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기적?
구원받은 강도의 이야기.(누가복음 23장 39-43절)
십자가 위의 예수님과 강도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한다. 마지막 죽는 순간에라도 주를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참으로 한심스러운 해석이다. 아까 그 전도사님이나 목사님과 같은, 성경의 참 뜻을 모르는 사람들의 잘못된 해석이다.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 중 구원받은 강도는 죽기 마지막 순간에 주를 입으로 시인했기 때문이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구원받은 강도가 구원받은 것은 그의 신앙 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앞의 전도사님과 목사님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그들에게 그만한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기도를 받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루어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듣고도 이루어주시지 않으신 것일까?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세가 홍해를 가른 기적을 흉내 내어 아무리 한강변에 서서 소리치고 외쳐도 한강 물이 가라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기를 쓰며 기도를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때, 그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세가 홍해를 가른 것은 모세의 믿음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신 사도 바울은 그의 지병을 위해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병을 낫게 하시지 않았다. 그의 병이 낫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랑하시는 종인 바울사도에게는 그 병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더 유익했기 때문이다.
기적의 공식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 앞에 기적을 나타내실 때에는 보통 다음의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를 택하신다.
1) <하나님> → <기적>
2) <사람> → <하나님> → <기적> : 초신자 믿음
3) <하나님> → <사람> → <기적> : 원숙한 믿음
위 셋을 차래로 설명해 보자.
<하나님> → <기적> 은 하나님이 당시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 스스로 나타내시는 기적으로, 가령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신 일(모든 기적 중 가장 큰 기적)이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사신 기적, 또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은 다 여기에 속한다.
반면, 소경 바디매오가 눈을 뜬 기적은 <사람> → <하나님> → <기적>에 속한다. 그는 눈을 뜨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졌고, 그 눈을 뜨게 해 주실 분은 예수님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예수님 앞으로 달려 나와 크게 외쳤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눈을 뜨게 해 주셨다. 곧 <사람> → <하나님> → <기적>의 순서인 것이다. 여기서 행동을 먼저 일으키는 것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다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외쳐 부르짖으면 그것을 보시고 움직이기 시작하신다.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께서도 가만히 계신다. 그러므로 기적을 맛보고 싶은 사람은 소경 바디매오처럼 믿음과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달려 나와 소리쳐 외치고 부르짖어야 한다. 하나님이 움직이실 때까지 쉬지 말고 계속 부르짖어야 한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 방법으로 많은 기적을 체험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기도원에서 산에서 가정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외쳐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고 외쳐 부르짖는 것을 보시고 그 사람의 믿음과 소원하는 그 소원의 간절함이나 그 종류, 그 기적을 얻고 난 후의 그 사람의 믿음의 변화, 기타 등등을 보시고 그의 기도를 즉시 이루어 주시기도 하고, 그 시기를 약간 뒤로 늦추시기도 하고, 때로는 꼭 이루어주시겠다는 응답을 주셔서 기쁨으로 더욱 간절히 열심히 기도하게 하시기도 하고, 또 더러는 아주 안 이루어주시기도 한다. 특기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각별히 사랑하시는 사람의 기도는 아주 잘 들어 주신다는 사실이다. 같은 기도를 하는데도 어떤 사람의 기도는 하기가 무섭게 들어주시는데, 어떤 사람은 아무리 해도 좀처럼 들어주시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러므로 이왕에 하나님을 믿을 바에는 하나님의 각별하신 사랑을 받도록, 하나님 마음에 꼭 들도록 열심히 믿고 열심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적당히 믿는 것이 하나님을 쉽게 믿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을 가장 쉽게 믿는 방법은 열심히 힘을 다해 믿는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힘을 다해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몇 십 배로 갚아주시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볼 때, 훨씬 힘이 덜 드는(남는 장사?)인 것이다.
이번에는 <하나님> → <사람> →<기적>에 대해 알아보자.
이거야말로 홍해를 가르며, 바다 위를 걸으며, 앉은뱅이를 벌떡 일어나게 하는 바로 그것이다. <사람> → <하나님> →<기적>의 경우는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고 사람이 먼저 움직인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일어나셔서 기적을 일으켜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 → <사람> →<기적>의 경우는 이와는 정반대이다.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이 먼저 움직이신다.
출애굽기 3장 1-4절의 말씀을 보자.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사람> → <하나님> → <기적>에서는 사람이 하나님께 먼저 부르짖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이 먼저 사람을 부르시는 것이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사람인 모세에게 부탁(?)을 하신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10)
그러자 사람인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슬쩍 뺀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 3:11)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약속을 하신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2)
여기서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 받은 종이 되어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일대 구속 사업의 전면에 나서서 갖가지 기적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겨자씨 만한 믿음
공주가 나일강에서 모세 발견
모세가 이스라엘 지손들을 이끌고 홍해 광야 길로 나갈 때, 애굽 군대가 뒤쫓아 왔다. 이것을 본 이스라엘 자손들은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는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 위기를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써 해결해 보려고 했던 것이다. 곧 <사람> → <하나님> → <기적>의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 부르짖긴 해도 과연 하나님이 구해 주실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를 마구 비난한다.
“그들은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겠노라”(출 14:10-12)
모세는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구원이 있을 것을 말한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찌나라”(출 14:13-14)
이렇게 말하고 모세는 여호와께 구원해 주실 것을 부르짖는다. 모세 역시 <사람> → <하나님> → <기적>의 방식을 통해 이 민족적 위기를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꾸짖으시며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출 14:15-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라고 말씀하신 것은 지금은 <사람> → <하나님> → <기적>의 때가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창세 이전부터 계획하신 대역사를 하시는 때이다. 백성들이 살려달라고 부르짖으면 살려주시고 안 그러면 가만히 죽게 내버려두시는 그런 때가 아닌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 → <사람> → <기적>의 때인 것이다.
갈라진 홍해속을 이끄는 모세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출 14:21)
바다가 갈라지고 산이 옮기지는 기적은 <하나님> → <사람> → <기적>의 경우에만 일어난다.
이스라엘 자손을 광야 길로 이끄실 때, 여호와께서는 이미 홍해를 가르실 것을 예정하셨다.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하자 홍해 바다는 갈라졌다.
하나님께 열심히 부르짖음으로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는, 말하자면 하나님을 나의 형편에 맞추는 믿음에서는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전면에 나서서 그 도구로 쓰임을 받는 믿음에서만이 바다가 갈라지고 산이 옮겨지는 기적이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너는 어서 저 앉은뱅이를 내 이름으로 일으키라” 하고 나에게 명령하셨을 때, 내가 그 앉은뱅이를 주의 이름으로 일으킬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내 믿음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키고자 할 때, 아무리 소리높이 주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해도 앉은뱅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성직자들을 주의 종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글자 그대로 주의 뜻대로 쓰임을 당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까의 그 두명의 주의 종은 주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뜻대로 주의 이름을 빌어 자기의 능력으로 살얼음판 위를 걷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하나님을 붙들고 매달리고 부르짖고 하는 <사람> → <하나님> → <기적>의 방식을 가지고, <하나님> → <사람> → <기적>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초신자의 믿음은 하나님을 붙잡고 매달리고 부르짖고 해서 무엇인가를 얻어 내고자 하는 <사람> → <하나님> → <기적>이다. 믿음은 내 뜻대로 하나님이 움직여 무엇이가를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믿음이다.
원숙한 믿음은 내가 하나님 뜻대로 움직이려고 한다. 곧 <하나님> → <사람> → <기적>의 믿음이다.
바로 이 믿음이 하나님께서 보시는 참 믿음이며, 이런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을 옮기고 바다를 가르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