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중심으로 살펴본 선교역사
I. 로마제국의 기독교 (AD 30-500)
사도 바울 (St. Paul, 64)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의 가장 위대한 선교사였다. 다소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바리새파의 엄격한 율법 가운데 자라났으며 유대교에 위협을 가하는 소위 새로운 이단인 예수집단을 가혹하게 핍박하다 다메섹 도중에서 기적적인 회심을 하고 그 후 초대교회의 가장 열심있는 복음전도자가 되었다. 바울은 10년이 채 못되어 로마제국의 주요한 네 지방인 갈라디아, 마게도냐, 아가야, 아시아에 토착교회를 설립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64년 네로황제의 박해때 순교하였다고 한다.
이레니우스 (Irenaeus, 178-200) 리용의 감독. 켈트어와 라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런데 그 반응은 그리 크지 못했다. 250년이 흐르도록 5-6개 군데의 공동체에 있는 교회에는 소수의 회심자밖에 모이지 못하였다.
두르의 마틴 (Martin of Tours) 고올(Gaul)지역의 감독. 한때 군인이었던 마틴은 즉각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 군대식 제도를 채택하였다. 그와 함께 여러 추종자들은 각 지방에 다니면 사원들을 허물고 우상들을 파괴시켰으며 복음을 전하고 회심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조명자 그레고리 (Gregory the Illuminator, 280) 대략 3세기 말에 위대한 선교사 그레고리가 주도한 대규모 운동의 결과와 티라다테스(Tiridates)왕의 회심에 불이 붙은 아르메니아(Armenia)는 기독교 왕국이 되었다. 410년에는 이미 아르메니아어로 번역된 신약성경이 나타났다. 아르메니아교회는 오늘날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중의 하나가 되었다.
울필라스 (Ulfilas, 311-380) 고트족이 체계적으로 복음을 접하게 된 것은 울필라스의 사역 결과인데 그의 부친은 갑바도기아인이고 모친은 고트인이었다. 그는 자기가 기독교인이 된 콘스탄티노플에서 10년을 보낸 후 자기 백성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귀국하였다. 그의 업적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성경을 고트족 언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이 일을 위하여 그는 문체에 맞도록 언어를 재정리해야 하였다. 그는 성경보급 뿐 아니라 언어와 문학에까지 현저한 공헌을 한 선교사 가운데 제 일인자였던 것이다.
패트릭 (Patrick, 389-460) 아일랜드의 사도 패트릭은 영국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12세때 아일랜드에 노예로 끌려가 양치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그 포로시기의 영적경험은 그의 온 생애를 변화시켰으며 탈출 후 영국으로 왔다가 꿈에 환상을 보고 다시 아일랜드로 들어가 그곳의 복음화를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그의 영향은 사후에도 지속되었고 그 나라를 넘어 타지에까지 확장되었다. 켈트족 기독교의 중요한 부분이었던 수도원들은 기독교 문화의 중심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선교열을 불붙이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다음 세대의 북부유럽을 복음화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 기독교인 가정 초상
II. 유럽의 기독교화 (AD 500-1200)
알로펜 (Alopen, ?) 중국에 최초로 입국한 선교사는 네스토리안 기독교(소위 ‘경교’라고 함)의 알로펜으로서 AD 635년에 입국하여 당시 당조의 태종의 환영을 받았는데 그 당시 중국문화는 절정에 달한 시기였고 태종은 종교를 연구하고 인정하며 보급하였던 왕이었다. 알로펜은 자기가 지니고 간 성경을 동료와 함께 중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수도 장안에 그는 21명의 수도사를 위해 대진사를 설립하였다. 이 새로운 종교는 10개 도를 통해 확산되었으며 수백개 도시에 수도사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콜럼바 (Columba, 521-597) 초기에 영국으로부터 복음이 전해졌던 아일랜드가 반대로 스코트랜드에 가장 위대한 선교사를 파송하였는데 그가 바로 유명한 콜롬바로서 왕족이며 재능이 많고 학식이 넓은 인물이었다. 42세때 12명의 동행자와 함께 아일랜드 수로를 건너 스코트랜드 서해안 밖에 있는 아이오나섬에 수도원을 설립하였는데 그것은 선교역사상 가장 유명한 선교센터가 되었다.
