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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초기의 교회여성 - 2. 일반교회 여성 (조직활동1.)

Joyfule 2007. 2. 8. 00:43

3) 조직활동

(1) 조직과정


교회여성들은 성경반이나 사경회, 또는 개교회의 모임 등을 통해서 여성들만의 조직을 만들어 일을 하기 시작한다. 이 일 속에서 우리는 교회여성들의 의식의 내용,의식의 수준들을 고찰할 수가 있을 것이다. 교회여성들의 조직은 비교적 초기부터 눈에 띈다. 1901년 [신학월보]지에는 보호여회의 설립 동기와 그 운영하는 일 등을 적어놓고 있다.

 

"황셩대졍동교우들이 풍문두른즉 그곳 목소 아편셜라씨가 고국에 들어가신다 하되 무엇으로우리가 사랑하는 졍을 표하리오... 하로는 황씨부인이 여러 교우들을 디하여 말슴하시되...각기 추렴을 내어 유긔반샹을 사드리는 거시 우리 나라소산이요...이 물건이 됴키는 됴커니와 우리 녀교우 사진이 잇스면 비록 멀리가시드라도 우리를 보실터이요...미일명이 십젼식내여 사진갑술주고 남은 지젼이 일원십젼이라.. 황씨부인이 말슴하시기를 우릭 션사하랴고 거둔돈으로 지졍을 솜고 한회를 모흐되 이회는 특이 우리 녀교육우ㅈ 빈한간쟈를 돕자하고 설명하신즉...그러나 싱각이 멀리밋치지못하여의론이 분분하더니... 황씨부인께서 다시 말슴하시기를...빈궁한 여러교우들을 구제하여 그들도 하야곰깃부게하는거시 엇지아람답지아니하리오한즉 링회ㅈ이 다션타하시니...긔도후 즉시 회를 셜시하엿는디 그회 일흠은 미이미감리교보호녀회라하고 회쟝은 황씨부인으로 션뎡하고 쓸비여노씨부인은 인제국쟝으로셩뎡하고,쿠레스문부인과 울누시됴부인양씨는 셔귀로션뎡하고 마터김씨부인은 회게로 셩뎡되었고 그때참셕하신회우를 수효하ㄴ는이십팔명이 되엿고 기회는 일삭에 한번식하기로작뎡하엿더라. 회원들직무는 여좌하오니 미삭하번식모혀 시무회를 보는디 교ㅈ에 문병과 회당에 즈죠출입지아니함을 상고하야 초자보고 힘디로교인과 외인들을 권면하야 어려운 교우병든자와 가련한쳐디된쟈를 도아주고 상소하는때 부죠와장례참례케하며 혹교우가낙향하야 례비에 참례케하기를 힘쓰고 지졍은미삭월연젼을 즉긔힘대로하는디 그돈으로 모든교ㅈ부비로쓰기로 작뎡하엿시며 쥬일수젼은젼도인월급으로쓰고 그동안 모히기는 륙칠번되엇고 거둔돈의 함수는 모도이이십칠원이이십삼젼사리요...보호녀회 이글을 져술한 사람은 교우ㅈ하나이로쇼이다.129)

 

즉 회원들 각자가 자기 힘 닿는대로 돈을 모아 가난한 교우들을 돕고 교인들의 친교에 힘써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하라는 목적하에서 조직된 것을 볼 수 있다. 1916년에 들어오면서부터 이 보호녀회라는 명칭은 "여선고회"로 바뀌었는데 이 회는 1930년대까지만 해도 교회에 따라서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회는 개교회의 조직에 그쳤을 뿐 더 나가지는 못했다.130) 그러다가 몇몇 전도부인과 지방여선교사들이 모여서 연합적으로 사업을 해보자는 것이 거론되었다. 이렇게 해서 1924년 9월 15일에 각 지방대표들이 이화학교에 모여서 연합총회를 가졌다. 이것이 북감리교회에 속한 한국인 여성들이 조직한 여선교회의 첫번 연합모임이었다.131)

 

남감리교회의 경우 1908년 1월 16일 오후 2시 개성성경학원에서 보호여회와 같은 십자회라고 하는 모임이 결성되었다. 개성에서 회를 조직한지 5년만인 1913년에는 앞서 조직된 것보다 훨씬 발전된 여선교회의 조직이 결성되었는데 그 동기는 원산의 보혜성경학원에서 싹텄다. 이 회의 목적은 원산지방 내에 주를 알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가 없는 곳에는 전도부인을 파송하는 선교사업을 하고자함이었다. 이를 위해서 전도부인들은 매월 자기월급에서 20분의 1씩 헌금하고 다른 회원들도 의무적으로 30전씩을 내어 이 사업을 운영하여 나갔다.132)

 

1920년에 비로소 여선교회는 전국여선교회 연합기구를 탄생시켰다. 개성,춘천,경성,원산 등 4지방이 연합해서 대회를 열고 창립총회를 가지므로 전국연합회는 발족되었다. 장소는 종교예배당이었으며, 모인회원은 모두 82인이었다.133) 장로교회의 경우에는 1898년 최초로 널다리꼴 교회의 여신도들에 의해서 여전도회가 조직되었다.

