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의 도전 / 장영희
학기말 고사다, 논문 심사다, 회의다, 그야말로 꽁지 빠진 닭처럼 정신 없이 내닫다 보니 벌써 오늘의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 원고 마감일이다. 사실 바쁘다는 것은 핑계이고, 무슨 일이든 미리 해 두는 습성이 없어 마감일이 닥칠 때마다 나는 나대로 초조하고, 내 원고를 기다리는 기자님은 기자님대로 괴롭다.
오늘은 무엇에 대해 쓸까. 이 칼럼을 시작할 때 '재미있고 의미 있고, 독자들이 보고 당장이라도 책방으로 뛰어갈 수 있는 글'을 써 달라는 것이 조선일보측의 부탁이었다. 그러나 오늘같이 날씨는 무덥고 불쾌지수는 높고 세상은 시끄럽고, 이 와중에 신선한 충격을 받고 금방이라도 책방으로 뛰어가게 할 수 있는 글을 쓸 재간이 내겐 없다. 20세기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무언가 뭉클하고 목구멍에 뜨거운 것이 치밀 때 시를 쓴다고 했다.
19세기 여류시인 '에밀리 디긴슨'은 '머리 전체가 폭발해 나간 것 같은 느낌일 때 ' 글을 쓴다고 했다. 위선과 껍데기를 벗고 순수한 마음이 될 때 글이 더 잘 써진다는 말일 것이다. 언감생심, 나를 이런 위대한 시인들에 비교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도 가끔 마음이 깨끗하고 어떤 감동을 느낄 때 글이 잘 나오는 듯하다. 그러나 이 험한 세상을 무관심과 무감동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살아가면서 그저 마감시간에 쫓겨 별 감흥도 없이 쓰는 글이니 마음대로 재 때에 나와 줄 리가 없다. '알프레드 케이지라'는 문학비평가는 '누구든 글을 쓰는 이유는 스스로를 가르치고 이해하기 위해서, 그래서 결국 자기만족을 위해 글을 쓴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렇게 마감시간의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나 자신을 가르치고 이해하고 만족시키기에는 나는 너무 게으르다.
'헨리 밀러'는 '세상에 나가서 자신의 신념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길 용기가 없는 사람이 글을 쓴다'고 했지만, 나는 내 신념을 글로 쓰느니 차라리 세상에 나가서 실제로 행동으로 옮길 용기를 부려보겠다. 무엇에 대해 쓸까 걱정하면서 냉장고에서 계속 먹을 것을 꺼내는 나를 보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좀 미리미리 써두지 그러니? 그렇게 박두해서 쓰면 생각인들 나겠니?' '엄마도, 글은 아무 때나 써요? 영감이 떠올라야죠, 영감이,' '영감(inspiration)'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19세기 영국낭만주의 시인 '셀리'는 '시란 이성으로 생각하는 것과 달라서, 의지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 즉 '나는 지금부터 시를 쓰겠다'는 의지만으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그래서 어젯밤도 오늘 아침도 '영감'이 내게 찾아와 주기만을 고대하며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전 이미 마감이 지난 학기말 페이퍼를 아직도 내지 않은 학생이 전화를 했다. 왜 빨리 페이퍼를 내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내게 '인호'가 대답했다.
' 선생님, 글이 안나와요. 멋진 페이퍼를 써보려는데 아직도 영감이 안 떠올라요.'
'영감? 영감 좋아한다. 가만히 앉아서 영감을 기다리면 아무것도 못 써, 당장 책상 앞에 앉아서 쓰기 시작해!' 말을 하고 나니 결국은 나 스스로에게 한 말이다. 사실 나는 한번도 무슨 대단한 영감이 떠올라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픈 욕망에 불타서 글을 쓴 적이 없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내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신이 내 어깨를 움직여 글을 쓴다'고 했지만, 나는 '셀리'나 '소로' 같은 천재가 못되니 영감만을 기다리고 앉아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어떤 종류이든 '인호'나 나처럼 지금 글을 써야 하는 독자들이 있다면 수필가' J B 프리스틀리'의 지혜를 나누고 싶다.
'애당초 글을 쓰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꼭 써야 한다면 무조건 써라. 재미없고, 골치 아프고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도 그래도 써라. 전혀 희망은 보이지 않고, 남들은 다 온다는 그 '영감'이라는 것이 오지 않아도, 그래도 써라. 기분이 좋든 나쁘든, 책상에 가서 그 얼음 같이 냉혹한 백지의 도전을 받아들여라.'
-<문학의 숲을 거닐다>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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