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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만나는 사람들 - 이상렬

Joyfule 2015. 6. 17. 09:12

 

 새벽에도 이렇게 사람들이...ㅠㅠ

 

새벽에 만나는 사람들 - 이상렬


저는 새벽에 일어납니다. 벌써 20년째입니다. 창을 열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별도 달도 아닌 검은 건물들입니다. 오늘은 건물과 건물 사이로 보이는 조각난 하늘에 눈썹달 하나가 떴습니다. 나도 저만을, 저도 나만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멀쩡한 사람이 달과 눈 닿아도 가슴 두근거릴 수 있는 시간이 새벽입니다.
 

 새벽 4시경, 맞은 편 아파트에 군데군데 불이 켜졌습니다. 아직 꺼지지 않았는지, 벌써 켜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저 이른 새벽에 불 밝힐 사연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새벽시장에 장사하러 가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먼 길 가는 남편 위해 아내가 먼저 일어나 곰국 고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떠난 연인 잊지 못해 가슴앓이 하며 밤을 새운 걸까요. 아니면, 여태 들어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속 태우고 있는 집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나같이 절실해 보입니다.


 일어나 거울 앞에 서서 넥타이를 맵니다. 바깥에서 툭! 소리가 납니다. 신문 떨어지는 소리입니다. 지난 몇 년째 정확한 시간에 저 소리가 들립니다. 지금껏 한 번도 그 신문 배달하는 사람의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젊은 남자분일 것 같습니다. 착한 눈매였으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파란색 자전거를 탔으면 더 좋겠습니다. 젊다는 것 하나로 이 골목 저 골목 쓰다듬고 가는 고생쯤이야 아름답지 않은 게 어디 있겠습니까. ‘새벽’, ‘젊음’, ‘자전거’ 아마 그분의 먼 훗날, 성공의 키워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골목을 나섰습니다. 여민 옷깃 속으로 칼바람이 파고듭니다. 늘 이 시간이면 낯익은 흰색 출근 차 한 대에 시동이 걸립니다. 가끔 눈으로만 인사를 하던 이웃 여성의 차량입니다. 골목에서 마주쳤습니다. 오늘은 그냥 지나칩니다. 눈인사하기에도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또각또각 구두 발자국 소리가 꽁꽁 얼어 있던 골목을 깨웁니다. 단발머리에 검은 테 안경을 꼈습니다. 연한 브라운 색의 두터운 목도리를 두르고 네모난 가방을 들었습니다. 저 가방 속에 책 두 권 정도 들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기왕이면 김훈의 공무도하,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면 더욱 좋겠습니다. 겨울 하룻밤을 바깥에 세워둔 차 문을 열고 들어가 차가운 가죽 시트에 앉을 때 그 마음이 얼마나 비장할 것이며, 얼음장 같은 핸들에 손을 댔다 뗐다 하면서 입김으로 녹이고 있는 그녀가 맞이할 하루는 얼마나 절실할까요. 오늘 출근길엔 결 고은 햇살이 그녀의 차를 비추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골목은 낮에는 길섶에서 풀벌레 소리 들리는 고요한 곳이지만, 밤이 되면 취객들로 가득 차는 술집 골목입니다. 밤마다 마음이 가난한 인생들이 머물다 갑니다. 어젯밤엔 유난히 시끄러웠습니다. 세상이 마지막이라도 된 듯 절규하는 소리가 골목에 쩌렁쩌렁했습니다. 나라를 욕하고, 정치를 욕하고, 목사도 욕했습니다. 나는 요즘 자면서도 욕 얻어먹습니다. 틀린 말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아나고 막창 집 노상 테이블에 중년 남성 두 명이 아직도 술잔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저들의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입니다. 세상을 살아낸다는 것이 그렇게 버거웠을까요. 짙게 드리워진 눈 밑의 그림자만큼 하루가 길어 보입니다. 저 두 사람, 집으로 갈는지 회사로 바로 갈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무사했으면 좋겠습니다.


 새벽에 얻은 작은 깨달음이 있습니다. 영영 날이 밝지 않을 것 같아도 어김없이 새벽 동은 튼다는 것입니다. 저 하늘 끄트머리에 희망 하나 걸렸습니다. 그럼, 된 거 아닙니까. 살면서 절망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세상이 아무리 암울해도 새벽은 움트고, 이 절박한 시간에도 가슴에 여명을 품고 깨어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말입니다.

- 대구일보 2015.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