1898년(무무(戊戊))춘에 평양부 판동교회여도 이신행,신반석,박관선,김성신등의 발기로 전도회를 창설하니 시내(是乃) 부인전도의 기원이러라.134)

 

이렇게 개교회에서 부인전도회를 조직한 상황을 보면

"부인젼도회.평양 남산현 목ㅅ 현셕칠씨의 통신을 거한즉 5년전에 하회당 늬 밋는 부인 십인이 발긔하야 부인젼도회를 조직하엇스니 이회는 쥬를 위하야 일할 목뎍으로 시작하엿는디 미월 일차식 모힐때마다 뎡회회금 십젼식을 귀취하여 발긔하 회원들이 열심으로 다른 부인들의게 권면하야 지금은 회원이 삼십오인인에 달하였는디 이 회원들도 말하면 가세가 다 넉낙한 것이 아니로디 결용졀식함으로 5년동안 미삭십젼식 모흔 것이 지금은 이백여환이 된지라. 그 회원ㅈ에 가감하고 데일 열심잇는 부인 1인을 전도인으로 탁하여 혐금 젼도하니 이 일을 싱각하면 부인의 경영하는 일이 도로혀 남즈보다 승하다 할 수 잇도다 이회는 유지하여 쥬의 큰 사업을 일우기를 원한다."135)

 

평양이나 선천,의주 양시 지방에서는 여전도회가 개교회별로 조직될 뿐 아니라 몇 지회씩 연합한 지방연회를 이루기 시작하였는데 이를테면 평양지방연합회 같은 것은 1908년에 교회여전도회가 연합하여 연합회를 만들고 1년에 네번씩 모여 각 지회가 활동한 상황을 보고하며 보다 나은 것을 위해 토의하고 계획할 뿐 아니라 두 여전도사를 평양 부근에 파송하는 등 이미 연합운동을 시작한 예를 볼 수 있다.136) 이러한 연합운동에 대해 마가렛 베스트(Margaret Best)여사는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평양의 다섯장로교회가 연합하여 조직된 한국여선교회(Korean Woman's Missionary Society)는...1908년 1월에 조직되었으며,15명의 한국여성들과 2명의 외국선교사들로 구성된 감찰회(Session)에서 의해서 매해 지명되는 중앙위원회의 지도하에 회를 운영해 나간다. 모임은 일년에 네번 열린다. 복음전도 위원회는 회에서 고용한 여성들의 순회를 계획하며 매월 설교여행을 보낸다. 재정위원회는 다섯 교회 여성들에게서 기부금을 걷는다. 또한 모든 여성들의 관심을 유지하기 위해서 중앙위원회 후에는 언제나 월요일 오후에 전체회의를 개최한다. 장소는 다섯 교회 중 한 교회에서 모이며 모든 여성들이 초대된다. 이 모임에서는 회의 재정 상황과 전도사업이 보고되며... 회에서 고용된 여성들은 종종 그들의 일에 대해서 보고한다. 이 회에 참석한 여성들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대단한 흥미를 가지고 듣는다."137)

 

이렇게 지방별로 연합모임을 가지다가 전국적인 연합회가 발족된 것은 1927년이다. 1926년 제15회 예수교장로교 총회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모였을 때 거기에 참석한 여전도회 회원들이 의견을 모아 1927년에는 발기총회를 갖기로 결의하고 지방으로 흩어졌었다.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 지 총회가 예수교장로교 총회가 시작된지 16년만에 비로소 전국여전도회 총회가 발족된 것이다.138)

 

장로교에서 개교회 여전도회는 먼저 조사하였지만 전국연합회는 감리교보다 약 3년 늦게 결성되었다. 선교 초기부터 장로교는 감리교에 비해서 여성을 위한 활동이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스토크스박사(C.D. Stokes)는 감리교선교부가 장로교보다 더 많은 여선교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더 많은 부녀사업을 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정책의 차이라고 말한다.139) 이러한 선교정책 때문에 장로교에 비해서 감리교에 속한 여성들은 여러 측면에서 빠른 성장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교회여성들의 연합조직이라 해서 한국 교회여성들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이 조직에 외국선교사들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고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한국의 교회여성들이 하나가 도어서 함께 일하는 훈련을 쌓아가는 동안,그들에게 자신감을 주었을 것이며, 이러한 경험은 주체적으로 생각하고,결정할 수 있는 독립된 인격이라는 것을 실감케 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