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가르침의 위험성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고찰해볼 문제가 있다. 그것은 왜 교회들이 특정한 사역과 가르침에 쉽게 속하게 되는가이다. 교회가 특정한 사도나 가르침에 속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의 가르침이 너무나 탁월하기 때문이다.
만일 사도 바울이 사역할 때 말과 지혜의 탁월한 것(excellency of word and wisdom)으로 사역했다면 고린도인들은 자연히 바울을 자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전파할 때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persuasive words of wisdom)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차라리 메시지의 어리석은 것(foolishness of the message)을 사용하고 사람의 지혜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약함과 두려움과 떨림을 나타내었다(고전 1:21, 2:3).
오늘날 많은 형제들이 사역자들의 탁월한 가르침에 빠져 있고 결과로 특정한 사역자에 대한 감상에 빠져 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사상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 바울은 자신이 탁월한 계시의 말을 사용할 수 있었을지라도(분명히 그는 탁월한 가르침의 언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믿는이들의 믿음이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에 있도록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역대의 종파는 대부분 탁월한 하나님의 종들의 계시와 가르침으로 말미암았다. 우리가 지금도 그들의 가르침과 계시를 말해낸 것을 볼 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성경에 대하여 또는 영적인 일에 대하여 그렇게 깊고 투명한 통찰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나 자신도 그러한 완벽하고 탁월한 형제들의 가르침에 의해 많은 도움을 받아 왔고 그들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나는 조심하지 않으면 거기에 빠질 함정이 있음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 개혁을 위해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은 루터와 칼빈은 당시의 암흑시대에 하나님의 교회가 진리의 빛으로 돌아서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후의 사람들이 루터의 사상을 따라 루터교를 세웠고 오늘날까지도 온 땅에 루터교 사람들이 많이 있다.
칼빈의 교리를 따라 세워진 장로교도 마찬가지이다. 칼빈의 가르침이 뛰어난 것이 사실이고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를 통해 신약의 교회가 어떻게 전진해야 하는 가에 대해 매우 건전한 방향을 제시한 것도 사실이다.
웨슬레의 감리교도 똑같은 원칙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의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열의는 대단한 것이었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간증과 가르침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영적인 인물들을 따라 종파의 형태로 굳어지게 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 땅에 수많은 종파가 이와같이 영적인 인물들의 일으켜짐에 뒤따라 일어난 것을 볼 수 있다. 교회사를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한 사람의 영적인 인물이 일어날 때마다 그 인물의 탁월한 가르침이 남게 되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한 무리가 남아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사역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책이지 머리 좋은 사람이 이해하기 좋도록 논리 정연한 글로 되어 있는 책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은 부지런히 추구하고 하나님 앞에 대가를 지불하며 계시를 추구하는 자에 의해 열려질 수 있다.
그러나 완벽한 가르침은 기도하지 않고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하나님의 빛과 열어주심이 없이도 깨달을 수 있는 것 같다. 나는 성경 말씀을 어떤 주저함 없이 하나 하나 완벽한 것처럼 설명하고 정의하는 것을 매우 두렵게 여겨야 한다고 믿는다. 제아무리 탁월한 해설가라 하더라도 그 해석은 완전하지 않다. 성경은 어디까지나 무한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고 해설은 유한한 사람의 설명일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좋은 해설집을 보면 무한한 성경을 버리고 제한적인 해설을 붙잡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완벽한 성경 해석과 탁월한 분석과 정의를 조심해서 읽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
믿는이들이 한 사람의 탁월한 해설과 가르침에 매달리게 되면 다른 사람의 또 다른 해설과 가르침을 주의하지 않게 된다. 세상에서도 탁월한 선생 아래서는 탁월한 제자가 나오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그래서 문화적인 감금(cultural imprisonment)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즉, 어떤 강한 문화적인 전통이 있으면 그것이 사람의 정신을 속박하여 새로운 문화의 창조적 자유를 구속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선생이 너무나 탁월한 나머지 제자들이 그 선생의 지식에 예속되어 더 이상의 사람의 본연의 창조적인 역량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17세기 영국의 물리학자인 뉴톤(Newton, Issac, 1642-1727)은 천문학, 물리학 등 여러 과학의 기초를 만들어내었다. 그는 실로 물리학의 대가이다. 그 후 그의 제자들은 물리학에서 더 이상 무언가를 새롭게 연구해낼 엄두조차 낼 수 없고 그의 학문만을 연구하는 데 시간을 다 보내게 되었다.
마치 물리학에서 뉴톤 이상은 아무도 새로운 학설을 만들어낼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몇백 년 동안 물리학은 뉴톤의 학설만 연구하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900년 대에 아인쉬타인(Einstein, Albert, 1879-1955)이 나와서 상대성 이론, 광양자 이론 등을 새롭게 발표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때 사람들은 물리학에서 뉴톤 말고도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사실상 지식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 가장 탁월한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운 학생이었고 그는 간증하기를 유대교에 있었을 때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 교리를 지나치게 믿었다고 했다.
