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충만 그 아름다운 삶
찰스 스탠리 지음 - 최원준 옮김
두란노/1999년 3월/372쪽/9,800원
2부 내면을 들여다보라 - 신자들 안에서 행해지는 성령의 역사
6. 믿음
성령 충만한 삶을 추구하는 데 있어 우리는 먼저 그런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우리가 그런 삶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이며,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성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소유하고 계신다.”는 진리를 믿어야 한다. 이 진리들이 우리의 생각 속에 자리잡게 될 때 우리는 변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 스스로 의를 이루려는 것은 마치 포도밭에서 사과를 재배하려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이기적이고 죄 많은 우리의 육체는 애초부터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우리의 육체는 오히려 사악한 일에 적합하게 만들어졌다. 게다가 아주 놀라우리만큼 멋지게 그 일을 감당하고 있다! 스스로 성령의 열매를 만들어 내려고 할 때 우리는 먼저 우리의 육신을 개선해 보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죄인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는가?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 : 3)."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 : 6~7)."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 : 20)."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이 약속하신 대로 하리란 것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의 전부이다. 성령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다. 다윗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믿음을 따랐다. 골리앗과 싸우러 계곡으로 내려가기 전에 주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보여 주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삼상 17 : 37)."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도록 할 준비를 항상 하고 계신다. 성령이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믿음뿐이다. 우리가 기꺼이 “성령님, 저는 이 문제를 처리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를 혼자서 감당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제게 응답하소서. 저로 하여금 당신의 눈으로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도록 하소서. 저는 당신만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그것은 성령에게 청신호를 보내는 것과 같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이 해야 할 부분만을 감당하고 그 나머지는 성령이 채워 주시리라 믿는 것뿐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아름다운 삶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지금 당장 시작하라! 앞으로 몇 시간 안에 우리는 어떤 거인을 직면하게 될 것 같은가? 어떤 감정과 싸워야 하는가? 어떤 유혹을 직면하게 될 것 같은가? 바로 지금 승리를 외쳐 보라. 우리의 믿음을 발휘하라. 그리고 기도하라!
7. 한발 한발 보조를 맞추어
처음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 나타낸 것은 성령의 성품이 아니라 표적이었다. 그런 표적으로 인해 그 도시에 살던 불신자들도 무언가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성령이 다락방에 모여 있는 이들에게만 임하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 다른 신자들도 성령을 영접하게 되었다. 모든 이들이 똑같이 한 순간에 성령을 영접한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놓고 성령이 마치 파도처럼 기독교 사회를 천천히 휩쓸었다고 말한다. 오순절, 그 당시에는 성령을 받은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오순절이 끝난 후 얼마 안되어 결국 성령은 모든 신자들 위에 임하사 당신의 거처를 정하셨다. 성경에 나타난 두 가지 근거를 가지고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첫째, 사도행전 19장 이후에서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 외에 어떤 사람이 ‘성령 충만하다’거나 ‘성령을 받았다’거나 하는 일에 대한 기록이 없다. 19장 2절에서 바울이 성령에 대해 들어본 적이 전혀 없는 신자들을 만나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들이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자 바울는 약간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그 당시 기준으로 보았을 때 그들은 분명 예외적인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세례 요한의 가르침으로 믿음을 갖게 되어 그가 죽고 난 이후에도 메시아가 올 것이라는 요한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다녔다! 이런 그들이 자신들이 없는 데서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한 얘기를 듣고 놀랐으리란 것은 가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은 지 채 몇 년도 안되어 성령은 온 세계를 두루 살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충만하게 채우셨던 것이다.
둘째,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모든 신자들에게 성령이 거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 : 13)." 바울은 ‘다(all)'라는 표현을 거리낌없이 사용하고 있다. 모든 곳의 그리스도인에게 보낸 공개 서한에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적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 : 13)."
구원이 일어날 때 성령 강림도 함께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명확한 지금, 우리는 성령의 강림이라는 주제로부터 신자 안에서 성령이 행하는 역사 쪽으로 초점을 옮겨 가야 할 것이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 : 16)."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 5 : 18)."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매 순간마다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과 교감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 때 성령은 신자들이 자신들 각자에 대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뜻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그러나 인도자이며 안내자로서 성령의 주된 역할은 신자들을 거룩함으로 이끄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 대해 품고 계신 궁극적인 뜻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을 때 우리는 그에게 속하게 되었고 죄악의 노예된 상태에서 해방되었다. 이제는 한 번에 두 주인을 모실 수 없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든지 아니면 육체의 욕망을 따르든지, 그 둘 중의 하나밖에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탄도 우리에게 말을 건넬 수 있고 우리 안에 육체의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과 달리 고작해야 우리 옆에 서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그의 권리는 깨어졌다. 자신이 자유롭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성령을 좇아 행할 수 없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데 있어 우리의 생각과 실제적인 능력 사이에는 중요한 관계가 있다. 영의 생각을 하면 우리의 마음은 진리로 가득 찰 것이며 항상 진리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악한 행위도 한 번은 머리로, 그리고 또 한 번은 행동을 통해 저질러지기 때문에 사악한 행동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먼저 사악한 마음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내가 사악한 마음과의 싸움에서 오랫동안 패배를 거듭한 것은 선한 행동에만 거의 모든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을 다해 노력해도 선한 행동을 계속 이어갈 수 없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벧전 1 : 13)."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 : 2)."