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중심으로 살펴본 선교역사
윌프레드 그렌펠(Wilfred Grenfell, 1865-1940) 영국 체스터 태생으로 바다를 동경하며 자란 그렌펠은 런던에서 의학공부 중 무디의 부흥회에서 C.T. 스터드와 J.E.K. 스터드의 간증을 듣고 회심하였다. 왕립원양선교회에 소속되어 북미 라브라도 해안을 여행하며 생존을 위해 거친 환경과 싸우며 희망없이 살고 있는 그곳 주민들의 육적, 영적 갈급함에 도전을 받고 선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사역을 시작하였다. 헐값으로 주민들을 착취하는 상행위에 분개하여 협동조합을 만드는 등 지역사회에 깊이 간여함으로 상인들과 선교회간에 반목이 조성되었다. 라브라도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하기 위해 미국을 돌면서 설교하면서 그의 명성은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많은 젊은 남녀들이 그의 희생정신에 감동하여 라브라도 선교사역에 투신하였다. 라브라도의 빈민들에게 그는 성인 이상이었다. 그를 존경하는 한 사람은 “윌프레드 그렌펠이 문의 역할을 했다면 그 문을 통해 예수께서 오셨다고 생각합니다” 고 하였다.
죤 모트 (John R. Mott, 1865-1955) 죤 모트는 평신도였고 엄격한 실제 선교사로 일했던 적은 없지만 선교사역에 그가 미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무디의 후원으로 헐몬산에서 열렸던 첫 번째 기독학생수련회에서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면 어느 곳이든 선교사로 가겠다’는 프린스턴서약에 서명한 헐몬산의 100인중 하나가 되었고 후에 이 모임은 학생자원운동(SVM)으로 발전되었고 모트는 30년 이상 이 모임을 이끌었다. 그는 또한 YWMC에서 40년간 활동하면서 전세계의 선교사와 각국의 학생들과 함께 사역하였다. 모트의 가장 큰 공적은 그가 제창하고 주도하여 1910년에 열린 에딘버그선교대회로 이 10일간의 회의는 1,355명의 대표들이 참석한 최초의 초교파적이고 국제적인 선교사 연합회였으며 그 뒤 수십년동안 교회연합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에이미 카마이클 (Amy Carmichael, 1867-1951) 인도에서 55년간 사역하며 활동사항들을 자세하게 적어놓은 35권의 저서를 남긴 에이미 카마이클은 영국의 모든 개신교 여선교사를 대표할 만한 인물이었다. 케직운동의 열매인 그녀는 24세의 나이로 일본으로 떠났다가 후에 남인도에 정착하였다. 인도 도나버에서 사원의 창녀로 팔려간 아동들을 위한 사역에 일생동안 헌신하였는데 이 아동들의 존재는 선교사들까지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폐습을 타파하려는 인도의 개혁자들의 도움도 받으면서 에이미는 고집스레 이 사역을 계속해 그 후 수십 년 동안 수백명의 아이들이 구출되어 도나버에서 양육받았다. 그녀가 만들었다고 알려진 도나버공동체는 모든 사역자들이 인도 옷을 입고 인도식으로 이름을 지었으며 외국에서 온 사역자들과 인도의 사역자들은 모두 모여 공동생활을 하였다.
사무엘 즈윔머 (Samuel Zwemer, 1867-1952) 13세기의 레이몬드 룰 이후 회교권은 보다 열매를 쉽게 맺을 수 있는 지역 때문에 무시되어왔다. 영국성공회가 1860년대에 이 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할 때 교단의 도움 없이 선교를 시작한 이가 학생자원자인 사무엘 즈윔머였다. 그는 호프대학 재학중 헐몬산의 100인을 감동시킨 로버트 윌더의 설교를 듣고 선교사로 자원하였다. 회교지역으로의 파송을 희망했지만 선교부로부터 거절당한 즈윔머는 친구 제임스 켄틴과 함께 미국아랍선교회을 조직하여 아라비아선교를 시작하였다. 카이로에서 열린 회교권선교사총회의 초대의장이었고 미국에서는 학자원운동의 순회강사 사역을 통해 많은 학생들이 해외선교에 헌신하게 하였다. 비록 그의 사역으로 인한 개종자는 적었지만 회교권 사람들에게 꼭 복음을 전해야만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새롭게 일깨웠다.
로버트 스피어 (Robert E. Speer, 1867-1947) ‘학생자원운동(SVM) 정신의 구현자’라고
불렸던 로버트 스피어는 역시 SVM의 중추였던 죤 모트와 일생 내내 두터운 우정을 유지하
였고 모트처럼 평신도로서 해외선교운동에 헌신하였다. 프린스턴을 졸업한 그는 SVM의 순회서기가 되어 1년동안 천명 이상의 해외선교자원자들을 모집하였다. 선교사로 나가려고 준비하는 중 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선교부의 최고 행정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해왔다. 수많은 학생들을 선교사로 보내고 자신은 본국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아 번민했지만 핵심자리에서 해외선교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 수락하여 70세까지 46년간 사역하였다. 은퇴후에도 여러 대학과 집회에서 강연하며 해외선교를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아이다 스커더 (Ida Scudder, 1870-1952)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의료선교사 가문인 스커더 집안의 첫째 선교사였던 죤 스커더의 막내아들인 죤의 딸이 아이다 스커더로 그녀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인도에서 사역하였고 그녀도 인도에서 태어났다. 미국에 와서 코넬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마지못해 가문의 전통을 따라 인도의 의료선교사가 된 아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커더 가문 누구보다도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처음 조그만 방에서 몇 명 안되는 환자들을 데리고 시작하여 100명의 의사에 484개의 병상을 갖춘 종합병원과 60개의 병상을 갖춘 안과병원을 가진 현대적 의료단지를 이룩해 내었다. 또한 많은 이동진료소에서 20만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하며 매년 200명의 학생들을 배출하였다. 그녀가 얼마나 유명했던지 겉봉에 ‘인도, 아이다박사’라고만 써도 그녀에게 정확히 편지가 전달되었다.
