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기적? .
기적을 일으키는 순종 - 모세
나일강에서 공주가 모세 발견
모세와 불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처럼, 아주 어렵고 하기 힘든 것으로 우리에게 순종을 시험하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주 쉽고 작은 것으로 우리의 순종을 시험하신다.
민수기 21장 4절부터 보자.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백성들의 이 불평을 들으시고 불뱀을 보내 백성들을 물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 중 죽는 자가 많아지자 백성이 모세에게 말했다.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아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 중에서 놋뱀을 쳐다본 자들은 다 살았다.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보내어 백성들을 물게 하신 것은 그들의 불평불만에 대한 벌이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아 올렸을 때, 백성 중에는, “이 무서운 뱀의 독이 전신에 퍼져서 살이 썩어 가는데 아니 놋뱀을 올려다본다고 살아? 웃기는 수작하네.” 하고 장대 위의 놋뱀을 올려다보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뱀의 독으로 썩어가는 자신들의 육신만 보았지, 하나님의 능력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의 불평불만이나 불순종으로 인한 벌은 돌이켜 순종만 하면 사함을 받는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주 쉬운 순종을 요구하셨다. 눈을 들어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올려다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올려다 본 사람은 순종함으로 살았고, 올려다보지 않은 사람들은 불순종으로 죽었다. 죽은 사람들은 참으로 바보 같은 인간들이다. 그냥 슬쩍 올려다보기만 하면 되는데 무슨 옹고집이라고 그걸 안 보고 죽으냐 말이다. (그냥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데, 무슨 옹고집이라고 예수 안 믿고 죽느냐 말이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시험하실 때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순종은 일반적으로 어려운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려운 것일수록 그 시험을 통과한 후에 받는 복도 크다.
그러나 불뱀의 경우와 같이 생명이 걸려있는 중대한 것의 경우는 그 요구하시는 순종은 아주 간단하고 실행하기 쉬운 것이 보통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누구나 그 시험에 통과해서 모두 다 살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살겠다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생명을 건지게 되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적을 일으키는 또 하나의 공식을 발견하게 된다.
<간절한 소원> + <순종> = <기적>
광야에서 불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놋뱀을 올려다봤을 때, 그들 모두에게 올려다보면 산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올려다보라니까 기계적으로 올려다 본 사람도 있었을 것이며, 혹사나 하고 올려다 본 사람도 있었을 것이며, 죽기 싫어 마지못해 올려다본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올려다 본 그들 모두가 산 것이다.
성경에 보면, “뱀에게 물린 자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믿고 올려다 본 자만 산 것이 아니라, 올려다본 자들은 다 산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살리시는 조건으로 믿음을 요구하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그저 하나님 말씀을 따르기만 하면 살려 주신 것이다.
기적을 일으키는 공식
<간절한 소원> + <순종> = <기적>
<순종>은 믿음에서 나오는 순종뿐 아니라 단순한 기계적인 순종까지도 포함되는 것이다.
모든 기적은 <믿음>에서 나온다. 하지만, 때로는 믿음이 없는 자에게도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켜 그 소원을 들어주신다.
일곱번 몸을 씻은 문둥병자 나아만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크고 존귀한 장군이었으나 문둥병자였다. 그는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 선지자 엘리사의 집으로 그를 찾아온다. 엘리사는 나와 보지도 않고 사람을 시켜 요단강 물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일러준다. 이 말을 들은 나아만은 화가 났다. 상처에 손을 얹고 여호와의 이름을 크게 외쳐 부르며 열심히 기도해서 고쳐줄 줄 알았는데, 나와 보지도 않고 요단 강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라니? 우리나라에 그만한 강이 없어서 내가 여기까지 왔는줄 아나, 하고 돌이켜 떠나려고 했다.
이때 그의 부하들이 말했다.
“장군님,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을 하라고 했다면 장군님은 하셨을 것 아닙니까. 자 이왕에 왔으니 그대로 한번 번 해 보세요.”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니 그 살이 어린아이의 살같이 깨끗하게 되었다. 비록 믿음은 약할지라도, 아니 믿음은 없을지라도,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이나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하기만 하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별로 믿음도 없었을 때에 아내에게 끌려가 교회에 다닌 지 3개월 만에, 어느 부흥회에서 목사님 말씀대로 앉아서 할 줄 모르는 기도를 하다가 내 병과 아내의 병이 고침 받는 기적을 체험했다. 믿음이 없어도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기적을 나타내 주신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총인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장대 위의 놋뱀을 올려다 보라고 하신다.