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대부분의 선물들처럼 상상의 능력도 죄악에 의해 퇴색되었다. 그러므로 신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아이디어, 개념, 꿈 또는 상상 같은 것들을 진리에 비추어 판단해 보아야 한다. “참된가? 경건한가? 옳은 것인가? 정결한가? 존경받을 만한가? 칭찬받을 만한가? 덕이 있는 것인가?” 이 기준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라. 그러면 우리의 마음에 그릇된 생각이 침투할 때마다 성령이 얼마나 빨리 경고 사인을 보내는지, 우리는 그 속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우리가 성령과 사탄 중 누구의 인도를 받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어느 오후 내 마음속을 파고드는 그릇된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일에 전념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불렀던 바울의 말이 생각났다. 문득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기 삼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대적하는 거짓을 폭로하고 파괴한다는 깨달음이 왔다. 그 때부터 나는 우리가 쉽게 현혹될 수 있는 그릇된 생각에 대응되는 구체적 진리를 담고 있는 성경 구절들로 내 마음을 채우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내 육신은 내게 잘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방법을 상상하는 가운데 어느 정도의 기쁨을 맛본다. 그러나 이 경우 나는 베드로전서 3 : 9의 말씀을 암송한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 : 9)." 또한 내 믿음에 가장 큰 도전이 되었던, 하나님은 선한 자로 하여금 왜 고난을 당하도록 하시는가 하는 고민에 대해서도 성경 말씀이 바른 시각을 갖게 해주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벧전 4 : 19)." 성령을 좇아 행하는 최상의 방법은 성경을 암송하고 그 말씀에 대해 묵상하는 것이다. 진리와 친숙해질수록 거짓되며 그릇된 것을 찾아내는 일이 더욱 쉬워질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 떠오르는 사악한 생각, 그 자체가 죄악은 아니다. 그 안에 머무르고자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죄악인 것이다.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고자 하시며 그것을 위한 모든 준비를 하고 계신다. 그는 진리에 따라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의 의지를 무시한 채 억지로 끌고 가진 않을 것이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다 성령과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생기면 성령과 우리 중 어느 한 쪽이 물러나야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물러나는 쪽은 성령이다. 전지 전능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우리를 억지로 몰고 가는 법이 없다. 성령은 가만히 옆으로 물러나 우리가 다시 그를 믿고 따르게 될 때까지 기다리신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담당해야 할 부분이 있다.
8.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의 모습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은 어떤 모습을 띠며 어떻게 행하는가?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아홉 가지 특징적인 덕목들을 찾아볼 수 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인내), 자비(친절함), 양선, 충성(성실함), 온유, 절제. 성령의 이러한 열매는 단순히 많은 특징들 중 하나가 아니라 성령 충만의 명확한 특징이다.
이러한 성령의 열매들은 우리가 성령께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그의 가르침에 민감하게 응답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마이애미에서 연단을 겪고 난 후 나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다. 평소 같으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상황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었고, 어떤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위축됨 없이 여유롭고 온유한 자세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 나를 실족케 했던 유혹들도 절제를 통해 물리칠 수 있게 되었으며, 잘못된 점에 대해서는 주저없이 인정하게 되었다. 무엇인가 부족한 것 같은 데서 오는 두려움도 사라졌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이 모든 일이 변해야겠다는 나의 결심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나는 전보다 더 친절하고 너그러운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성령의 열매를 대신하는 기준으로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은 첫째가 성령의 은사요 둘째가 타고난 재능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 나름의 중요한 역할은 있지만 성령 충만한 정도를 측정하기 위한 기준이나 도구라는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컹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도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 : 15~17)."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를 발견할 수 없다면 속히 그들 곁을 떠나라고 말씀하셨다.
한편 성령의 열매가 재능이나 능력 같은 것들과 다른 점은 환경과 무관하다는 점이다. 만사가 순탄할 때 평안과 기쁨을 누리기는 쉽다. 그러나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평안과 기쁨을 유지하기란 어렵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는 주위 환경이 악화되었을 때 눈에 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지닌다. 그리스도의 삶은 사랑, 기쁨, 평안 그리고 인내 등의 성격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분은 정반대의 특징을 보이는 세상에서 그런 삶을 사셨다. 그는 우유부단한 겁쟁이가 아니었다. 때가 이르자 그는 자신을 비방하는 자들에게 맞서 대항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언제 침묵을 지켜야 할지도 알고 계셨다. 당대의 지식인들과 토론을 벌일 때 그는 용기와 지혜, 그리고 권위를 가지고 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셨다. 사람들, 특히 아이들은 그리스도를 좋아했으며 심지어 죄인들조차도 그와 함께하기를 좋아했다. 그리스도는 전혀 흔들림이 없는 분이셨다. 그는 우쭐대는 법이 없었으며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도록 으름장을 놓는 법도 없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할 때가 다가오자 그리스도는 가장 어려운 문제인 죽음의 문제와 싸움을 벌이셨고 결국 승리하셨다. 그런 놀라운 삶을 사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보내 그로 하여금 우리 안에 거하도록 하셨다. 주님의 목적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 : 27)."
성령 충만한 사람들, 그들은 주변 상황과는 동떨어진 어느 곳에 격리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도 주변의 다른 모든 이들처럼 실수도 하고, 남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기도 하며, 실망하기도 한다. 매일 유혹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한 이들이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변 상황의 변화를 대하는 그들의 자세와 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주위 환경이 평안을 무너뜨릴 때면, 그들도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좌절해 주저앉아 있는 법이 없다. 도망가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영의 생각을 한다. 바로 그 영의 생각이 자신들에게 생명과 평안을 가져다 주리란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심지어 복수의 생각으로 얼마 동안 바른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바른 시각을 회복하고 다시 진리를 바라본다. 그들은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 : 28)."는 말씀과 신자로서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그들은 악한 길을 선택하지 않고 오히려 용서의 길을 택하며, 실족했을 때 놀라울 정도로 빨리 회복한다. 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화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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