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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중심으로 살펴본 선교역사

Joyfule 2019. 7. 11. 22:53

 

     선교사 중심으로 살펴본 선교역사

 

 
 
클래런스 죤스 (Clarence W. Jones, 1900) 다른 전문 직업선교와 마찬가지로 방송선교 역시 그 필요성을 인정받기까지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였다. 아마 클래런스 죤스같은 선견지명을 가진 지도자가 없었더라면 방송선교는 오늘날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죤스는 복음을 위해 ‘악마의 도구’인 방송을 활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국내에 수신 장비가 6대 밖에 없을 때 외국에 나가 방송국을 세우겠다고 해서 ‘바보같은 죤’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는 세계복음화를 위해서는 통신분야에서 선교사들이 선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실패와 역경 끝에 에콰도르 퀴토에 세운 HCJB (Heralding Christ Jesus’ Blessisngs)는 1931년 역사적인 첫 방송을 내었다. 그후 몇 달 내에 세계라디오선교회가 공식 결성되었다. 출력은 계속 강화되 방송을 청취한 사람들의 편지가 뉴질랜드, 일본, 인도, 소련 등지에서도 쇄도하게 되었다. 세계라디오선교회는 반세기를 넘게 사역해 오며 단순한 방송국 이상이 되어 병원, 이동진료소, 출판사, 컬러TV 방송국등을 운영하고 있다. 

 
글래디스 아일워드 (Gladys Aylward, 1904-1970) 런던의 노동자의 딸로 태어나 하녀로 살며 향락에 빠진 생활을 하던 글래디스는 회심 후 선교사로 헌신하려 중국내지선교회의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내지선교회의 훈련을 마치지 못하고 탈락한 후에도 선교사의 꿈을 잃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중국으로 보내주실 것을 확신하고 기차삯을 모았고 중국에 대한 책을 읽고 조사하였다. 그러다 지니 로슨(Jeannie awson)이라는 중국 선교사 과부 할머니가 누군가 와서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알고 중국으로의 힘겨운 여행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로슨이 경영하는 양쳉의 여인숙에서 일하다가 로슨이 사망한 후 양쳉의 지사로부터 시골 여자들의 발을 조사해달라는 요청을 받아 여러 곳을 다니며 선교사역이 꽃피우기 시작했다. 일본과의 전쟁기간동안 그녀는 중국을 위해 구호품 조달과 스파이의 역할을 감당하기도 하다가 1940년 100명이 넘는 입양한 전쟁고아를 데리고 산을 넘고 황하를 건너 태국 국경을 넘어 안전지대로 피난하였다. 그녀는 전기, 영화, 방송등에 의해 국제적인 명사가 되었고 후에 대만에서 계속 사역을 하며 세계 각처를 여행하며 강연과 활동을 하였다. 


죤 브로져 (John Broger) 2차대전이 끝나자 극동지역에서 방송으로 선교를 하려 했던 세 사람은 그 꿈을 실현시키기 시작했다. 태평양 제38기동함대 장교였던 죤 브로져는 방송선교의 강력한 꿈을 안고 귀국하였고 그의 친구였던 로버트 보우만(Robert owman - LA에서 기독교 방송국을 운영하고 있었다)과 윌리엄 로버츠(William Roberts - 목사로 LA에서 라디오 프로에 출연하고 있었다)가 그의 꿈을 지지하고 협력하였다. 브로저는 상해로 가 그곳에 중계소를 세우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필리핀에 극동방송국 Far East Broadcasting Company)를 설립하였다. FEBC의 가청범위가 넓어지면서 청취자들의 편지가 쏟아졌고 많은 이들이 성경통신학교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 시작한지 채 2년이 안되어 12,000명이 원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구소련과 중국에서의 청취율도 대단했다. 14년간 사역한 죤 브로져는 미 합참의장의 요청으로 군대로 돌아가 고문관으로 사역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사장이 된 로버트 보우만의 지도하에 FEBC는 더욱 크게 발전하였다.

 

제시와 레오 핼리웰 (Jessie and Leo Halliwell) 아마존 강 유역을 따라 18,000Km를 오르내리고, 정글을 따라 1,600Km를 여행하며 밀림에 둘러싸인 벨렘(Belem)과 마나우스(Manaus)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의료사역을 펼친 핼리웰 부부는 결혼 직후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결정하고 안식일교회의 선교부에 자원하여 브라질에서 사역하다 의료사역의 필요성을 깨닫고 안식년중에 의학공부를 하고 조직을 확대하였다. 1956년 아마존 인디언들 사이에서 25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핼리웰 부부는 은퇴하고 리오데자네이로에서 남미의 안식일교회의 의료선교를 총괄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들의 헌신적인 봉사를 통해 아마존강은 이동병원선으로 붐비게 되었으며 이로써 그들의 개척사역은 종결되었다.


