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중심으로 살펴본 선교역사
III. 로마 카톨릭 선교 (AD 1300-1700)
아시시의 프란시스 (Francis of Assisi, 1182-1226) 200년간 계속되었던 십자군 전쟁(1095-1291)등의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중세시대 로마 카톨릭의 회교권선교를 위한 노력은 너무나 미미하였다. 아직 십자군전쟁이 한창이었을 13세기 초에 앗시시의 프란시스는 미움이 아니라 사랑으로써만 회교도들을 얻을 수 있다고 호소하였다. 그의 처음 두 번의 선교사역은 실패로 끝났지만 1219년 세 번째에는 이집트의 술탄앞에 서게 되었다. 언어의 장벽이 가로막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란시스는 어렵게나마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다. 비록 이를 통하여 직접적인 회심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는 회교도들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으며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선교의 길을 닦아 놓을 수 있었다.
레이몬드 룰 (Raymond Rull, 1232-1315) 당시 가장 뛰어났던 회교권 선교사인 레이몬드 룰은 스페인 부유한 로마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판사생활을 했었다. 그의 선교전략은 변증법적으로 전할 것, 교육을 시킬 것, 복음적으로 사역할 것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논리적으로 불신자들에게 증거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였다. 북아프리카 회교권에서 여러 박해를 받으며 사역하던 그는 결국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룰의 인생과 사역은 교회사의 가장 암울한 시대에도 기독교 진리는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간증이다. 그는 회교도들에게 선교하기 위하여 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교회의 개혁을 주장했고 또한 교회 헌금 중 10분의 1은 선교에 써야한다고 강조했다. 로마 카톨릭은 대부분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였으나 룰은 그의 소명에 끝까지 소명을 다하였다.
몽테 콜비노의 죤 (John of Monte Corvino) 유럽 외 지역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선교는 프란시스 교단의 수도사인 몽테 콜비노의 죤이 1294년에 중국에 도착한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걸식수도사인 죤은 이미 페르시아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 사람이었다. 이상한 것은 중국인들이 반대한 것이 아니라 당나라 시대의 200년 동안 중국에서 번창했던 네스토리안교회의 일부 잔유자들이 카톨릭 선교를 반대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죤은 중국황제의 신임을 얻어 북경에 교회를 설립하였고 후에 교황 클레멘트 5세에 의하여 북경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바돌로매 드 라스 카사스 (Father Bartholomew de Las Casas, 1474-1566) 15세기 말에 시작된 지리상의 발견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 새로운 선교의 비젼을 가져다주었고 교황이나 세속통치자들은 이 신대륙을 카톨릭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하였다. 신대륙 최대의 적은 식민주의 그 자체였고 토착민들을 향한 착취와 만행이 선교사들의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식민지 관리들에게 정의를 행하라며 비판의 소리를 높였다. 그 중의 한 사람인 라스 카사스는 인디안들의 위대한 지도자로서 스페인 식민지에서 식민주의와 맞싸웠다. 그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선교의 정신과 인간존중심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역설하였던 가장 위대한 인도주의적 선교사로 기억될 것이다.
프란시스 자비에르 (Francis Xavier, 1506-1559) 가장 위대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선교사라고 간주되는 프란시스 자비에르는 1542년 남부인도에서 3년을 보내며 수천명의 개종자를 얻은 후 말레이반도와 그 부족 도서지방으로 가서 다시 3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1549년 다른 두명의 예수회원과 일본인 개종자를 통역으로 데리고 소위 “해뜨는 곳”, 일본에 가서 2년동안 교육하며 설교하며 또 각종 의식을 집전하면서 전국을 여행하였고 다른 예수회원들이 그를 따라 사역을 계속하였다.
가장위대한 로마카톨릭 선교사로 여겨지는 프란시스 자비에르
마테오 릿치 (Matteo Ricci, 1552-1610) 1368년에 명나라는 선교사를 축출하였고 따라서 중국내 기독교는 소멸하였었다. 200년후 로마 카톨릭을 중국에 부식코자 하는 두 번째 시도로 예수회 소속의 마테오 릿치가 마카오의 폴투갈 식민지를 디딤돌로 삼아 20년 이상에 미치는 길고도 힘든 달구지 여행으로 북경에 도착하였다. 중국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그는 중국문화를 채택하였고 유교학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1601년 수도에까지 들어가 황제의 공식적인 시계 담당관으로 행세하면서 많은 지식인들을 만나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북경에서 마테오 릿치의 영향력을 통해 다른 예수회원들에게도 여행이 허락되어 광대한 중국 대륙 각처에 거주하며 1650년에는 거의 250,000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로베르토 데 노빌리 (Robert de Nobili, 1577-1656) 명문가 출신의 젊은 이탈리아 예수회 수도사 로베르토 데 노빌리는 1605년 인도에 도착하였다. 피셔해안에서 몇 개월 체류하면서 타밀어를 공부한 다음 마두라이로 갔다. 그는 50년간을 남부인도에서 보내면서 인도세계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개척자로서의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의심할 나위 없이 노빌리는 마테오 릿치가 중국에서 사용한 방법에 대하여 알고있었으며 그와 같은 한도내에서 또는 그 이상으로 확대해서 그 방법들을 시도해볼 결심을 하였다. 그는 브라만의 관습과 선입견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할 만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포기하였다. 인도인의 눈에 부정하게 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는 기존의 기독교회와의 거래도 끊었다. 노빌리의 대담한 시도는 당장에 성공을 거두었고 특별히 공개토론의 방법을 사용하여 상류계층에서 유례가 없었던 놀라운 사역을 이루었다.
