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입맛대로 재단하지 말라
신상래 목사
엊그제 필자의 칼럼에 댓글을 달아 자신의 교회의 목사가 한 말과 대치된다면서 고민을 토로한 회원이 있었다.
이처럼 교회에 왜곡된 성경해석이 뿌리 깊다. 성경말씀을 나름대로 해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비성경적인 해석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양 왜곡해서 아전인수식으로 갖다 붙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는 자신의 견해에 따르지 않으면 이단으로 몰아붙인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평신도들은 성경적인 해석을 구분할만한 성경지식도, 깨달음도 없기에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한 말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멘하고 받아들인다. 예수님은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냐고 말씀하셨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지도자가 맹인인지 아닌지는 스스로 판단해서 따라야 하는데, 아무런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따르다가 영혼이 파멸에 이르러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그래서 필자의 칼럼에 댓글을 단 회원의 말을 여기에 옮겨보겠다. ‘제가 섬기는 교회의 담임목사님은 막 16:17~18절의 믿는 자들의 표적 중에서 뱀을 집을 수 있는 능력과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 능력은 사도들에게 주는, 일종의 신임장 같은 것이므로, 이 능력과 이 은사들은 사도시대에 지나갔고, 지금의 교회 시대는 없어졌다고 설교합니다. 위필드, 크리소스슴, 어거스틴 등도 그렇게 주장했다고 하면서 ... 그리고 새 방언으로 말하는 능력과 독을 마셔도 아무렇지도 않은 능력은 복음서에 결코 언급된 적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그리도 사도시대와 교회시대의 신유의 능력의 차이가 있다고 하시면서 사도시대에는 모두 치료되었으나, 교회시대에는 치료되는 자도 있고 안 되는 자도 있고 사도시대에는 재발하지 않았으나 교회시대에는 재발할 수도 있고, 사도시대에는 당장 완치되나 교회시대에는 그렇지 못하고 ... 아무튼 오늘날의 성령의 역사가 사도시대 때와 같은 내용의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해 조언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 말을 한 목사는 사도시대의 은사는 이미 AD 2세기에 끝났다는 신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설명하고 있다. 예전에 필자가 귀신들 쫒아준 자매에게, 오랫동안 귀신에게 시달렸으니 이제부터는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를 해야 그들이 다시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겠다고 약속해서 다시 필자의 교회에 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돌아온 새벽에 작은아버지와 어머니가 교통사고가 나서 다시 오겠다고 해서 급히 되돌아가버렸다. 그러자 성령께서 그 자매에게 귀신이 다시 들어오고 있다고 하셨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 자매는 필자에게 전화와 문자로, 은사시대는 이미 끝났으며 필자가 하는 사역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악담을 퍼붓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필자가 그만하자고 하니까,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오만하다는 막말도 서슴지 않았다. 그 자매는 오랫동안 귀신들이 영음으로 넣어준 말을 들으면서 삶이 불행에 빠졌으며 필자부부가 며칠 동안 열심히 축출기도를 해서 수많은 귀신들이 나가면서 하는 말들을 자신이 필자부부에게 전해주었으면서 이렇게 갑자기 돌변할 수가 있나, 필자의 귀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 자매는 필자의 교회에서 만난 자매들과 전화번호를 교환했는데, 그 자매들에게까지 전화를 해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고 하니 귀신들의 공격은 집요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도시대의 은사는 이미 AD 2세기경에 끝났다는 신학자들의 말을 대부분의 교회에서 받아들이고 있으며 인터넷에도 널리 퍼져있으니 검색하면 금세 알아볼 수 있다.
믿는 자에는 이러한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7,18)
위의 예수님의 말씀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뜨거운 감자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렇게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있다고 하였는데, 자신들에게 없다는 것이 그들의 딜레마이다. 그래서 이 딜레마를 빠져나갈 통로를 제공해주는 신학자들의 주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주장한 요지를 짚어보자. 그들이 말한 대로 AD 2세기 경에 사도시대의 은사가 끝났다면 모든 은사가 다 끝났다고 해야 하는데, 그들의 입맛대로 끝난 것도 있고 아직 있는 것도 있다는 식이다. 귀신을 쫓아내는 은사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다.
