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중심으로 살펴본 선교역사
데이빗 리빙스턴 (David Livingstone, 1817-1873) 선교역사에 있어 빠뜨려서는 안되는 이가 바로 데이빗 리빙스턴이다. 그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가 꼭 필요로 했던 영웅이었으며 아프리카선교에 불을 당긴 사람이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힐 정도로 확고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20세기 중반까지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를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여겼다. 1세기 이상 그는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최고의 영웅이었으며 헌신과 충성의 화신으로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도전을 주었다. 그가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가장 큰 공헌을 했다는 점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으나 선교사역 자체에 얼만큼의 결실을 맺었는가에 대해서는 비판할 점이 없지 않다. 리빙스턴은 사실 그의 많은 전기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위대한 성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소심한데다가 변덕이 심한 사람이었으며 이런 점 때문에 선교사역에 많은 곤란을 겪었다. 그러나 이런 약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아프리카 선교에 집중시킨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신 사람이었다. 리빙스턴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심적 충격을 주었고 선교의 열풍이 온 나라를 휩쓸기 시작했으며 선교에 대한 희생의 대가가 무엇이든간에 헌신하겠다는 젊은 남녀의 무리가 줄을 이었다.
죤 게디 (John Geddie, 1815-1872) ‘태평양의 사도’라고 불리웠던 죤 윌리암스의 비극적인 죽음 후 수십명의 청년들이 그의 뒤를 잇겠다고 헌신하였다. 그중에서 ‘완고하고 유머가 전혀 없으며 단순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용감한 선교사’로 표현되는 게디는 노바 스코티아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면서부터 당시 인기를 얻었던 남태평양 선교에 대한 헌신의 마음을 가졌다. 1848년 그는 아내와 함께 뉴헤브리드즈의 섬들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안네이티움섬으로 가서 성경을 번역하고 복음을 전하며 원주민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했다. 그는 사역에 아주 뛰어났기 때문에 그 섬 주민 거의 전체가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의 비석에는 ‘그가 1848년 첫발을 내디뎠을 때 이 섬에는 단 한 사람의 기독교인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1872년 이 섬을 떠날 때에는 단 한 사람의 불신자도 없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죤 패튼 (John G. Paton, 1824-1906) 스코트랜드 태생인 죤 패튼은 남태평양에서 사역하였다. 뉴헤브리디즈의 아니와라는 작은 섬에서 두 번째 사역에서 많은 원주민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으며 원주민 기독교인들의 도움을 받아 2개의 고아원과 부흥이 계속되는 교회 및 여러 학교들을 세웠다. 개종한 추장의 후원으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패튼은 청교도적인 엄격한 법률을 만들어 섬 주민 모두가 이를 따르게 했다. 패튼은 말년에 선교지도자로서 호주, 영국, 미국을m방문하여 자금을 조달하고 뉴헤브리디즈에서 필요한 선교사를 헌신시키는 일을 주로 하였다. 그래서 19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30명 정도를 제외한 모든 주민들이 복음을 받아들였고 원주민 사역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학교가 세워져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공부하였으며 24명의 선교사가 그들의 아내들과 더불어 봉사하였다.