앤드류 화이트 (Father Andrew White, 1579-1656) 앤드류 화이트는 두 명의 예수회 회원과 함께 종교적 자유를 찾아 1632년 체사피크만에 들어왔다. 화이트 신부는 인디언어를 배운 후에 그들에게 기독교를 전하여 개종시키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목적으로 그는 교리문답집을 준비하였다. 2년 후에 버지니아에서 온 백인 약탈자들이 매릴랜드에 있는 예수회선교부를 침입하여 모든 것을 빼앗고 화이트 신부는 쇠사슬에 메인 채로 영국에 보내졌으며 거기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집행되지는 않았다.
IV. 개신교선교의 시작 (AD 1600-1750)
죠지 폭스 (George Fox, 1624-1691) 1661년에 동지회(The Society of Friends) 창설자인 죠지 폭스가 3명의 동료를 중국에 선교사로 파송하였으나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져스티니안 폰 벨츠 남작 (Baron Justinian von Weltz) 처음으로 선교를 시도한 루터교 선교사로 1664년 경 교회의 선교적 책임을 외친 인물이다. 세 종류의 소책자를 발간하여 교회의 선교적 책임이 어떠한 것인지를 주장하였고 그러한 사업수행을 위한 선교회나 기구를 조성할 것과, 선교사를 훈련하는 학교를 개설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순조롭지 못했고 교리적으로 정통을 주장하는 당시 교회들은 영적생명과 선교의 비젼이 많이 결여되어 있었고 반대와 조롱을 받았다. 그는 화란으로 가 남작의 지위도 버리고 “이방인의 사도”라는 명칭을 받고 화란 기아나(수리남)까지 항해하였으나 거기서 수확을 얻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어거스트 프랑케(August Francke, 1663-1727) 경건주의의 지도자이며 할레대학의 교수였던 프랑케는 할레대학을 유럽의 경건주의와 복음운동, 18세기의 해외선교운동의 중심지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해외선교란 18세기에도 역시 교회의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에게는 내키지 않는 것이었으며 자연히 그들은 웃음거리와 놀림거리가 될 뿐이었다.
바돌로매 지겐발크와 헨리 플뤼차우 (Bartholemew Ziegenbalg & Henry Plutschau) 선교의 서곡은 경건주의자였던 덴마크의 왕 페르디난드 4세(Ferdinand IV)의 요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왕은 덴마크의 식민지인 인도 남쪽끝의 트랜퀴바(Tranquebar)를 복음화하기 위한 선교사를 파송해 달라고 할레대학에 부탁했다. 이에 대해 바돌로매 지겐발크와 헨리 플뤼차우가 자원하여 덴마크-할레 선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니콜라우스 진젠도르프 (Nicolaus Ludwig Zinzendorf, 1700-1760) 모라비안교회의 감독이었던 진젠도르프 백작은 30년간 세계선교활동을 격려하고 지원하였다. 진젠도르프와 프랑케는 18세기에 있어 가장 훌륭한 선교지도자로 꼽히고 있다. 1730년 코펜하겐을 방문중이던 그는 서인도에서 온 한 흑인과 그린랜드 출신의 두 에스키모인을 만났는데 그들은 모두 선교사를 원하고 있었다. 그들의 요청에 깊은 감동을 받은 진젠도르프는 헤른후트에 돌아오자 그 문제를 놓고 사람들에게 호소하였다. 그 호응은 즉각 나타났으며 대단히 열정적이었다. 그들의 첫 선교는 버진열도의 덴마크령 성 토마스 섬에 있는 흑인 노예들을 위한 것이었고(1732년), 그 다음 그린랜드, 수리남, 황금해안, 남아프리카, 북미 인디언, 자마이카, 안티구아로 확장되어 1732년에서 1760년 사이에 226명의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외국으로 들어갔다.
니콜라우스 진젠도르프 백작
대륙의 경건주의 운동에 있어 주요한 인물은 스패너, 프랑케, 진젠도르프이고 영국의 경우 복음적 각성에 있어 위대한 설교자는 웨슬레와 휫필드였고 미국의 경우는 조나단 에드워드였다. 이 두 측면 사이에 연결된 것은 웨슬레가 개인적으로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형제들을 만난 것과 휫필드가 프랑케의 글을 연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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