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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성경 이해를 돕는 몇 가지 원칙들

Joyfule 2019. 10. 13. 16:27

 

     바른 성경 이해를 돕는 몇 가지 원칙들

 

 

 7.특별한 내용은 특별 원칙으로 기도하면서 성경을 이해


하나님께서 만물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실 때 일반 자연법칙을 사용하시지만 필요하신 때는 홍해를 가르시거나 태양을 멈추시던 것처럼 초자연적인 행사도 하신다. 언어를 해석하는데도 일반원칙을 주로 사용하지만 특별한 형태의 언어는 특별원칙을 적용하여야 한다. “당신은 나의 충전기다”. 라고 말할 때 문자적인 이해로는 안된다. 이것은 수사법을 사용한 특별한 내용으로 상대방이 말하는 자에게 큰 힘과 도움을 준다는 은유적 표현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문자적인 표현법을 기초로 해석하고 이해하면서 문자적인 뜻으로는 일반해석 원칙상 해석이 불가능할 때는 이차적으로 수사적(修辭的) 표현법을 사용한 것으로 생각하여 그에 상응하는 특별 해석 원칙을 적용해야한다.


책을 읽을 때 “행간(行間)을 읽으라”는 말이 있다. 행간이란 글의 줄과 줄 사이 또는 행과 행 사이를 가리키는 단어로서, 좀 더 포괄적으로 얘기한다면 글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있지는 아니하나 그 글을 통하여 나타내려고 하는 숨은 뜻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우리가 행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글이나 말속에는 단어나 문장만으로는 참 뜻을 정확하게 나타내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이 있다. 또한 우리의 생활문화 속에는 구체적이거나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완곡한 표현으로 뜻을 전달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의 진리는 너무 심오해서 일상적 언어로는 표현이 어려운 경우에 성경안에도 비유법이 사용되었음을 알게 된다. 수사적 표현은 깊고 어려운 진리를 생생하고 또렷한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와 상상을 제시해 준다. 또한 각 표현법은 하나님의 뜻을 인간들에게 더 효과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성경에는 약 200개 이상의 수사적 표현들이 있다. 그러므로 문자적 표현은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수사적 표현은 수사적으로 해석하여야 올바른 본뜻을 알게 된다. 우리가 계속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문자적 해석이 모순 또는 애매성을 가져오지 않는 한 단어들은 그들의 문자적 의미에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해석의 기본법칙이다.

또한 모형(예표, 유형, 표상)이란 하나님께서 어떤 성경 진리의 예시(豫示)로 지정하신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신약성경 중 히브리서는 레위기의 해설서라고 할 수가 있는데,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히8:5). 또는 “비유”라고 말씀하면서“개혁(改革)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9:9-10)한다 . 그러므로 이러한 “모형, 그림자, 비유" 등을 해석할 때에 유의해야할 점은 구약의 모든 것을 예표로 삼아 알레고리칼(Allegorycal)하게 이해하는 과장 해석이나 억지해석을 피해야 하고 나타난 실체(實體),즉 밝히 드러난 복음의 빛을 통해 해석하고 이해해야한다는 점이다.

성경은 일반 책과 달리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계시의 말씀이다.


로마서 16장 25절에서 26절을 보면 복음과 선교는 감추어졌던 '비밀의 계시'라고 합니다. ‘계시’(啓示;αποκαλυπσιζ)라는 말은 “감추인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주셔야만 보입니다(엡1:18). 간절히 기도하며 읽으면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고 복음과 선교의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의 예를 보면 사도로 부름받고 최고의 교사이신 예수님밑에서 3년간 동거동락을 하며 배웠어도, 성령충만받고 기사와 이적을 행하는 믿음을 갖고 하루에 3천명씩 회개시키는 능력많은 설교자였어도 선교를 모르다가 사도행전 11장에서 환상을 통해 시청각 교육으로 선교를 배우고 나서야 비로서 선교를 깨닫게 되었고 세계선교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선교의 계시를 열어주지 않으시면 성령충만 받았다고 혹은 신학했다고 설교잘하는 목사라고 선교를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이해에도 성령님의 도움이 없이는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을 따르는 친구들에게만 영적인 계시를 보여 주신다. 요한복음 15:14-15에서는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계명을 지키는 자가 주님의 친구라고 하셨다.


그리고 고전3:1~2에는 바울이 말씀을 음식으로 비유하여 어린아이 같은 신앙의 고린도교인들을 책망하며 어린애들에게 먹이는 젖으로 그들을 대했다고 했다. 영적인 생명은 일생동안 자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양들은 일생동안 영의 양식을 먹어야한다. 갓난아이가 처음에는 젖을 먹다가 나중에는 점점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듯이 영의 양식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어린이도 하루 아침에 다 자라나 어른이 된 자가 없듯이 영적 생명도 하루아침에 주의 진리를 더 깨달을 필요없이 다 깨닫고 행하는 자가 없다. 이것은 주의 양의 성장에는 시간이 필요함을 말한다. 어릴 때 부모마음을 알지 못하다가 철들어서 부모 마음을 알고 나중에는 자신이 부모가 되어 진실로 부모의 마음을 잘 알게 되듯이 영적생명이 성장정도에 따라 주의 말씀이 깨달아진다. 하나님을 아는 분량이 장성한 자(엡4:13,고전13:11,12)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요하는 것이다. 히5:14에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고 했다.


성경은 우리의 영적 생명의 분량만큼 이해되고 순종가능하다. 주를 닮는 것은 일생의 거룩한 목표요, 추구이다. 아무리 성령 충만해도 우리가 부활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하나님과 하늘에 속한 진리의 말씀을 청동거울을 보는 것처럼 이해에 한계가 있음을 바울도 고백했다(고전13:12). 그러므로 깨달아지지 않는 부분은 겸손히 주 앞에 내려놓고 그의 도움을 기다려야지 억지로 풀려다가는 잘못되는 것이다(벧후3:16). 억지로 풀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잘못보다 “잘 모르겠다”고 하는 정직과 겸손이 우리를 얼마나 자유케하는지 모른다. 주님이 언제(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 다시 재림 하시는가?” “모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요한 칼빈('John Calvin)은 “성경이 가라 하면 가고, 성경이 멈추라고 하면 멈추는 심정으로 성경을 대하였다”고 말하였는데 성경이해에 바른 태도를 제시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는데는 성령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므로 다윗처럼 기도가 필요하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출처:<베이직 구약성경> 김 다니엘 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