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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사탕 - 문경희

Joyfule 2015. 6. 15. 09:09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2006 동양일보 신춘문예 수필당선작] 바람사탕/문경희

 

 바람사탕 - 문경희


설경에 대한 글을 읽은 탓일까. 바구니 속에 가득 담긴 사탕이 유년의 장독대위에 장정의 밥주발처럼 소복이 쌓이던 눈송이 같다. 박하사탕, 보기만 해도 목이 칼칼하게 뚫리는 기분이다. 장삿속이라고는 하나 잊혀져 가는 추억하나를 입가심 거리로 준비한 식당 주인의 배려가 새삼 고와 보인다.
한 알을 물고 거리로 나섰다. 박하향을 따라 혀끝에서 비늘처럼 몸을 세우는 알싸한 그리움. 매서운 칼바람도 잠시 외면한 채 외할머니, 그 넉넉한 품으로 달려가는 상상을 한다.
“할마시, 편하게 계시지 외손녀 꿈에는 와 자꾸 오시는고?”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돌아가신 지 십 수년이나 된 외할머니가 자주 꿈에 보였다. 살아간다는 일이 간단치 않다는 이유로 무심했던 날들에 대한 변명이듯이 산소라도 한번 다녀와야지 하면서도 여의치 않던 무렵, 친정엘 들렀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어머니께 말씀을 드렸더니 발끈, 한마디 쏟아 놓으셨다. 타박하듯 던지는 어투일망정 가늠 못할 그리움이 듬뿍 묻어난다.


할머니한테선 늘 풀내가 났다. 적당히 그늘진 응달에 연하게 풀을 먹여 널어놓은 하얀 무명 홑청에 슬몃 기대면 낯익은 할머니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가끔은 싸한 박하향을 풍기기도 했다. 박하사탕 한 알을 입에 머금고 이따금씩 혀끝으로 굴리시던 할머니. "입에 너 바라. 서운한 기 입 속에 바람이 부는 동 싶다." 그래서일까. 할머니는 그것을 바람사탕이라고 하셨고, 아직도 나는 그 이름에 더 익숙하다.
칠순이 가까운 연세에도 할머니는 새색시처럼 자태가 고왔다. 아침이면 예외 없이 자그마한 면경을 앞에 두고 치렁한 머리채를 한참동안 빗어 내리셨다. 빗도 들어가지 않을 듯 엉키어 버린 세월의 앙금을 차근차근 걸러내기라도 하듯….


촘촘한 빗살이 그대로 살아 한 가닥 흐트러짐도 허락하지 않던 쪽진 머리와 방금 빨아 입은 듯 늘 까슬하게 올이 서 있던 연한 색의 스웨트는 여태 뚜렷이 남아 있는 당신의 잔상이다. 할머니는 비에 젖은 질퍽한 길에서도 신발에 진흙을 묻히지 않고 걷는 법을 아시는 듯, 마실을 다녀올 때도, 장날 생선 마리를 사올 때도 하얀 고무신은 집을 나서던 낯빛 그대로 맵시 고운 콧날을 얌전하게 세우고 있었다.


누군가 고향을 물어오면 외가가 떠오른다. 친정에서 비포장도로를 한시간여 달려야 이르는 곳이었는데 방학이면 의례 그곳에서 살다시피 했다. 혼자 적적하실 할머니를 위한 부모님의 배려였으리라. 고물에 몇 바퀴쯤 구른 인절미처럼 온통 먼지를 뒤집어 쓴 완행버스를 내려 아슬하게 논둑길을 걷노라면 온 들판이 소문처럼 술렁였다. 난데없이 개구리가 펄쩍 내달아 간을 콩알만큼 졸아들게 하기도 했다.
저만치 어깨를 들이미는 이끼 낀 돌담 모퉁이를 돌아들면 외가의 삽작이 나타나고 삐죽이 열린 대문 틈으로 높다란 댓돌위에 얌전히 놓인 고무신 한 켤레가 보이면 그제서야 콩당거리던 가슴이 가라앉았다.


