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충만 그 아름다운 삶
찰스 스탠리 지음 - 최원준 옮김
두란노/1999년 3월/372쪽/9,800원
1부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1. 성령 충만하여 아름다운 삶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신자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삶은 활기도 없고 힘도 없을 뿐 아니라, 그들 나름대로의 수양과 결심 외에는 그리 특이하다고 할 만한 것이 없는 삶이다. 나는 두 가지 신조를 가지고 있는 신자들을 자주 만난다. 첫째, 완벽한 사람은 없다. 둘째, 하나님은 그것을 이해하신다. 그들에게 삶이란 기쁨과 슬픔이라는 두 가닥의 실이 서로 꼬여 있는 실타래와 같은 것으로, 그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그 실타래 끝에 약속된 천국뿐이다.
제삼자의 눈에 비친 그런 신자들의 생활 방식과 정신 세계는 믿지 않는 이들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신자들의 이혼율은 믿지 않는 이들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은 끝없이 목사인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한때는 구원의 기도를 드린 적도 있으나 결국은 기독교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게 된 이들을 보면 나는 당혹스러운 정도를 넘어 근심에 빠지고 만다. 물질적으로 모든 것이 채워져 있지만 성령이 결여된 삶을 살아가는 부부들을 볼 때면 나는 염려스럽다. 성령이 계시지 않는 가정, 거기에는 영원한 즐거움도, 평안도, 사랑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혼이라는 관계가 가져다 주리라 생각했던 만족감을 찾아 또 다른 곳을 헤매야만 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막 희망을 버리고 포기하려 할 때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셨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 : 18)."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런 약속을 하신 지 며칠도 안되어 주님은 제자들의 곁을 떠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셨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우리들 중에는 버려진 고아와 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방향 감각과 삶의 동기, 그리고 용기를 상실한 채 자신들을 귀속시킬 명분을 찾고 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의 삶이 단지 (인간의) 최선을 다하는 그런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기 위해 성령을 보내실 필요는 없었다. 결국 최선이란 우리 쪽에서 할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인간의 최선, 그 이상의 것임을 명확히 하셨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 : 7)."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 1 : 4~8)."
보혜사 성령에 대한 약속을 통해 주님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가장 중요한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즉 “성령의 도움이 없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진리이다. 이 사실은 이제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우리는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해방시켜 준다고? 오히려 우리를 좌절시킬 뿐인데….”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루어 낼 수 없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진리라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도들은 그들의 삶 속에 성령이 거하신다는 확신이 있고 난 후에야 움직였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우리는 성령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매일 아침 집을 나서고 있는 것이다. 잭 테일러는 그의 책 『승리하는 삶의 요건』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아버지는 훌륭한 농부였으며 그것은 농사일에 열심을 다한 결과였다. 나는 신앙에 있어서도 아버지처럼 열심히 노력하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 그 이후 거의 20년 동안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삶은 모래밭에서 땀흘려 일하는 소작농의 삶과 같았다. 나는 그 밖의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기에 그런 삶을 견디어 냈다. 아무도 나에게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 주지 않았다.”
2. 첫 만남
열네 살 때, 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다. 나는 너무도 명확하게 그 부르심을 들었는데, 아마 천사장 가브리엘이 내 앞에 직접 나타나 얘기를 해주었다 해도 그처럼 명확하게 들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 부르심은 내 마음속으로부터 들려왔다. 바로 내 안에 거하는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내게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나의 접근 방식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내게 성실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아기였을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몇 년 뒤에 재혼하셨다. 재혼은 어머니가 하신 일 중 일생일대의 가장 큰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계부로 인해 우리 모두의 삶은 끔찍하게 변했다. 상황이 그렇게 나빴지만 나는 비뚤어지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를 대하는 계부의 태도가 몹시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러나 그런 미움을 마음속에 쌓아 놓지는 않았다. 나처럼 좋지 않은 가정 환경에서 자란 많은 아이들이 비뚤어진 성격으로 인해 자멸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가 인식하지 못할 때에도 성령께서는 나와 함께 계셨다.
성령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를 돕도록 하나님께서 보내신 존재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우리의 가장 큰 조력자이다. 결코 가상의 신비로운 존재가 아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분이 행하시는 방법에 익숙지 않은 연유로 우리는 그분을 잊어버리고 있다. 그분을 잊고 생활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인도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그분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성령 충만하여 아름다운 삶’을 이루어낼 수도 없다.