그 장대 위의 놋뱀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이다.
(아니, 주님이 어째서 놋뱀인가? 뱀은 사단이 아닌가? 네, 맞습니다, 뱀은 사단입니다. 주님은 왜 십자가에 달리셨나? 그 사단 때문이 아닌가. 사단 때문에 죄를 진 우리 인생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들의 죄는 사단에게서 왔다. 주님의 십자가의 형벌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신 것이지만, 동시에 바로 사단의 죄를 벌하신 것이다. 달리신 분은 예수님이지만, 그 죄는 사단의 곧 뱀의 죄인 것이다).
믿음은 없을지라도 간절한 마음으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올려다보면 기적이 일어난다. 하나님이 우리 앞에 나타나시는 것이다.
믿음대로 될지어다.
어느 젊은 전도사님께서 기도원에서 21일간의 금식기도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는 길이었다. 21일 동안을 금식하며 주야로 기도만 했더니 성령이 충만해서 몸이 공중으로 두둥실 떠오를 것만 같았고, 무엇이든지 기도만 하면 당장에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계절은 초겨울이라 산길을 가로지른 작은 시냇물에는 살얼음이 얼어 있었다. 그 전도사님은 그때 성경 구절이 하나 머리에 떠올랐다.
마태복음 17장 20절의 말씀.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 할 것이 없으리라”
이 젊은 전도사님은 걸음을 멈추고 서서 두 손을 마주잡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전도사님은 소리를 내어 뜨겁게 꽤 오랫동안 기도를 드렸다. 등골이 뜨거워지고 몸에 가벼운 진동이 일어났다. 전도사님은 주여 믿습니다! 하고 다시 한번 소리치고는 한 발을 살얼음 위에 올려놓고 밟았다.
바싹! 기도한 보람도 없이 살얼음은 깨지고 발은 차가운 시내물 속으로 푹 빠지고 말았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또 있다.
지금은 작고한 아주 유명하신 목사님이 역시 기도를 많이 하시고 성령이 충만해서 거리로 나왔다. 마침 거리에 한 앉은뱅이 걸인이 구걸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목사님은 그 앉은뱅이 걸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걸인은 한 푼 받을까 하고 목사님을 올려다보며 손을 내밀었다. 목사님은 주위를 살펴보았다. 마침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목사님은 손을 내밀어 앉은뱅이 걸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힘찬 목소리로, 그러나 그리 크지는 않은 목소리로, 미문 앞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킨 베드로의 흉내를 내어 소리쳤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그리고는 잡은 손을 힘차게 잡아당겼다.
순간, 앉은뱅이 걸인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기는커녕, 팔이 빠지는 아픔에 비명을 지르며 길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불쌍한 건 앉은뱅이였다. 돈 한 푼 얻을까 하고 손을 내밀었다가 목사인지 뭔지 하는 사람 때문에 날벼락을 맞은 꼴이 되고 말았다.
“주여, 창피하오니 어서 날 숨겨 주소서.”하고 기도를 했는지 안 했는지 거기까진 모르지만, 목사님은 누가 봤나 주위를 살필 겨를도 없이 목사님 체면 다 내던지고 골목길을 달음박질쳤다.
왜 이 두 사람의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일까? 그들에게는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었던 것일까?
아니다.
이 두 사람은 “믿음대로 될 지어다”하는 말씀을 믿기만 했지, 믿으면 왜 믿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지만, 믿음 그 제체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요, 믿음은 말하자면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 앞에 손을 내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마찬가지로 기적이 일어나는 것도
믿음 그 자체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대로 이루어주셔야 기적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소경 바디매오가 눈을 뜨고 구원을 받은 것은 그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그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하고 말씀하심으로 그는 보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아무리 소경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굳게 믿고 외치고 나왔다고 해도 예수님께서 그냥 지니시고 말았다면 그는 눈을 뜨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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