양해하시와 이같은 사람의 깃븐 노래를 들으시도록 힘써 주시기를 믿고 붓을 던지옵니다."70)

 

이러한 상황은 결국 여성노동자들의 빈번하고 격렬한 파업을 일으키는데, 경성고무여공 파업(1923.7.3),인천 선미여공 파업(1923.5.1),마산조면공장여공 파업(1924.12.6)등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여공들의 조직적 파업에서 투쟁전술을 적극적이고 격렬하였다. 1929년 부산 5개 고무공장 동맹파업 때는 여직공들의 떼지어 공장을 습격하거나 주모자 검속에 파업단원이 일제히 경찰서에 몰려가 석방을 요구하였으며 1931년 평양 평원고무 여공 파업 때는 을밀대 지봉 위에 올라가서 체공시간의 기록을 돌파하는 전술도 있었다. 이 전술의 주인공인 강주룡은 20세 때 과부가 된 이래 파업 때가지 10년간 독신생활을 하면서 직공생활로 근근히 생활을 해온 노동투사로서 평원고무공장쟁의가 지구전에 들어가고 경찰의 간섭이 심해져 공장에서 쫒겨나게 되자 그 길로 40여척이나 되는 을밀대 다락으로 올라가서 누구든지 쫓아 올라오면 떨어져 죽는다고 위협하면거 무산자의 단결과 노동생활의 참상을 호소하며 고주의 무리를 타매하는 연설을 하였다.

7시간 40분간이나 버티다가 경찰에 끌리어 내려와 평양서에 구속된 그는 밥 한술, 물 한모금 안 먹는 단식투쟁을 벌였다. 단식 76시간을 계속하던 강주룡은 검속기간이 완료됨에 따라 일단 석방되었다가 고주측이 내놓은 신구직원 안분비례채용안에 반대하여 신직공을 습격하는 일에 가담하였다. 이에 고주측이 강경파 20여명을 해고할 때 강주룡도 해고되었으며 가장 위험인물인 여직공 최용덕과 함께 구속되어 유치장 안에서 다시 단식투쟁을 하였다. 이들은 54시간을 버티면서 항쟁하였고 계속 취조를 받으면서 1주일 구류처분을 받았다. 이 두 여공은 구류기간이 만료됨과 동시에 석방되어 취후담판을 벌일 파업단측 회견대표로 뽑혀 계속 투쟁하며 희생되니 고무여직공 중심의 생산조합을 조직하는 등 활동을 하다가 당시 일제의 노동탄압정책 때문에 비합법 투쟁으로 전환하여 전국을 휩쓴 적색노조활동에 연루되어 1931년 5월 28일 평양서에 검거, 예심에 회부되었다. 강주룡은 평원고무공장 외의 또 다른 투사인 조영옥,최용덕 등과 함께 체포되어 만 4년의 세월을 옥중에서 미결로 신음하다가 드디어 옥사하고 말았다.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