칼 벡커 (Carl Becker) 다른 어느 지역보다 아프리카는 항상 의료선교사들의 흥미를 끌어왔고 또 의료선교사들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아프리카의 복음화는 크게 진전되었다. 수많은 유명한 이들중 아프리카인들의 생명을 구하고 건강을 돌보는데 특별히 헌신된 의료선교사를 한 명 뽑는다면 콩고의 위대한 문강가(Munganga)인 칼 벡커를 따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필라델피아에서 의사로 개업한 그는 아프리카내륙선교회의 의료선교사를 구한다는 편지를 받고 옛 서약을 기억하고 고민 끝에 콩고로 떠났다. 오이카에서의 의료사역은 빠른 속도로 확대되는 중 그의 첫 번째 목표였던 복음화를 위한 영적사역에 헌신치 못함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는 의료사역이 영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였듯이 의료선교는 복음전파의 밑거룸이었다. 그의 대하여 한 아프리카 의대생은 “많은 선교사들이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고 많은 선교사들이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나는 문강가(벡커 박사)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다”고 그를 찬사하였다.


케네스 파이크 (Kenneth Pike) 기독교계나 학문계를 통틀어 20세기에 가장 뛰어난 언어학자는 SIL(Summer Institute of Linguistics)의 원장을 수년간 역임했던 케네스 파이크였다. 그는 중국내륙선교회에서 선교사로 적합지 못하다고 파송을 받지 못하였고 여러 선교회에 지원했으나 거절당하다가 위클리프캠프에 입교가 허락되었다. 그후 멕시코에 가서 미즈텍부족의 언어공부에 두드러진 진보를 보여 여름 위클리프 캠프에 교사로 초빙되게 되었다. 캐머론 타운센드의 조카딸로 번역 선교사로 멕시코에서 사였하기 위해 준비하던 UCLA를 졸업한 수재인 에블린 그리셋(Evelyn Griset)과 결혼하여 최상의 번역 선교사 부부가 되었다. 미즈텍어 신약성경의 번역을 10년만에 완료하자 파이크는 언어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번역선교사들을 돕는 일에 전력하였다. 그는 미시간 대학교와 SIL에서 강의와 연구를 계속하면서 음성학 이외의 언어학의 다른 분야로도 연구를 확대하였고 그의 연구는 전세계에 흩어져 일하는 성경번역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시카고대학의 에릭 햄프교수는 파이크의 첫 저서인 ‘음성학’은 ‘그 분야에서 가히 혁명적인 것이다’라고 하였고 덧붙여 지난 25년간 언어학자들이 관심을 갖지 않던 생소한 언어들로부터 만들어진 자료의 거의 절반은 전적으로 케네스 파이크의 연구와 노력, 가르침의 결실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결코 과장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헬렌 로즈비어 (Helen Roseveare, 1925-) 영국의 지체높고 존경받던 콘월(Cornwall) 가문에서 태어나 캠브리지 대학 1학년때 회심, 숙부들과 이모가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선교사로 헌신한 헬렌 로즈비어는 1953년 세계복음화십자군(Worldwide Evangelization Crusade: WEC)의 선교사가 되어 콩고로 건너갔다. 의료선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그녀는 동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병원 및 훈련학교를 개설하여 성공하였다.
후에 네보봉고로 발령되어 그곳에서 병원을 손수 세웠으나 후에 젊은 영국인 의사인 죤 해리스에게 그 책임자직을 넘겨주어야만 했고 이것은 그녀에게 무척 힘든 일이었다. 1964년 반군들로 인해 콩고는 유혈내전사태에 빠졌고 헬렌은 반군들에게 잡혀 고문과 강간을 당했다. 안정된 후에 콩고에 다시 들어갔지만 흑인 민족주의에 영향을 받은 학생들은 그녀의 권위에 공공연히 도전하였고 심지어 동료들까지 그녀의 지도력에 회의를 표시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결국 20년 동안 이끌었던 학교를 사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후 더 큰 사역을 할 수 있게 하셨는데 그것은 기독교선교의 시급함과 필요성을 외치는 국제적인 강연자의 사역이었고 그것을 통해 더 큰 일을 감당하였다. 


