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 (Sanctification)
F 성화의 특성
1.. 성령께서 하시는 초자연적인 사건이다.
칭의가 그런 것처럼 성화도 인간의 노력의 대가나 성취가 아니다. 성화는 하나님께서 한 인간 안에서 행하시는 초자연적인 역사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고 말하고 있다. 성화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여러 성경절들에 나와 있다(엡 5 : 26 ; 딛 2 : 14 ; 히 13 :20~21 등). 이런 점에서 성화는 육의 개선이나 영혼의 죄를 점진적으로 제거하여 인본적인 과정이 아니다.
성화가 초자연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성령의 은혜스러운 사역을 의미한다. 성화는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로마서 8장 4절). 영을 좇아 행할 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고(로마서 8장 6절)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로마서 8장 14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라디아서 5장 16절).
2. 성화는 과정적이며 영혼을 거룩함 안에서 강화시키는 점진적 사건이다.
성화는 완성을 향한 점진적 과정이다. 바울은 말한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립보서 1장 6절).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은 구약 성경의 “야훼의 날”에 상응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며 심판의 때다. 따라서 그리스도 재림의 날까지 영적인 성장은 계속된다. “십자가의 도는...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 1장 18절)는 말씀에서 “구원을 얻는”이라고 한 진술은 현재 분사형으로 계속적인 활동의 의미를 보여 주고 있다. 혹자는 성화를 과정이라기보다 칭의 후에 오는 순간적 또는 즉각적 경험으로 국한시키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성화를 자라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제 2의 축복과 같은 즉각적인 것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성서적인 성화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히브리서 12장 14절)고 한 승리를 위한 명령법 형태를 취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이 좇는 일을 계속적인 현재 진행형으로 간증도 하고 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좆아가노라...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좇아가노라”(빌 3장 12-14절).
3. 성화는 주관적, 체험적, 실천적인 사건이다. 참된 성화는 사랑의 원칙을 실천함으로 이룩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그들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사람들의 생애에는 실제적 경건이 나타날 것이다. 품성은 순결하고, 향상되고, 고상하고, 영화롭게 될 것이다. 순결한 교리가 의의 행위와 섞이고 하늘의 규례가 거룩한 행실과 혼합될 것이다(AA 560).
Rudolf Ott이 1917년에 『성스러움의 의미(Das Heilige)』 출판하였다. 하나님의 성스러움은 두렵고 매혹적인 신비로 신앙의 기본지반이 된다. 오토는 '누멘'(numen : 신·영혼·신성)에서 '누미노제'라는 용어를 만들어 '누미노제를 인지하는 순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 순간 우리는 ' 두려운 신비'(mysterium tremendum)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어떤 것을 다루게 된다…… 그 느낌은 때로 부드러운 파도처럼 밀려와, 마음을 예배에 깊이 몰두하는 평온한 상태로 가득 채울 수도 있다. 어떤 때는 안정되고 일관된 상태에 있는 영혼이 충만해져서 한동안 두려움으로 전율하게 한다. 피조물이 마음을 졸이며 떨고 말문이 막히는 겸손한 상태가 되는 것은 누구 또는 무엇 앞에서일까? 그것은 표현할 수 없고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는 '신비' 앞에서이다." 종교는 거룩함, 신비로움(mysterium), 경외감(tremendum), 탄복(fascinans: 오토는 종교가 가진 독특함을 표현하기 위해 이런 종교적 감정들은 라틴어를 통해서 나타낸다)을 포함하는데 이러한 감정들은 우리의 몸 안에 내재된 신감을 통해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4. 성화는 신인 협력적 과업이다. 인간의 순종생활은 절대적이다. 성화는 하나님에 대한 의뢰, 의존은 날로 증가해 가는 삶이다. 성화는 계속적으로 자아를 포기하는 삶이다. 성화는 하나님의 주동적 사역이기는 하나 인간의 행위를 요청한다. 신자는 성령 안에서 행하고 자라가야 하고 능동적 순종을 하여야 한다. 바울은 “너희가...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립보서 2장 12~13절)라 하고 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로마서 12장 1절)고 권고하고 있다. 인간은 죄된 것을 버려야 하고 거룩함을 발전시켜야 한다.
5. 은혜의 수단은 성화에 요긴하다. 말슴 연구, 경건한 예베와 진심어린 간절한 기도, 거룩한 성찬 예식과 같은 은혜의 수단들이 성화의 삶을 꼴 지어 가게 한다.
6. 성화는 하나님의 율법과 긴밀한 관계에 있다. 하나님의 율법은 거룩함의 표준이 된다.