죤 콜러릿지 패터슨 (John Coleridge Patterson, 1827-1871) 죤 콜러릿지 패터슨은 멜라네시아 최초의 성공회 주교였고 영국의 유명한 시인인 사무엘 테일러 콜러릿지의 조카로 영국의 명문집안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였다. 멜라네시아 주교직을 제수받고 그는 선교선을 타고 여러 섬을 돌며 자원하는 소년들을 모아 뉴질랜드로 데려와 훈련시켜 고향에 돌려보내 독자적으로 복음사역을 하게 하였다. 동시에 그는 여러 섬의 주민들과 추장들과 우호관계를 맺어 그들의 신뢰를 받았다. 하지만 노예상인들의 출현으로 그의 사역은 타격을 입고 결국 노예상으로 오인되어 화살을 맞고 숨졌다. 패터슨의 죽음의 소식은 노예상들의 비열한 행위에 세상의 주위를 끌게되어 마침내 노예밀매는 근절되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남태평양의 선교에 헌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허드슨 테일러 (Hudson Taylor, 1832-1905) 사도 바울 이후 19세기 선교사들 중 큰 비젼을 갖고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방대한 지역을 복음화시킨 사람으로 영국출신의 허드슨 테일러는 능가하는 인물은 없다. 중국내륙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는 그가 독창적으로 만들었으며 그의 생전에만도 800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사역하였고 훗날 후원자 없는 독립선교(Faith Mission)의 모형이 되었다. 1853년 21세의 나이로 중국복음화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중국 상해로 머물다가 사치스런 선교사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개신교 선교사들이 가본 적 없는 내륙으로 들어가 사역하기 시작하였고 1865년 그의 선교경험과 성격이 반영되어진 중국내륙선교회가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테일러는 지식인들과 정식목회자들로서는 중국복음화가 요원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영국의 노동자들 중 헌신된 남녀일군들을 모집하였다. 그것을 통해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른 선교단체들과 쓸데없는 경쟁을 피하고 선교노력을 극대화 할 수 있었다. 재정지원과 개인후원의 문제에서 선교회는 정규적인 봉급을 약속하지 않고 자신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만 의지하게 하였다. 허드슨 테일러가 기독교 선교에 끼친 공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의 통찰력과 비젼이 없었다면 과연 오늘날 기독교 선교가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 의문이다.
샬롯(로티) 딕스 문 (Charlotte Lottie Diggs Moon, 1840-1912) 침례교선교의 “수호성인”이라고 불리는 로티는 해외 선교사로 헌신한 첫 번째의 여성은 아니었지만 여자로서 큰 성공을 거둔 첫 번째 여성선교사였다. 버지니아 태생의 로티는 동생을 따라 중국 선교사로 떠났가 동생 귀환 후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여성선교사들에게 하찮은 일만 맡기는 선교풍토에 반기를 들고 핑투라는 지역에서 개척사역을 시작하였다 어려움 중 교회는 꾸준히 성장, 20년 내에 중국인 목사에 의해 천명 이상이 침례를 받았으며 핑투는 중국전역에서 남침례교 최대의 선교중심지가 되었다. 로티는 저술과 본국에서의 설교등을 통해 미국 남부의 많은 침례교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또 여성들에 의해서만 선교자금으로 쓰여질 크리스마스 특별헌금을 기획하였고 남자 선교사들이 사직함에 따라 비게 된 자리를 맡기 위한 여성들을 모집하였는데 그 결과는 엄청난 호응이었다. 로티의 사후에도 계속 로티 문 크리스마스 헌금은 증가하였고 그녀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여러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플로렌스 영 (Florence Young)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의 토박이인 플로렌스는 남태평양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영적복지를 위해 일하겠다고 표명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플리머스형제단((Plymough Brethren)에 속한 그녀는 하루 12시간 이상씩 사탕수수를 베는 살인적인 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여 농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사역이 커져갔다. 1890년 중국선교의 소명을 느끼고 10년간 중국에서 사역하다 돌아오자 노예매매와 강제노동이 금지되어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플로렌스와 그의 동역자들은 귀향하는 노동자들을 따라가 솔로몬 제도의 각 섬에서 귀향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웠다. 1907년 선교회는 남태평양복음선교회로 명칭을 바꾸고 그녀의 친척들과 솔로몬 제도를 위한 선교사역에 헌신하여 생동감있는 복음주의 교회가 뿌리를 내리게 되어 지금도 계속 부흥하고 있다.
제임스 찰머스 (James Chalmers, 1841-1901) 뉴기니아에서 사역했던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선교사 중 하나가 제임스 찰머스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출신으로 1866년 부인 제인과 함께 런던선교사 파송으로 남태평양의 라로통가에서 10동안 사역하였지만 만족치 못하고 뉴기니아로 들어가 원주민들과 함께하면서 실천하는 사랑으로 효과적인 선교사역을 하였다. 그가 그 섬에 들어간지 5년이 지났을 때 사람을 잡아먹는 일도, 축제나 살인도 사람 해골을 가지고자 하는 욕망도 모두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원주민은 진실함을 가지고 일하는 챨머스를 사랑했으며 그에 대한 소문을 널리 퍼뜨렸다. 복음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열정으로 그는 젊은 동역자와 사나운 식인종 지역으로 알려진 플라이강 유역을 탐사하다 창에 찔려 숨지고 갈기갈기 찢겨 식인종에게 잡혀 먹었다는 소식을 남긴 채 실종되었다.