성경은 성령을 ‘그것’이 아닌 ‘그’로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인성을 부여하고 있다. 성경은 특히 성령이 다음의 세 가지 인성 즉 지성과 의지와 감정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성령은 어떤 힘이나 에너지의 원천과 같은 비인격적 존재가 아니다. 그분은 사고하고 느끼며 행동하는 인격체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삶에 역사하시며 우리가 당신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신다. 물론 성령은 평범한 인격체 그 이상의 존재이다. 그분은 우리가 삼위일체라고 부르는 신비로운 실체의 한 부분이다.
성령이 나의 삶 속에서 어떤 일들을 하시는지 더욱 명확하게 알게 되면서 나는 성령께 다음과 같은 도움을 구하기 시작했다. 어떤 특정 문제를 놓고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알지 못할 때 나는 그분에게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성경을 읽을 때 내 눈이 열려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도 했다. 그렇게 여섯 달 정도가 흐르고 난 뒤 성령께 이야기하는 일이 아주 자연스러워졌다. 그 이후 지금까지 성령은 그리스도인인 나의 삶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치는 존재로 자리잡고 계신다.
3.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
1957년 신학교를 마친 나는 프루트랜드 침례교회와 그 맞은 편에 있는 프루트랜드 성경 연구소에서 사역하게 되었다. 나는 설교는 그런 대로 자신이 있었지만 목회자를 상대로 가르치는 일은 달랐다. 내게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나는 토레이 목사가 쓴 성령에 관한 책 한 권을 읽게 되었다. 토레이 목사는 그 책에서 성령의 지시나 권능 받는 일을 너무나 간단한 것으로 기록했는데, 이것은 내게 커다란 혼란을 가져다 주었다. 지난 2년 동안 나는 성령의 권능을 받기 위해 금식에서부터 간구에 이르기까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보았다. 그러나 결국 내가 깨달은 것은 나의 노력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강의해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절박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정신을 집중해 그 책 어디에선가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비밀을 찾고 있었다. 돌이켜보건대 그 당시 내가 그렇게 절박한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은 모두 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순서였다. 내가 주님으로부터 또 다른 가르침을 받아야 할 때였던 것이다.
성경은 네 군데에서 ‘oikeo'란 헬라어(’거하신다‘, ’내재하신다‘, ’사신다‘)를 사용해 성령과 신자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그 중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묘사가 가장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 : 16).” 분명 바울은 ’하나님의 성전‘이란 구절과 ’성령의 성전‘이라는 구절을 동등하게 놓음으로써 성령이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했다.
또한 ‘oikeo'라는 단어는 영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즉 성령은 신자들 안에 영원한 거처를 정하신다는 말이다. 그는 우리를 거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으로 삼으신다. 그는 우리 안에 머물기 위해 오시는 것이다. 신자들을 성전이라고 묘사함으로써 바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처를 영원히 옮기셨음을 선포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순간,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고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성전을 떠나 성령의 인격을 통해 당신 백성들의 마음속으로 거처를 옮기신 것이다. 성경은 성령이 약속대로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 : 13~14)."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 : 30)."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신 성령을 보신다.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신 성령은 하나님의 약속, 즉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시작하신 일을 하나님이 끝내시겠다는 약속을 상기시켜 주는 영적 존재다. 우리가 자신 외에 누군가에게 속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우리는 영적 세계에 들어온 것이다.
디데이까지 2주가 남아 있었다. 나는 “성령님, 내 안에 계신다면 어떻게든 해주소서!”라는 기도를 드렸던 기억이 난다. 나는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내 안에 거하시기만 하면 내가 모든 종류의 새로운 잠재력을 지니게 될 것으로 확신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토레이의 책을 읽어 가는 동안 내 자신이 처한 곤경을 아주 적절히 묘사하고 있는 구절을 하나 발견했다.
“모든 거듭난 이들과 성령이 함께하신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성령을 깊은 곳에 감춰놓고 의식조차 못하는 신자들이 매우 많다. 손님을 구석지고 눈에 안 띄는 곳에 모셔 놓고 우리 자신조차도 그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와, 우리가 손님에게 온갖 신경을 쓰는 경우는 분명 다르다. …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는 하지만 우리가 그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결코 성령 충만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며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확히 말한다면, 거듭난 이들은 모두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 ‘성령 세례’ 또는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거듭난 이들 모두가 소유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이 구절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해서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내 자신에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내 안의 금단의 장소로부터 내 일상 생활 속으로 성령을 이끌어 내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내가 바란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내가 제대로 강의를 이끌어 가는 것이었다. 하루하루 다가오는 첫 수업 날짜, 그 위기감은 바야흐로 성령 충만한 삶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나의 다음 행보를 준비해 주고 있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것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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