혹자는 하나님의 율법이 성화에 있어서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보고 있으나 이것은 성경을 올바로 읽은 것이 아니다. 바울은 율법 준수 즉, 율법의 행위가 칭의를 말하는 문맥에 있어서는 무력하다거나 아무 상관이 없다고 잘라 말하고 있다(롬 3:20 등).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인 행위 즉 성화와 관련된 문맥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율법의 가치와 정당성 또는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롬 7:12, 13:8-10 ; 고전 7:19 등). 특히 그는 디모데전서 1장 9-10절에서 십계명의 순서에 따라 그리스 세계의 악덕 목록(Lasterkataloge)을 제시하므로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디모데전서 1장 8절)임을 입증하고 있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7:12]. 바울의 글에서 율법에 관한 구원론적 구절들과 도덕적 구절의 용례를 분간하지 못하는 것은 치명적 결과를 유발한다. 하나님의 율법은 구원의 방편이 아니다. 그리나 그것은 성화에 있어서 그리스도인 행위의 도덕적 표준이 된다. 바울이 하나님의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보는 것에 대한 심각한 문제점을 지적한 말씀들을 빙자하여 율법 폐기론으로 귀착시키는 일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율법의 제3용도에 있어서 율법은 신도의 거룩함의 규범적 표준이 된다. 구원 받은 백성은 이제 감사하여 하나님의 율법의 심오하고 광대하고 높은 뜻에 따라 성화의 삶을 살아간다. 하나님의 율법의 핵심은 사랑이다. 따라서 거룩한 삶은 거룩한 율법의 기본적 정신인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구현을 하여 가는 삶이 된다. 이 거룩한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신실한 믿음의 반응과 결실로 체현되어야 한다.
7. 성화의 목적은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로마서 8장 29절) 함에 있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가는 일은 그리스도와 계속적으로 교제하는 일을 통하여서 가능한 것이다.
8. 성화되었다거나 성화되어 간다는 것은 죄없는 완전한 상태를 두고 한 말이 아니다. 성화는 한 평생 지속되는 상대적인 일이다(상대적 성화).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이상은 하늘처럼 높다. 칭의는 과거의 죄에 대한 사면장이지만 죄를 또 지어도 좋다는 허가장이 아니다. 성화는 칭의로 얻는 구원을 유지하고 발전하여 가는 승리의 찬가가 되어야 한다. 베드로는 말한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5-16 ; 참고 레 11:44). 더 이상 높을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성이 제시되어 있고 이 표준에 이르기까지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은혜가 제공된다.
그러나 완전주의자(perfectionist)들의 주장처럼 죄가 완전히 근절된 완벽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뜻은 아니다. 순간순간의 삶이 죄없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오벌린(Oberlin) 학파의 찰스 피니(Charles Finney)가 이런 시각의 대표자이다.
여기에서 사도 요한의 메시지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 된다.
“만일 우리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 참고 왕상 8:46).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요한일서 1장 10절). 여기에서 말한 죄 없다는 말은 매일 알려진 죄로부터 떠난 삶이다. 그것은 의도적인 죄를 벗어난 생활이다.
“성화란 한 순간, 한 시간, 하루의 일이 아니라 필생의 사업이다. 이것은 고양된 행복감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일의 결과이다. 나약하고 때때로 중단되는 노력으로는 잘못들을 바로잡을 수 없고 품성에 개혁을 단행할 수 없다. 오로지 오랜 끈기 있는 노력, 괴로운 훈련, 쓰라린 투쟁에 의해서만 승리할 수 있다. 어느 날에도 우리는 내일 우리의 투쟁이 얼마나 처절하리라는 것을 알 수 없다. 사단이 통치하는 한 우리에게는 복종시켜야 할 자아가 있고 극복해야 할 얽매이게 하는 죄악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이 계속하는 한 멈추는 데가 없을 것이며, 우리가 도달해서 내가 완전히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지점이 없을 것이다. 성화란 필생의 순종의 결과이다.
사도들과 선지자들 중 어느 누구도 죄가 없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생애한 사람들, 고의로 악행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생명 그 자체를 희생하고자 한 사람들, 하나님께서 거룩한 빛과 능력으로 영화롭게 하신 사람들도 그들의 본성에 죄악이 충만함을 고백하였다. 그들은 육신을 신뢰하거나 자신들의 의를 주장하지도 않았으며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였다”(AA 560-561).
“우리가 예수께 더욱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분의 품성의 순결을 더욱 분명히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 더 죄의 극악함을 알게 되고 자신들을 높일 마음이 더욱 더 적어질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계속적인 영혼의 발돋음, 계속적이며 열렬한 죄에 대한 마음을 찢는 회개와 그분 앞에 마음을 겸비하게 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그리스도인적 경험에 있어서 진보의 매 발걸음이다 우리의 회개는 깊어질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의 충분함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며 다음과 같은 사도의 고백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할 것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롬 7:18; 갈 6:14)”(AA 561)
그렇다면 신자들은 거룩하게 되어야 하는 높은 이상과 죄없다고 말을 할 수 없는 현실적 자기 경험이나 죄성 사이의 긴장 관계 아래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면 이 긴장 관계는 하나님 백성에게 승리의 디딤돌이 된다.
성서적 죄의 개념은 행위에 국한되지 않고 상태까지도 포함시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의 죄된 상태는 성화의 강도가 깊고 넓어 갈수록 더욱 심각하게 느껴지고 죄에 대한 혐오가 깊고 넓어 간다. 그리하여 죄가 자기 안에서 왕 노릇하지 못하게 된다. 인간 안에 잔존하는 죄성과 왕 노릇하는 죄와는 전혀 다르기 떄문이다. 성화가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그날까지 인간은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는 말씀에 따라 성령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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