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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중심으로 살펴본 선교역사

Joyfule 2019. 7. 8. 21:24


 

     선교사 중심으로 살펴본 선교역사

 

 
V. 개신교 선교 (AD 1750-)
 
윌리엄 케리 (William Carey, 1761-1834) 가난하기 짝이 없는 영국의 구두수선공 출신의 윌리엄 케리는 “근대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 이상하게도 그에게 선교에 대한 관심이 생긴 동기는 “쿡 선장의 마지막 항해”라는 책을 접하고 부터였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탐독하였고 독학으로 수개국어를 습득한 노력파였다. 1792년 87페이지에 달하는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기독교인들의 강구해야 할 수단들을 찾아”라는 책을 출간하였는데 이것은 선교에 관해 저술된 어떤 책보다도 가장 확신에 찬 선교적 호소를 하고 있다. 이 책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으며 후대 교회사에 끼친 영향을 생각한다면 마틴 루터의 95개 조항과 나란히 설 수 있을만큼 귀하다. 선교운동을 위한 여러역경을 거친후 1793년 인도로 들어가 40년간 선교사역에 힘썼다. 유럽과 미국에 케리의 노고와 편지를 통해 많은 선교기관이 설립되었는데 그중에는 런던선교회(1795), 스코트랜드와 글라스고우 선교회(1796), 네덜란드선교회(1797), 교회선교회(1799), 영국해외성서공회(1804), 미국해외선교위원회(1810), 미국침례선교협회(1814), 미국성서공회(1816) 등이 있다. 19세기에 있어서 선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윌리엄 케리라고 해도 결코 과장은 아닐 것이다. 


헨리 노트 (Henry Nott, 1774-1844) 다른 지역과는 달리 태평양 지역에는 한번에 많은 수의 선교사들이 파송되었다. 1796년 런던선교회는 30명의 선교사들을 타이티로 파송했지만 선교사역은 선교사들이 원주민과 동화되고 낙심하고 병에 걸려 고생하는 등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던 벽돌공 헨리 노트 같은 이가 꿋꿋하게 16년을 아무런 성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도 견뎌내지 못했더라면 타이티 섬의 선교사역은 실패했을 것이었다. 1819년 포매어 왕의 세례식이 거행되었고 (비록 포매어 왕은 곧 옛생활로 돌아가 버렸지만) 타이티 원주민들 사이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곳을 방문했던 한 러시아 귀족은 유아살해, 식인축제, 전쟁 등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유럽 선교사들의 사역의 결과였던 것이다.

 
헨리 마틴 (Henry Martyn, 1781-1812) 그 당시 말썽없이 인도에 선교사로 들어가는 길은 동인도회사의 전속목사가 되어 들어가는 것 뿐이었다. 이렇게 동인도회사의 전속목사로 커다란 선교업적을 이룬 사람이 영국 콘월 태생의 헨리 마틴인데 그는 1806년 인도에 도착하여 짧은 기간 동안 사역했으나 중앙아시아에서 활동한 선교사 중 최고의 성경번역가였다. 4년동안 그는 군대에 종군하면서 유럽인들과 인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학교들을 세우는 등의 사역을 하면서 동시에 신약성경을 힌두어, 페르시아어, 아랍어 등으로 번역했다. 


아도니람 저드슨 (Adoniram Judson, 1788-1850) 1812년 인도에 들어간 아도니람 저드슨 부부와 다른 6명의 선교사들은 미국 최초의 해외선교사라는 영예를 안았다. 앤도버신학교의 소수의 학생들의 선교에 대한 높은 관심은 미국선교사파송위원회 결성의 촉진제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미국 해외선교의 소박한 시작이 되었다. 저드슨은 동인도회사의 방해공작으로 인도를 터나 미얀마로 들어가 일생동안 배타적이고 마음의 문이 굳게 닫힌 그들에게 온갖 어려움을 무릎쓰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충실하였고 저드슨은 미얀마어로 성경을 번역하였다. 
 
히람 빙햄 (Hiram Bingham) 하와이(당시 샌드위치섬)의 경우는 어떻게 적은 수의 미국 선교사들이 낯선 문화 속에서 수십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사회의 각 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독특한 것이다. 1819년 7쌍의 부부가 앤도버신학교를 졸업한 히람 빙햄을 지도자로 하여 하와이를 향해 떠났다. 그들이 선교를 시작한 지 10년이 겨우 지났을 때 선교사들은 섬의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으며 빙햄은 지극히 존경을 받았는데 여러 추장들은 그를 단순한 영적 지도자 이상으로 극진히 모셨다. 도덕성과 물질주의로 인한 문제점들, 선교부 임원들의 마찰에도 불구하고 복음사역은 계속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알렉산더 더프 (Alexander Duff) 인도에서 사역한 선교사들 중 가장 혁신적인 사람이 1830년 그의 아내와 함께 캘커타에 도착했던 스코트랜드 교회의 첫 번째 해외 선교사였던 알렉산더 더프였다. 더프는 인도의 개종자들은 대부분 하류층에서 나왔고 이들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기 때문에 인도선교는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상류층을 대상으로 학교를 개교하여 서구의 과학지식을 전해주면서 선교하였는데 호응이 대단하였다. 해외선교에 끼친 그의 공헌은 지대한 것이었다. 그의 영향력 때문에 수백명의 선교사 자원자들이 헌신을 하였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선교사업의 후원자가 되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약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교육사업과 복음사업을 연결한 그의 선교방법은 세계 도처에서 실행되었다. 