헨리 스탠리 (Henry M. Stanley, 1841) 사생아로 태어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뉴욕 헤럴드지의 기자가 되어 1871년 데이빗 리빙스턴을 찾기 위해 아프리카로 급파된 헨리 스탠리는 그곳에서 4개월을 지내고 와 “나는 리빙스턴을 어떻게 찾았는가”라는 책을 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리빙스턴이 죽은 지 1년 후 그는 아프리카 탐험을 떠났는데 스탠리는 자신을 탐험가이자 무소속 선교사로 생각했다. 선교에 대한 그의 가장 큰 공헌은 데일리 텔레그라프지에 게재한 한 편지로써 그것을 통하여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일생동안 했던 것보다 더 많은 선교일꾼을 헌신하게 만들었다. 몸바사로부터 콩고강 어귀까지 아프리카를 횡단하는 999일간의 탐험은 전세계를 자극하여 검은 대륙에 선교사를 보내는 촉진제가 되었다.
A.B. 심슨 (A.B. Simpson, 1843-1919) 국제적 선교사단체인 기독교인-선교사연합회(Christian and Missioanry Alliance: C&MA)의 창설자인 심슨은 실제 선교사로 활약한 적은 없지만 선교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 선교회들은 그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설교에 탁월한 목회자로 사역하던 슨은 환상속에 선교사의 부르심을 받고 몇 달동안 선교의 문이 열리도록 노력했으나 그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가 선교사로 헌신하는데 최대의 장애는 아내 마가렛과 6명의 아이들이었다. 교회를 사임한 그는 세계선교에 전적으로 헌신된 교회를 만드는 목표로 뉴욕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1887년 선교에 관심이 많은 신앙인들의 힘을 한곳으로 모으기 위한 기독교인연합(Christian Alliance)를 조직했고, 그 연합회가 더욱 발전하여 새로운 선교회인 복음주의선교사연합회가 창립되었다. 이 두 단체는 10년 후 1897년 기독교인-선교사연합회(C&MA)로 통합되었다. 심슨이 세상을 떠날때쯤에는 모든 대륙에서 C&MA 선교사들이 활약하였고 1919년 그가 세운 선교사학교가 뉴욕 나약에 기반을 잡았다. 그가 세운 선교사훈련학교를 본받아 북미 각처에 성경학교 붐이 일어났으며 이러한 학교들은 그 후 수십년 동안 독립적인 믿음선교회를 형성하는 주된 원천이 되었다.
메리 슬레서 (Mary Slessor, 1848-1915) 리빙스턴과 스탠리의 탐험과 선교사역은 많은 사람에게 도전을 주어 수십명의 선교사들이 아프리카고 떠났다. 당시 탐험이나 개척사역은 결코 여성 독신 선교사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 최소한 메리 슬레서가 아프리카 선교에 헌신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스코트랜드 태생으로 가난과 가정불화로 얼룩진 어린시절을 보낸 그녀는 27세의 나이로 현재 나이지리아에 위치한 갤러바로 떠났다. 50년간 어떤 백인도 살아남지 못했던 오지 오코용 부족들 사이에 살면서 그들을 가르치고 치료하였으며 부족간의 분쟁을 해결해 주었다. 그녀가 중재자로서 뛰어나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메리는 그 지역의 전체 재판관과 같은 임무를 수행하였다. 1892년 그녀는 오코용의 첫 부영사로 임명되어 대영제국 최초로 여성 부영사가 되는 영예를 누렸다.