어거스틴 (Augustine, ?-604) 콜롬바가 죽던 해(596년) 직전에 교황 그레고리 대제는 베네딕트 승려 40명과 함께 어거스틴을 영국에 파송하였다. 앵글로 색슨족의 야만성에 대한 무서운 이야기를 들은 어거스틴은 고올로 돌아왔지만 교황은 그가 가던 길을 계속 가도록 명령하였다. 켄트에 상륙한 어거스틴 일행 7명은 왕 에텔버트의 영접을 받았고 왕은 나중에 기독교로 개종하여 하룻만에 10,000명이 세례를 받고 캔터베리대성당이 건립되어 어거스틴은 그 유명한 대주교 가운데 첫 번째가 되었다.
콜럼반(Columban, 550-615) 아일랜드 출신 콜럼반의 첫 일터는 동부 프랑스였으며 그곳에 룩사이유 수도원을 세웠다. 20년 후에 그는 부르군드 왕의 부도덕을 담대히 꾸짖은 까닭으로 왕실의 미움을 사 그의 켈트 수도승들과 함께 쫓겨나 라인강을 넘어 현대 스위스의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부르군드의 세력이 확대되어 이곳에서도 쫓겨나게 된 그는 북이탈리아의 보비오에 세운 수도원에서 사망하였다.
아이단 (Aidan, ?-651) 콜럼바의 후계자인 아이단은 영국 동부 연안 도서인 린디스환에 수도원을 설립하였으며 거기서 아이단은 635년에 노덤브리아 중앙부까지 전도운동을 펼쳤다. 17년동안 여러 여러 동료들과 함께 앵글족과 색슨족에게 평화의 복음을 전하였으며 많은 성과를 얻었다.
윌리브로드 (Willibroard, 658-739) 리폰의 윌프리드와 아일랜드의 에그버트 하에서 훈련받은 노덤브리아 수도사인 윌리브로드가 11명을 동반하고 북해를 건너 프리시아의 첫 선교사로 들어갔다.
보니페이스 (Boniface, 680-754) 암흑시대에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알려진 영국의 베네딕트 수도사 보니페이스는 중년이 다 되어서야 독일로 선교를 떠나게 된다. 40년의 눈부신 선교사업을 통해 그는 “독일의 사도”라는 명칭을 받았다. 크리스토퍼 도우슨은 그를 일컬어 “아직까지 살았던 어떤 영국사람보다도 유럽역사에 깊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고 말했다.
안스카 (Anskar, 801-865) “북극의 사도”라고 불리는 안스카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콜롬바에 의해 꼬르비에 세워졌던 수도원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스웨덴에 파송되어 교회를 세우고 후에 스웨덴, 덴마크, 북부유럽의 슬라브족에 대한 교황사절로 임명되었고 후에 함부르크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이 직책을 통해 안스카는 선교사업의 방대한 연결망의 본부의 역할을 하여 스칸디나비아 전역에 파송할 선교사 훈련을 지원하였다.
콘스탄틴 (Constantine, 후에는 Cyril, 826-869)과 메소디우스(Methodius, 815-885) 데살로니가의 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한 사람은 철학자이고 한 사람은 화가인 이 형제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에 의해 모라비아(현재 체코와 슬로바키아 일부지역)의 황태자인 라티스라브의 요청으로 슬라브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클레멘트 (Clement) 불가리아인들의 회심은 865년에 왕 보리스가 세례를 받음으로 크게 촉진되었고 후에 그는 유명한 선교사인 클레멘트를 마게도냐에 파송하였으며 거기서 클레멘트는 선교사훈련대학을 설립하였다. 그후 불가리아인들은 슬라브세계의 기독교 지도자가 되었고 기독교 신앙이 퍼져 나가 현재 유고슬라비아와 러시아까지 확대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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