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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초기의 교회여성 - 3. 교회 내에서의 지위 1.

Joyfule 2007. 2. 10. 01:30

3. 교회 내에서의 지위

 

이러한 교회 여성들은 옛날 할머니들 세대와는 너무나 다른 여성들이다. 이제까지 집안에만 박혀 있던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관계를 가지고 일을 하게 되자 사회의 시선은 온통 그녀들에게로 쏠렸다. 이제 이 여성들은 기독교의 복음과 서구문명의 깃발을 든 신여성들로 부각되었다. 그녀들의 복장, 머리스타일, 사생활 모든 것이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예를 들어 전도부인들은 우리나라 여자의복의 변천에 하나의 계기를 가져왔다고 한다. 즉 서양여자의 간편한 옷을 본따 짧아지기만 하던 저고리를 길게 하고 길기만 하던 치마를 짧게하여 외출과 활동에 편하도록 개량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긴 저고리에 짧은 치마를 입고 마실을 다니는 기독교 전도부인의 옷차림을 보고 모도들 한편 놀라며 한편 신기하게 생각했던 것이다.154)

 

우리나라 최초의 단발처녀인 김귀동 역시 16세의 소녀로서 열성적으로 교회에 나오는 이화학당 학생이었다고 한다. 김귀동이 단발을 한 것은 건양 원년 즉 1890년 고종황제가 단발령을 내리고 시범을 보이던 3년전이었고, 그녀는 머리를 잘라서 다리(月子)를 만들어서 팔아 그 전액을 정동예배당의 신축기금에 바쳤다고 한다.155) 물론 이러한 신여성들의 복장이 과연 그 시대 그 상황에서 타당성이 있었는가 하는 것은 문제로 제기되기도 하였다. 신여성들 중에서 일부는 그들의 복장이 대중 여성들과 유리되어서 그들에게 거리감을 준다는 이유에서 대중여성들과 같은 복장,머리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사회적인 활동을 해야 했던 여성들에게는 편안하고 활동적인, 간편한 옷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인 변화가 내적으로도 충실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는가 하면,그렇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한국의 전통적인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켰다고 자부하고 있는 기독교 교회 내의 제도를 살펴보아도 남,녀가 동등하게 일할 수 있는 자격이 제도적으로 거부되고 있다. 여성들을 가정 밖으로 끌어내오는 역할을 하였을 뿐, 가사 노동의 연장선상에서 할 수 있는 일만 주어졌다. 여성들은 목사도 될 수 없고 장로도 될 수 없어서 지도적인 직분은 남성만의 아성으로 고수되었다. 감리교의 김인영목사는 여성의 영역은 어디까지나 가정임을 주장한다.

 

"현금(現今)조선사회의 가정에 중요인물은 즉 부인이라 연이나 근일부녀사회는 윤리와 덕교가 점박하야 기능율과 인격에 불의하고 다수는 외조주의를 구가하는도다. 이상의 주의가 극렬한 즉 자기의 향락주의로 귀하며 기미모의 쇠함은 기향락을 방해하는 거스로 사하야 차를 기피하는 방법으로 결국은 남성화를 하려 하도다. 차는 천도의 역리요 인류사회의 질서를 문란케하는 거시라 연즉 가정은 부인의 영토라..."156)

 

여성의 영역이 어디까지나 가정임을 주장하는 견해는 그 당시 기독교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신가정]지에 실린 "내가 만일 여성운동가라면?" 에 답한 채필근 목사의 경우에도,자신이 여성운동가에게 바라는 것은 문맹퇴치와 가정교육개량에 정성을 다해달라는 것이다.즉 "동리에서 여자끼리 무슨 회를 조직하야 가지고 우리글을 알고 위생과 가정상식과 육아법 같은 것을 아는 이가 인도하고 모든 녀자들이 배우게 할 것"이라는 것이다.157)

 

따라서 가정 밖에 나와 활동하는 교회 여성들의 임무도 가사노동과 유사한 성격의 일을 강조하게 된다. 교회에서 여성들은 목사의 보조자요 신도들의 어머니같은 뒷치다꺼리하는 여성들이지 중요한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여성들이 아니다.

 

기독교의 온건한 여성문제의식은 이 시기에 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화는 결코 남성 교역자들,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교회 여성들은 자신들의 지위향상은 남성들의 온정적인,그러나 분명히 한계가 있는 도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힘으로 쟁취해야 하는 것임을 어쩔 수 없이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남자들로만 이루어지는 것도 그들에 의해서만 관리되어지는 것도 아님을 인식하게 되고, 교회에서나 이 세상에서 남녀 모두 함께 협력해서 일해주기를 하나님은 바라신다고 믿게 되었다. 긍시 [동아일보]의 기사를 보면, 이미 1920년대 여전도사들은 남성교역자와 불평등한 임금을 조정해 달라는 항의를 하기도 했는데 1933년 장로교 총회에서 여성들은 다음과 같은 요구를 했다.

 

"[선천]지난 12일밤 8시 선천에 개최중인 전조선예수교장로교 제이십이회 총회에서는 여자도 남자와 같은 평등적 지위로 수준을 높여 교회의 사업에 참가하겠다는 문제가 나타났다. 이번 참가자도 회중의 일팔인 한남로회의 보고중 동지방 부인교도 일백 오십여명의 련서로 여자에게 장로의 자격을 부여하라는 요구가 잇었으나 동로회는 이를 부결하얏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리고 이번 동총회에서는 여자에게도 목사의 자격을 부여하라는 요구 즉 여자의 참정권 전제가 상정되거라하야 크게 주목된다고 한다."158)

 

이 요구는 거절되었으나 또다시 그 다음해에도 이 문제를 상정시켰고 그후 계속해서 이를 요구했다.

 

"[함흥] 함흥부 최영혜의 함남예수교장로회 이십이교회의 여성 육백 삼십구명은 지난 이십이일 함흥에서 모인 장로회 제십오회 한남로회에서 여자들에게도 교회치리하는 권리를 부여하여 달라는 청원을 연서제출하였다는데 금번이 제2회째라 한다.... 회원중에서 작년 총회에서 헌법문제로 이미 퇴각된 것인즉 다시 제출할지라도 역시 불능하리라는 이유로 퇴각되었다는데 본 운동의 웅장 최영혜 외 제씨는 이 운동이 성공될 때까지 꾸준히 노력할 계획이라 한다."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