죠지 그렌펠 (George Grenfell, 1849-1906) 죠지 그렌펠은 리빙스턴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의 사후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헌신했던 많은 영국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헨리 스탠리가 999일간의 탐험중에 발견했던 콩고강 유역에서 개척사역을 하였다. 그렌펠의 탐험가적인 개척사역은 여러 가지 성공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는 콩고에서 20년 동안 침례교 선교를 감독하면서 자신의 선교지역인 볼로보(Bolobo)에 큰 영적부흥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렌펠은 비록 서부로부터 동부를 잇는 선교기지를 건설하겠다는 애초의 그의 비젼을 벨기에 당국의 방해로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열병으로 소천하기까지 그의 개척사역을 성공적으로 계속해 나갔다.
알렉산더 멕케이 (Alexander Mackay, 1850-1890) 그렌펠과 침례교선교사들이 아프리카의 서부로부터 대륙으로 들어오는 동안 교회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 영국 국교회의 한 단체)는 대륙전체를 기독교 선교회의 기지들로 망을 짜놓겠다는 스탠리의 계획을 동부로부터 수행해 가고 있었다. 교회선교회가 아프리카 동부해안에 파송한 가장 유명한 선교사는 알렉산더 멕케이였다. 그는 1876년에 아프리카에 도착했는데 그 해는 그렌펠이 서부해안에 도착한 지 1년 반쯤 지난 때였다. 멕케이는 고등교육을 받은 스코트랜드인으로 본래 직업은 엔지니어였는데 특히 언어학과 신학에 해박한 만물박사였다. 그는 1876년 스탠리가 우간다 왕 므테사(Mtesa)가 선교사 파송을 요구한다는 강력한 선교적 도전을 주었을 때, 이에 대한 응답으로 교회선교회가 보낸 선교사 8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우간다에 도착한 그는 이후 우간다 교회성장의 초석을 놓았다.
죠나단 고포드 (Jonathan Goforth, 1859-1936)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 태어난 죠나단 고포드는 중국에서 주로 활동하며 한국과 만주에서도 사역하였고 가는 곳마다 놀라운 영적 부흥을 일으켰다. 중국에서의 사역 초기부터 고포드는 능력있는 전도자로 알려졌다. 중국인과 접촉하기 위한 고포드의 방식은 그 당시 선교사들의 방법과는 판이한 것으로 그는 기꺼이 사생활을 포기하고 가정을 개방하여 지역 주민들과 접촉하고 친구를 사귀는 수단으로 활용하자 몇 십리 밖에서도 손님들이 찾아왔으며 어떤 날에는 하루에 2,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몰려오기도 하였다. 20세기 초에 시작했던 고포드의 순회전도사역은 그가 1907년 한국을 방문하여 당시 온 한국교회를 휩쓸고 있던 부흥의 물결에 깊은 감동을 받고 나서부터였는데 그 후 계속된 부흥의 주춧돌이 되었다.
C.T. 스터드 (C.T. Studd, 1860-1931) 학생자원자 중에서 가장 명성이 높았던 사람은 아마 스터드일 것이다. 그는 모든 부와 특권을 기꺼이 포기하고 세계복음화의 과업 앞에 용기있게 마주서서 철저히 헌신한 학생 자원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캠브리지 대학생들, 이른바 “캠브리지 7인”이 중국내륙선교회의 선교사로 중국에 건너가 헌신한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당혹해 하였으며 한 신문기자는 ‘선교역사상 이렇게 머리 좋은 학생들이 한꺼번에 해외선교사로 나간 일은 없었다’고 쓰기도 하였다. 중국에서 10년정도 사역한 스터드는 그 후 학생자원운동(SVM)을 대표하여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강사로 활약하였는데 수천명의 학생들이 그의 집회에 모여들었고 수백명의 학생들이 해외선교사로 자원하였다. 그는 50세에 다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벨기에령 콩고에 들어가 18년간 선교사역을 하였다. 하지만 말년에 이르러 선교사들에 대한 엄격한 요구와 아프리카 기독교인들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시각, 그리고 그가 쓴 ‘D.C.D(Don’t Care a Damn : 비난에 개의치 말라)’라는 소책자가 큰 물의를 일으켰고 모르핀에 중독되었다는 소식 등으로 인해 면직처분을 받게 되었다. 갓 태어난 WEC은 스터드의 사후 사위 노만 그럽의 탁월한 지도력 하에 꾸준히 성장하여 수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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