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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초기의 교회여성 - 2. 일반교회 여성 (조직활동2.)

Joyfule 2007. 2. 9. 00:34

(2) 사업

 

 


개체교회 여전도회는 전국적인 연합 전도회이든 중요한 사업은 주로 전도사업이었다. 예를 들어 부인전도회는 축호전도를 직접 다니고 전도지와 쪽복음을 나눠주기도 하였으며 돈을 모아 전도인을 고용하여 일하게 하기도 하였다.140) 이들은 전도활동 등 그들의 사업을 위해 날연보제도나 성미운동을 벌여 재정을 충당했다고 한다. 날연보제도는 돈으로 헌금을 한 사람이나 돈이 없어못한 사람이 나를 막론하고 전도를 위해 일주일 중 하루나 한달의 몇일을 바쳐서 직접 전도에 참여케 하는 제도이다.141) 또한 여전도회는 전도사업의 일환으로 전도강연회를 열기도 하였다.

 

예를들어 남대문교회 부인전도회에서는 1922년 4월 28일 하오 8시부터 부인강연회를 열었는데 연제는 "이혼이 可하냐 否하나"이란 제목으로 손메리씨의 강연이 있었다.142) 또한 1928년 강서군 초리면 외촌교회 부인 전도회에서는 송호리 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최자혜씨와 한경실씨를 강사로 청하여 전도강연회를 개최하였는데 그 연제는 "오(吾)의 미국에서 시찰한 감상"과 "인생의 고난의 의미"였으며 평북 삭주 대관구역 부인전도회는 일본 황빈학교 출신인 홍석주 여사를 청하여 강연한 결과 결신자 수십 명을 얻었다고 한다.143) 이를 보면 전도사업은 단순히 성경적인 지식 외에 신생활에 대한 계몽을 하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국내전도 이외에도 외지전도에 대한 열의가 초창기부터 강했다. 외지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에 대해서 [매일신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요사이 평양녀가 기독교신자들ㅈ에서는 평남녀교역ㅈ 하령회를 진남포옥천대에서 기최하고 션교에 대한 방칙을 의론한 만쥬광야에서 홋허잇는 슈십만의 불상한 동포를 위하여 그들의 암흑에 방황하는 령혼을 구원키 위하는 녀선교사 한명을 파견하기로 하엿다는데 파견한 녀자에 대하여는 되도록 보통 상식이 풍부한 우에 기독교에 대한 쇼양이 깁흔이로 탁흘터이라하며 경비에 대하야는 평안남도의 녀신도들이 일기월 미인 십젼식을 니여 쓸터이라는데 파견 시일을 아직 확덩치는 못하엿스나 금월 ㅈㅅ경에 될듯하다고 모녀사는 말하더라."144)

 

이러한 외지전도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은 받은 것을 다시 나누어 준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1913년 12월 20일 원산항교회에서 김한나 씨를 중심으로 전도부인과 여신도를 합쳐 11명이 모여 우리는 미국 선교사에게서 선교를 받아 구원을 얻게 되었으니 우리도 나아가서 선교해야 한다고 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3명의 전도부인이 저들의 월급에서 20분의 1을 여선교회에 성금하기로 하고 매달 3전씩을 내어 1년에 72원이라는 선교비가 마련되었다고 한다.145)

 

물론 초창기의 선교사업은 다른 민족, 다른 나라 사람에게 손이 미치지 못하였고 주로 외지에 사는 동포를 찾아 전도하는 것이었다. 1930년 북감리교 여선교회의 총회록에는 할빈지방과 만주지방에서 전도하는 전도 부인들의 보고나 나와 있다. 이매련 전도사의 보고를 보면 우선 그곳에 사는 조선인의 형편을 보고하고 있다. 즉 그곳 사람들은 본국을 떠나온지 오래되는 사람들이라 조선이 어떠한지 알지 못하고 말까지 서투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조선인들이라 하여 거처를 잘 주지 않으므로 고생을 하고 있고 자신도 온지 얼마되지 않아 6,7번째 이사하여야 할 형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내지에서보다 더 경제의 곤란을 당하여 흔히 아편을 영업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곳 교회는 7,800명이 모이는데 조선에서 진실하게 믿고 교회 직원까지 되었던 사람들도 이곳에 와서는 아편장사에 종사함으로 교회는 무력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은 월요일은 집에 있으며 화요일과 목요일은 믿지 않는집에 놀러가며 수요일과 토요일은 믿는 집을 심방하고 금요일은 특별히 병자들을 방문하고 때를 따라 일하게 된다146) 고 보고하고 있다.

 

외지에 있는 교포를 상대로 하는 외지선교 역시 외국인들에게 하는 선교만큼이나 많은,철저한 준비작업을 해야 하는 사업임을 위 보고서에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제주선교를 위해서 총회에서 파송된 이기풍 목사가 제일 심하게 당한 곤란은 언어의 장벽이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하나의 독립국,탐라국임을 자처해 온 제주도로서는 외지인을 그렇게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인데 더더구나 언어를 잘 모르는 이 목사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언어와 풍속에 익숙치 않은 이 목사가 무심코 한 일이 박해를 유발하기도 하였다. 즉 제조도의 진기한 풍속을 대여섯 가지 적어서 인편으로 평양에 보낸 것이 신문에 보도되자 이 목사는 제주도를 업신여긴 놈이라 하여 제주도 청년들에게 곤욕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아마도 여전도회에서 파송한 전도부인 이선광 역시 그러한 곤욕을 치루었을 것이다.147) 여선교사 달마지(Eliza E. Talmage)는 제주를 방문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이곳에서의 전도사업은 외국선교사들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평양의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7명중의 하나가 이 섬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300명의 여성들이 출석한 이 섬의 가장 큰 교회에서... 이 섬에서 여성들이 생계를 유지하는 대부분의 일을 하기 때문에 성서연구를 할 수 있는 시간을 거의 낼 수 없다. 그 여성들은 대부분의 다른 한국 여서들보다 아주 정열적이고 근면하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성서연구에 대한 진실한 관심을 유발할 수만 있다면,그들은 아주 정열적으로 할 것이다."148)