“아이구, 왔나?” 하며 환하게 반기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표정을 쉬 드러내지 않던 할머니도 그때만은 골 깊은 주름을 부채살처럼 활짝 펼치곤 막 벙그러지는 함박꽃같이 웃으셨다.
기억 속의 할머니는 언제나 혼자였다. 삼남일녀를 슬하에 두었건만, 일찍이 홀로 되셨고 자식들은 출가를 한 터였으니 안방 문설주 위 커다란 흑백 사진 속의 외할아버지만이 유일한 말벗이었을지 모르겠다. 그 사진 한 장이 텅 빈집을 지키고 고적한 할머니를 지탱해준 주문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늘 혼자만의 성을 태산처럼 쌓던 할머니가 어느 날 집을 처분 하셨단다. 뜬금없이 우리 집에 오셔서 딸 몫이라며 쌀 한 가마를 들여 주시더란다. 하나뿐인 딸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친정을 없애버린 것이 야속해서 어머니는 할머니가 세상을 뜨시고 난 후에도 두어 번 그 이야길 하셨다. 어쨌거나 이젠 아들 며느리 봉양 받고 손자 보는 재미도 누리면서 편안히 여생을 보내시리라 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큰아들과 합가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막내 외삼촌이 교통사고를 당하신 것이다. 할머니가 계신 큰 외삼촌댁을 다녀가다 난 사고였으니 모든 게 내 죄려니 하셨나보다.


병수발을 자청 하셨다. 낯설기만 한 도시생활, 그것도 소독내가 진동하는 병원에서의 24시간. 그렇게 몇 년을 하루이듯 견디고도 별 차도가 없자 먼 일가붙이의 주선으로 공기 좋은 시골로 거처를 옮겼다. 외삼촌 부부와 이제 막 예쁜 짓을 시작하는 손녀와 함께…. 처한 상황이 비관스러웠던지 외숙모는 얼마 후 집을 떠나버렸고 모든 것이 할머니의 몫으로 남겨졌다.
뇌를 심하게 다쳐 몸보다 정신이 더 어눌해져버린 막내아들 치다꺼리에다 어린 손녀를 키우는 것은 젊은이라 해도 힘에 부칠 일이었다. 말없이 그 모든 것을 껴안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만 가능한 것이리라.


몇 년 후, 외삼촌마저 당신 곁을 떠났다. 남겨진 할머니는 심정대로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이 어린것이 무슨 죄가 있노?”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손녀를 앉혀놓고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다. 내 목숨 붙어있는 동안은 내가 거둬야지 하시던 할머니도 기력이 쇠하고, 손녀가 6학년 올라가던 해 결국 큰 아들네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예전처럼 혼자가 되셨다. 돌아보면 온통 눈물 자국만 선연할 험난한 여정을 돌고 돌아 팔순의 연세에 또다시 홀로 서기를 택하신 것이다.

제는 외로움을 탈 기력도 없으셨던가 보다. 바람이 부는 대로 누워버리는 마른 풀처럼 위태로워 보였지만 참으로 오랜만에 편안해 보이기도 했다. 파란 많던 지난 세월에 비하면 한 몸 건사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비슷한 연배의 어르신들과 어울리며 활짝 웃으시는 모습을 몇 번 뵌 듯도 하다. 그러면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빗금을 긋고 계셨나보다.
생전의 단아하던 모습처럼 훌쩍 떠나셨다. 주무시듯 고요하게 세상을 버리셨다. 더 이상 혼자도 아니며 고통도 회한도 번뇌도 없을 그 길로 들어서신 것이다.
늘상 빚쟁이처럼 손바닥을 내밀던 삶의 고단함. 이제는 더 이상 그들에게 화해를 청하듯 사탕을 털어 넣을 일도 없으리라. 짙은 박하향과 함께 입속에서 화하게 일어서던 바람처럼 자유롭게 불어 가셨을 테니.


한동안 꿈에도 오시지 않는다. 딸의 지청구가 두려우신 것일까. 오늘처럼 바람이 구슬픈 곡조로 불어가는 밤에는 꿈에서라도 할머니를 뵐 수 있으면 좋겠다. 한 삼십년쯤 세월을 거슬러 유년의 외가에 눕고 싶다. 뒤란의 대숲이 무섭도록 떨어 울어도 베갯머리 나란히 맞댄 할머니의 아랫목에서 두런두런 정담을 나누며 척박했던 당신의 삶을 가만히 보듬고 싶다.
박하사탕의 뒷맛이 깊다. 할머니의 체취인 듯 가만히 붙들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