롤랜드 빙햄 (Roland Bingham, 1872-1942) 젊은 캐나다 청년인 월터 고원즈(Walter Gowans)에 의해 설립된 수단내륙선교회(Sudan Inland Mission: SIM)를 이어 받은 롤랜드 빙햄의 끈질긴 집념으로 SIM은 기독교 역사상 아프리카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선교회가 되었다. 빙햄은 수차례 아프리카를 향해 떠났으나 말라리아로 인해 사역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고 동역한 사역자들도 죽거나 병으로 사역을 중단하였다. 굴하지 않고 빙햄은 세 번째 시도로 아프리카의 파티키에 본부를 두고 꾸준히 사역하였고 특히 나병퇴치사역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SIM의 사역범위는 넓어져 이디오피아에 교회를 세우게 됨으로 아프리카에 헌신한 그의 삶은 절정을 이루었다.
머드 캐리 (Maude Cary, 1878-0000) 20세기 초는 여성 선교사들의 수가 남성과 비슷하거나 많게 되었으며 어떤 지역에서는 여성 선교사가 없었더라면 선교사역이 사실상 와해될 뻔하였다. 그런 실례가 모로코에서 활동한 복음선교사연합(Gospel Missionary Union)에서 있었다. 복음선교사연합은 모로코에서 사역하고 있는 5개 선교단체 중 하나였는데 1894년 이래 회교도들에게 복음으로 접근하기 위해 분투중이었다. 그러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교의 높은 벽을 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졌으며 낙심된 마음과 풍토병이 선교사역에 손상을 가져왔다. 선교기지를 폐쇄하고 다른 곳에 집중하자는 사실 논리적인 해결방안이었다. 오직 그중에서 머드 캐리라는 독신 여성 선교사만이 끝까지 남아 아무리 두드려도 반응이 없는 그 암울한 기간 동안 좀처럼 보기 힘든 탁월한 능력으로 사역하였다.
스탠리 죤스 (E. Stanley Jones, 1884-1973) 애즈베리대학 재학중 학생자원자가 된 스탠리 죤스는 감리교선교부로부터 인도로 파송받아 인도의 지식인들을 위해 일하는 선교사 중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그의 설교 초점은 그리스도였지 기독교가 아니었다. 서구선교사들이 인도에 들여온 것 역시 기독교였지 그리스도가 아니였으며 죤스는 만약 인도의 지식인들이 서구문명의 옷이 제거된 그리스도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리라고 믿었다. 복음전도자와 기독교 지도자로서 죤스의 명성이 높아져 인도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존경을 받았고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도 그의 친구였는데 비록 기독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지극히 존경하였다. 세계복음화에 대한 죤스의 사상은 그의 저서 ‘인도로 향하는 길의 그리스도(The Christ of the Indian Road)’라는 책에 잘 나와있다. 그 책은 20세기 선교사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
죠안나 빈스트라 (Johanna Veenstra, 1894-1933) 미국 뉴저지 패터슨 태생의 죠안나 빈스트라는 여러 가지 점에서 20세기에 자신의 몸을 드려 선교사로 헌신했던 수많은 독신 여성 선교사들을 대표한 표본이었다. 수단연합선교회(Sudan United Mission)에 지원하여 루페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청년들을 복음전도자로 훈련시키는 기숙사가 학교를 세워 많은 학생을 배출하였고 틈틈히 시간을 내어 복음사역과 의료봉사를 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녀의 기숙사 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특권으로 여겼고 특히 그녀의 의료사역은 큰 인기를 끌었다.
윌리암 캐머론 타운센드 (William Cameron Townsend, 1896-1982) 20세기 성경번역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이는 WBT/SIL의 설립자 윌라암 캐머론 타운센드로 빌리 그래함은 그를 “우리 시대 최고의 선교사”라고 극찬하였고, 미국선교센터의 랠프 윈터는 그가 지난 2세기 동안 윌리엄 캐리나 허드슨 테일러와 견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3인의 선교사 중의 한 사람이라고 찬양하였다. 캠은 로스앤젤스에 있는 옥시덴탈대학 2학년대 SVM(학생자원운동)에 가입하고 후에 죤 모트의 설교에 도전을 받고 선교사로 헌신할 결심을 굳혔다. 1917년 과테말라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한 캠은 그가 맡고 있던 지역의 칵키퀼 인디언들이 그들의 언어로 된 성경이 없다는 것과 한 인디언이 ‘당신네 신이 그렇게 똑똑하다면서 우리말도 모릅니까?’라는 말에 큰 도전을 받고 성경번역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후 캠은 알칸사스에서 위클리프캠프를 설립하였고 곧 개신교 선교회 중에서 두각을 나타나게 되었다. 그 후 캠은 성경번역사역에 온 일생을 투신하였는데 그것은 어떤 것보다도 성경에 대한 확신과 믿음 때문이었다. “가장 훌륭한 선교사는 선교지 원주민의 언어로 쓰여진 성경이다. 성경은 선교사들처럼 안식년도 필요없고 외국인이라고 배척받는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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