 

그러나 육지에 사는 여성들보다 제주도의 여성들은 훨씬 더 독립적이고 적극적인데,이들은 상대로 한 선교는 그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외지에 사는 동포들에 대한 전도가 이렇게 어려운데 하물며 외국인 대상의 전도는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비록 초창기이라 외국인 대상의 선교활동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꿈은 땅끝가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꿈에 비해서 신학적 기반이나 준비는 소홀한 것이었고,또한 국내에서도 전도할 곳은 많았던 당시의 사정으로 미루어 보아 가까운 곳의 아픔은 돌보지 않고 먼 곳을 찾는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전도사업이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남북감리교 여선교회는 남감리교 여선교부의 선교정책 변화에 힘입어 보다 사회적인 관심을 가진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즉 이전에 그들이 보여준 선교는 대체로 선교사들이 지역을 순행하면서 성경반을 만들어 여성들에게 성경지식을 보급하는 한편, 기독교인들의 교회새활을 지도하는 것을 중요 선교과제로 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선교사업을 외국선교사들에게만 의존하는 시대는 지나갔고 또 성경반 위주의 선교나 가정방문 및 개별접촉의 선교방식만을 고수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다각적인 선교를 모색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남감리교 여선교부는 다각적 선교정책을 시행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선교부가 추진한 일은 4개 지방, 즉 원산,서울,송도, 춘천 지방에 지방별로 센터를 만들고 여기서 여성을 위한 여러가지 사업을 했다.

예를들어 서울의 사회복음센터(Social Evangelical Center)에서는 교육부(Education),어린이 공중위생부 (Child Public Welfare),사회사업부(Social Service),선교부(Evangelist)등 4개 부서를 두고 사업을 했다. 이러한 정책변화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요구에 기민하게 대응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149)

 

이러한 선교정책에 따른 사업들을 남북 여선교회도 다함께 힘을 써서 하였다. 우선 북감리여선교회의 사업을 보면 영변지방의 유치원사업,공주시의 공중위생 및 아동복지센터를 하였는데,후자 안에는 얘기 진료실(Baby cli- nic),임산부의 건강관리,밀크 스테이션, 간호학교,직업재훈련과정 등의 사업을 하였다. 이렇게 북감리교 여선교회가 주로 의료 및 교육사업에 힘쓴 데 비해150) 남감리교 여선교회는 주로 여성 및 아동을 위한 사회복지에 많은 비중과 관심을 쏟았다. 남감리회 여선교회는 원산 보혜여자관,서울 태화여자관,개성 고려여자관을 운영하였다.151)

 

1926년 9월에 준공된 보혜여자관은 성경공부 외에 야학을 비롯해서 영어,재봉,윤리 등을 전문적으로 가르쳤으며 영아부를 위해서는 따로 휴양부까지 두어 일반 아동복지사업에도 공헌하였다. 태화여자관은 초대관장에 마의시(Miss Muyers)양이 수고하였고 규중부녀들을 예수께 인도하려는 것이 설립목적이었다. 사업은 가사에 관한 것,지적 훈련, 영적 훈련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종교사업,계몽사업,주간보육사업,사회사업을 하였다.

 

종교사업은 부녀자들과 청년여성들을 중심으로 하여 1주 2-3회씩 모여 일어,영어,성겨을 가지고 공부하는 성서연구가 주된 것이었다. 의료사업은 아동진료소가 개설되었고,심방과 위생교수,소아건강 진찰자모회와 어린이 무료 목욕을 하였다. 주간보육사업으로 주로 유치원사업이 중심이 되었고 통학 부녀자들의 영아를 맡아주는 탁아사업을 실시하였다. 사회사업은 주로 요리강습,재봉실습,주택개량,등과 같은 가정복지와 관련이 깊은 것들이었다. 교육사업으로는 15세에서 40세까지의 규중부녀들을 가르치는 야학부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1922년 5월에 시작된 개성 고려여자관 역시 전도사업 외에 교육 및 사회사업을 하였다.152) 1930년 6월 3일에 통합된 통합여선교회의 활동역시 이와 같은 입장에서 일을 진행해 나갔다. 통합여선교회 제7회 대회록을 보면 소년사업위원,청년사업위원,서적사업위원,영적사업위원,사회사업위원,재정위원 등 여섯 부서로 나뉘어 위원회가 조직되어 있다.

 

그중 사회사업위원회의 임무를 보면 색의 장려,절제회 가입, 선물 남용 폐지,혼상범절에 절약, 금주단연,우환질고를 당한 가정을 방문, 미신타파,농촌에 부인구락부 조직 등을 권고하고 장려하는 임무였다. 부인구락부는 계절(여름,겨울) 강습회를 열어 육아법,편물, 재봉,요리 등의 강습을 실시하였다.153) 이러한 교회여성들의 조직활동이 그 당시 사회가 안고 있던 많은 문제를,또는 여성들이 안고 있던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에 대한 의식을 가지게 했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는 데서 그 의미는 크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