폴 프리드 (Paul Freed) 방송선교회 중에서 가장 크고 세계전역에 흩어져 있는 것이 트랜스 월드 라디오(Trans World Radio)이다. 1954년에 설립된 TWR은 오늘날 모두 합쳐 500만 와트 이상을 내보내고 있으며 전세계 인구의 80%가 가청대상이다. 이렇게 강력하고 훌륭한 방송 선교회가 설립되기까지는 랄프(Ralph)와 폴 프리드 부자의 헌신과 희생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TWR의 설립자인 폴 프리드는 선교사의 아들로 중동에서 자랐다. 휘튼대학과 나약선교사대학을 졸업한 폴은 유럽을 방문했을 때 스페인선교의 사명을 느꼈고 방송선교가 적합하다는 생각에 방송선교의 계획을 세웠다. 지브롤터 해협 건너편 모로코의 탕헤르(Tangier)에 아버지 랄프의 도움으로 어려움 끝에 “탕헤르의 목소리”가 유럽과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 철의 장막을 뚫고 동유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모로코의 독립으로 몬테카를로스로 옮긴 TWR은 그 이후 세계적으로 그 방송망을 확대하였다. 헌신적이고 유능한 직원들, 기적적인 재정의 해결, 매월 선교부에 쇄도하는 수백 통의 편지들이 모두 TWR의 성공을 대변해 주고 있다.


로버트 스피어 (Robert E. Speer, 1867-1947) ‘학생자원운동(SVM) 정신의 구현자’라고
불렸던 로버트 스피어는 역시 SVM의 중추였던 죤 모트와 일생 내내 두터운 우정을 유지하
였고 모트처럼 평신도로서 해외선교운동에 헌신하였다. 프린스턴을 졸업한 그는 SVM의 순회서기가 되어 1년동안 천명 이상의 해외선교자원자들을 모집하였다. 선교사로 나가려고 준비하는 중 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선교부의 최고 행정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해왔다. 수많은 학생들을 선교사로 보내고 자신은 본국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아 번민했지만 핵심자리에서 해외선교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 수락하여 70세까지 46년간 사역하였다. 은퇴후에도 여러 대학과 집회에서 강연하며 해외선교를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피터 데이네카(Peter Deyneka) 피터 데이네카의 슬라브복음선교회(Slav Gospel Association)은 자체적으로 방송국을 소유하지는 않았지만 방송을 복음전파의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 여겨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전세계 선교방송국을 통해 방송하였다. 1914년 16세의 나이로 러시아에서 미국에 온 피터는 회심 후 러시아를 오가며 복음을 전하다 정치적 상황이 급변하여 1930년 이후로는 여행도 복음도 전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동유럽선교에 열정을 가지고 그는 비슷한 비젼을 가진 이들과 슬라브복음선교회를 조직하였다. 클래런스 죤스의 주선으로 HCJB의 단파로 소련에 방송을 시작하였고 폴 프리드가 탕헤르에 TWR 방송국을 세우자 피터는 이를 활용하여 더 많은 프로그램을 슬라브 국가에 보냈다. 극동방송국과 다른 방송선교회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1960년대에는 소련에만 매달 600개 이상의 SGA 프로그램이 방송되었고 피터는 소련을 다니면서 SGA의 방송 프로그램에 대해 고마워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SGA는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지만 방송선교가 역시 주된 사역이었다.

 

죠이 리더호프 (Joy Ridderhof) 방송선교가 세계복음화를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한편 그 한계점이 있었다. 그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언어를 쓰는 부족들은 그 혜택에서 제외되어 있으며 설령 언어가 알려져 있다 할지라도 사용인구가 적으면 그들을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 프로그램을 제작하거나 방송할 수 없었다. 성경번역은 부족을 언어를 배운다는 것도 쉽지 않았고 또 그 언어를 문자화해서 부족들을 공부시켜 성경을 읽게 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죠이 리더호프가 이런 문제점들을 위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는데 그녀는 온두라스의 작은 부족을 위한 녹음선교의 길을 개척했던 것이다. 1930년대 초에 죠이는 독신선교사로 온두라스에 갔는데 6년 뒤 건강을 헤쳐 고향 로스 엔젤스로 돌아왔다. 거기서 두고온 선교지 사람들을 생각하고 녹음을 통한 선교를 고안해 내었다. 그 이후 원주민의 목소리로 복음의 내용과 음악을 녹음하여 선교하는 녹음선교회(Gospel Recording)가 1941년 정식으로 조직되었다. 멕시코와 중미를 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35개의 새로운 언어와 방언을 녹음하였고, 알래스카, 필리핀 그렇게 녹음선교의 사역이 펼쳐졌다. 현재까지도 녹음선교회는 그 사역을 계속해 오며 수많은 언어와 방언으로 녹음 테이프를 만들어 전세계에 배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