죤 반더켐프 (John T. Vanderkemp, -1811) 최초로 남아프리카에 선교사로 온 사람은 홀랜드 출신의 의사였던 죤 반더켐프였다. 네덜란드 개혁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50세의 나이로 1799년 케이프 식민지에 도착하여 주로 호텐토트족 사이에서 사역하며 몇 번의 좌절을 이겨내고 수백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그는 매일 노예무역을 목격하며 대단히 마음아파하다가 노예를 해방시켜 주려고 수천 달러를 썼는데 그 중 17세의 나이로 그와 결혼했던 말라가시 여인도 있었다. 그는 선교사역을 시작한 지 12년만에 운명하였지만 런던선교회의 가장 훌륭한 개척자였다.
 
로버트 모리슨 (Robert Morrison, 1782-1834) 로버트 모리슨은 19세기의 초엽 외국인게 적대적인 중국땅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모습으로 사역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저를 어려움이 제일 많은 곳으로 보내주시고 가장 축복하기 어려운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게 해주소서”라는 것이었다. 그의 기도가 응답되어 중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25년 동안 인내하며 사역하였지만 10여명의 개종자밖에 얻지 못하였고 그가 죽을 즈음에는 전 중국을 통틀어 3명의 중국인 신자가 남았을 뿐이었다. 

로버트 모팻 (Robert Moffat, 1795-1883) 남아프리카선교회의 창시자로 50년 이상 이 지역 선교에 큰 영향을 끼친 스코트랜드 출신의 로버트 모팻은 아프리카 선교에 있어 그보다 더욱 유명해진 사위 때문에 오히려 “데이빗 리빙스턴의 장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모팻은 리빙스턴보다 더 훌륭한 선교사였다. 그는 복음전파자, 번역가, 교육자, 외교관, 탐험가였는데 이러한 역할들을 잘 조화시켜 선교함으로써 아프리카 선교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다. 


존 클라우 (John Clough) 알렉산더 더프는 상류층 사람들을 복음화 하는데 주력했지만 그의 뒤를 이은 많은 선교사들은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낮은 카스트 계급들을 위해 일하였다.
1865년 미국 침례교선교회 출신의 죤 클라우 박사 부부는 인도 옹골에 있는 로운스타선교회에서 사역하며 천민계급들 사이에서 큰 부흥을이룩하였다. 부흥은 꾸준히 지속되어 1878년 여름에는 하루에만 2,222명에게 침례를 준 일도 있었다.


죤 윌리암스 (John Williams, 1796-1839) 태평양 군도에서 일했던 선교사 중 가장 혁신적이고 먼 미래를 바라보고 일했던 사람은 영국 태생의 죤 윌리암스였다. 이 지역에 폭넓게 끼친 그의 영향 때문에 “태평양의 사도” 혹은 “폴리네시아의 사도”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는 원주민 사역자들을 훈련시켜 여러 섬들에 파송하고 자신은 규칙적으로 그들을 방문하여 선교사역을 지도하는 방식을 사용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섬들 을 찾아 에로망고 섬에 도착하였다가 원주민들에게 습격을 당해 창에 찔려 숨을 거두었다.


칼 구츨라프 (Karl F.A. Gutzlaff, 1803-1851) 칼 구츨라프를 언급하지 않고는 동양선교를 논할 수 없다. 독일태생으로 20대 초반에 네덜란드선교회에 의해 인도네시아로 파송되었는데 그곳에서 선교회 승인 없이 중국 피난민들을 위해 일하다가 후에 독립 선교사가 되어 홍콩에 거처를 정하고 한 세대 내에 중국을 복음화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15년이 못되어 300명이 넘는 중국인 사역자들을 훈련하여 파송했는데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수천 권의 신약성경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신앙서적과 소책자들이 배포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역들이 정직하지 못한 중국인 사역자들이 꾸며 낸 속임수였고 그의 명성은 훼손되었다. 그의 선교적 노력에 의해 중국복음화선교회가 조직되었으며 이 선교회는 1853년 허드슨 테일러를 중국에 파송하게 되는데 사실 구츨라프는 젊은 테일러가 선교의 방법과 목표를 설정하는 데 다른 누구보다도 더 큰 영향을 주었으며 후에 테일러는 그를 “중국내륙선교의 조부”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