왜나면 만약 끝났다고 한다면 작금에 일어나는 귀신들린 현상이나 축출기도로서 회복되는 현상에 대해 할 말이 없어서일 것이다. 예수님은 마귀를 멸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고, 우리가 싸우는 대상도 사탄이라고 성경에 명백하게 나와 있는데 귀신이 없다거나 그들을 쫒아내는 능력이 없다면 예수님의 사역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기 때문에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새 방언이나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 능력은 없어졌다는 주장에 대해서 말해보자. 새 방언의 의미는 사도시대의 방언(외국어 방언)과 다른 방언 (소위 천국방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주 바뀌는 방언일 수도 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하고 있다.(자의적으로 지어낸 방언이나 귀신들이 넣어준 방언도 적지 않지만) 그런데 새 방언 자체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다. 또한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 이 말씀은 상징적인 말이다. 무슨 독이란 농약이나 쥐약을 마신다는 직설적인 화법이 아니다. 왜 사도들이 농약이나 쥐약을 마시겠는가?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대중 앞에서 보라는 듯이 마셨을 리는 만무하고, 목이 말라 마셨는데 그게 농약이었을 경우가 일상의 삶에서 도대체 얼마나 일어나는 사건일까? 그런데 예수님이 이를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고? 지나가던 개도 웃을 일이다.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씀은, 다양한 사탄의 공격에서 성령의 도움으로 피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말씀의 뜻은 고린도전서에 잘 나타나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성경에서 시험을 주는 자는 누구일까? 시험하는 자는 바로 사탄을 말한다. 그런데 복음서에 이런 언급이 없다고 주장한다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
그리고 뱀을 집을 수 있는 능력에 대해, 뱀이란 사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동물이 아닌가? 그런데 그 뱀이 산이나 숲에서 보는 뱀이라는 뜻인가? 뱀을 집어 올린다는 뜻은 사탄과 싸워 이긴다는 의미임은 초등학생들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그런데 이 뜻을 생물학적인 뱀을 집어 올린다는 뜻으로 해석했다면 이건 신학자도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눅10:19)의 예수님의 말씀은 뱀과 전갈을 발로 밟는다는 뜻인가? 백번 양보해서 뱀을 사탄으로 해석했다고 하더라도, 사탄과 싸워 이기는 능력을 사도들에만 주는 신임장이었다고? 그러면 우리들은 사탄의 노예가 되어 지옥으로 가게 내버려두었다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대체 그들의 주장을 이해할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치유의 은사에 대해서, 그들은 치유의 은사에 대해 애매모호한 주장을 하고 있다.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사도들이 하던 치유의 은사와는 비교할 수 없게 능력이 약하다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맞는 말이다. 사도들의 능력에 버금가는 치유의 은사자를 보기 힘든 게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사도들이 처음부터 예수님이 하던 능력을 따라했던가? 아니다.
그러한 능력은 사도들과 제자들이 마가요한의 다락방에서 오로지 기도하기에 힘쓴 끝에 터진 성령세례사건 이후에 나타났다. 그렇다면 사도들이 하던 기도방식을 우리네 교회가 따라하고 있는가? 전심으로 기도하고 성령의 내주를 혹독하게 요청하는 기도를 훈련시키고 삶에 적용하고 있는가? 겨우 새벽기도에 가서 10분만 기도해도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하지 않은가? 기도내용도 하나님의 뜻하고 전혀 상관없이 탐욕을 채우는 기도이지만 말이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고 사도바울을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다. 그런 기도를 하고 성령의 능력을 받은 후에 사도시대에 나타난 치유의 은사가 있니, 없니 했으면 좋겠다. 성경적인 기도는 하지 않고 은사가 끝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런 기도를 하지 말라는 귀신들의 속임수이다. 그런데 기도를 가르쳐야 할 목회자들이 귀신들의 소리나 듣고 있으니 답답하고 통탄할 노릇이다. 게다가 일부 신학자들의 주장을 예수님의 말씀보다 더 신뢰하고 있다는 게 목사들이 할 짓인가?
예수님이 한 말씀으로 칼럼을 마무리 짓겠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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