우리는 그가 학식이 뛰어난 사람인 것을 이방인 총독 베스도조차 바울에게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다”(행 26:24)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말과 지혜의 탁월한 것을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
나는 고린도 후서에 있는 바울의 말을 좋아한다.
“나로 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라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 우리가 약한 것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고후 11:16下, 17, 18, 21).
여기에 하나도 기가 막힌 미사여구가 없고 탁월한 성질의 가르침이 없다. 오히려 거기에는 바울의 약함과 어리석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바울은 사람이 제아무리 지혜롭다 해도 하나님의 어리석은 것만 못하다고 말했다. 사람이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하나님의 약한 것만 못하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람의 지혜와 강함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뢰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탁월한 계시로 사람을 매혹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는 고린도 성도들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도록 사역했던 것이다. 그는 유창한 말로 사람들을 매혹시킨 거짓된 사도들과 매우 다르게 사역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이 시원치 않았으며(contemptible) 졸했다(unskilled)고 표현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어떻게 그러한 말로 수많은 사람을 구원하고 많은 교회들을 세울 수 있었는가 하고 놀라워하겠지만 하나님이 그러한 약한 자들을 사용하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고전 1:27). 사역자들은 사도 바울의 본을 따라 사역하면서 탁월한 표현과 언변이 믿는이들에게 남아 있게 하지 말고 그들에게 자신들의 약함이 보여질지언정 그리스도와 그분의 능력과 아름다움만 남아 있기를 원해야 한다.
나는 과거 칼빈이나 웨슬레, 형제회의 여러 교사들의 책을 가지고 있고 그들의 가르침이 탁월한 것을 안다.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고 많은 빛 비춤이 있었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은 그들의 가르침에 종속되어 그들의 종파가 되어 버렸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다른 사람의 가르침이나 계시가 필요치 않다고까지 여기게 된 것이다.
루터가 종교 개혁을 위해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은 사람임에 분명하지만 후에 루터교 사람들이 루터의 가르침에 종속되어 버린 것 또한 사실인 것이다. 장로교의 칼빈이나 감리교의 웨슬레나 많은 종파의 창시자들도 동일한 역사를 반복했다.
그리스도 이외에는 어떤 사람도 완벽하지 않다는 보편적인 진리는 어떤 특정한 사람을 추앙하는 사람들에 의해 항상 가리워져 왔다. 과거에도 “맥킨토쉬의 모세 오경만 있으면 … 매튜 헨리의 주석만 읽으면 …” 하는 말들이 있어 왔다. 오늘날에도 “모든 책이 다 떠내려가도 성경과 아무아무개의 책만 있으면 …” 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말들을 할 때나 들을 때나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익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이 아니고 좋다고 해서 모든 방면이 다 좋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괜히 사람들에게 물음표를 던져서 훌륭한 하나님의 종들의 가르침을 격하시키려는 의도가 없다. 나는 이것을 말하면서 참으로 눈물이 있고 아픔이 있다. 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오늘날까지 숱한 분열과 혼란 속에 사로잡혀 있어야 하는가? 서로의 반목과 불신 속에 이토록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거기에 탁월한 하나님의 종들의 탁월한 가르침으로 인한 요소가 많이 있다. 왜 그러한 종들의 것이 성도들에게 유익만 되지 않고 해로 작용을 하는가? 오늘날의 믿는이들은 여기서 반드시 깨어날 필요가 있다. 모든 하나님의 종들의 가르침은 그 말씀들을 통해 성경을 더욱 이해하고 그리스도께 이끌려지는 데 목적이 있지 하나님의 종들 자신이나 그 가르침에 매혹되어 그것으로 믿는이들이 자랑을 삼고 의미를 삼으라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주의하지 않을 때 믿는이들 가운데 역사하는 악한 자의 궤계는 실로 간단하지가 않다.
이러한 면을 주의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사람을 높이면 결국 종파의 길은 믿는이들 가운데 넓게 열리고 만다. 나는 오늘날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의 하락의 주된 원인이 어느 날부터 성도들 사이에 그리스도의 지위가 감소되고 사람의 지위가 높아지는 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안다. 나는 오늘 아픈 마음으로 부르짖고 싶다.
“아! 제발 교회 중에서 사람의 이름이 제해지기를 바란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시다.”
오늘날 많은 형제들이 한면으로 믿는이들의 하나를 추구한다고 하면서 또 한면으로는 특별한 가르침을 높임으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분리되는 길을 걸어간다. 그들의 마음속에 종파의 길을 가려는 의도가 없을지라도 한 사람을 높이고 특정한 가르침만을 붙잡는다면 종파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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