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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

Joyfule 2021. 7. 26. 02:29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             


2) 교회 개혁과 정치 입문

카이퍼는 1862년 신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로 베이스트, 위트레히트, 암스텔담에서 목회 활동을 이어갔다.
자유주의 신학을 벗어나지 못했던 그는 조그마한 시골 베이스트에서 개혁주의를 맛보게 되었고, 그의 신학에 있어서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1867년(30세) 위트레히트라는 도시로 사역지를 옮긴 카이퍼는 드디어 '교회개혁'이라는 칼을 뽑아들었다.
그는 가지각색의 신앙고백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 각지역의 국가교회에서 정통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인 교인들이 합법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힘을 썼다.
그의 주도적인 제안으로 위트레히트 재직회는 전체 교회(교단)에서 시행하는 형식적인 교회 시찰을 거부하고, 영적인 실체를 빼놓고 일상적인 설문조사로 방관하는 총회를 비판했다. (재직회는 교회시찰을 위해 총회에서 보내온 설문조사에 응하지 않고 설문지를 돌려보냈다.)
이러한 반항은 교회언론, 신문 등에 대서특필 되어 급속도로 전국을 술렁이게 했고, 찬반 양론이 펼쳐지면서 국가교회는 그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1867년 3월 1일 발표된 23조에 의해 시행된 1868년 교회선거의 결과는 카이퍼를 비롯한 정통주의자들을 흥분시키기에 족했다.
전국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장로, 집사들이 아니라 정통주의자들이 선출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승리는 최종적인 승리라기보다는, 오히려 선전포고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승리는 투표하지 않은 자유주의자들이 많아서였지 결코 정통주의자들이 우세해서가 아니었다.
또한 보수적이고 낙관적인 많은 정통주의자들은 카이퍼의 종교개혁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견제하였다. (그들은 '심각한' 싸움을 원치 않았다.)

카이퍼는 교육제도, 즉 학교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있어서 국공립학교로부터 독립하려는 기독교국가교육협회에 참여하여 개혁주의적인 기독교 학교운동을 벌이게 되었는데, 그 때 그 협회의 명예회장이었던 흐룬을 만났다.
젊은 카이퍼는 67세의 흐룬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흐룬은 그런 카이퍼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더 나아가 흐룬은 카이퍼 박사를 반혁명당의 장래 지도자로 지목하였고, 카이퍼는 반혁명당을 지지하여 1869년 국민 선거를 치렀다. (그 국민선거의 주관심사는 학교문제였다.)

그 선거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카이퍼는 정치적,종교적 주간지인 헤라우트(De Heraut)지의 협동 편집인으로 활동하면서 그의 비전(!)을 펼쳐나갔다.
그는 이제 종교계, 교육계, 정치계, 언론계를 아울러 목소리는 내며 '개혁'하기 시작한 것이다.
1870년 암스텔담 국가교회에서 청빙하기까지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위트레히트에서 너무도 많은 일들을 벌여나갔다.

카이퍼 목사는 암스텔담 교회에서 쉬지않고 일했다. 지교회뿐만 아니라 화란 국가교회 전체를 정화하고 회생시키려는 노력을 쏟았다.
암스텔담 고아원은 모든 종교적인 예배와 그들의 종교적인 수양은 정통주의적으로 하겠다고 선언하였다.
1872년에는 17명의 장로들이 자유주의적인 목사가 집전하는 모든 종교적인 예배, 예식 그리고 기념식에 불참하겠다고 선언하여, 자유주의자들의 반발을 샀다. 카이퍼 박사는 이 때에도 양측의 주장을 분석하여 객관적인 태도로 자유주의자들의 항변을 분쇄했다.
그는 또 교회재판소에서 정통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인 구성원들이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모임을 조직했다.

헤라우트지의 편집장이 된 1870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와 민족의 생명에 대한 기초가 된다고 인정하는 자들로 구성된 헤라우트 협회를 만들어 헤라우트지를 매입하고 그의 종교적, 교회적, 정치적 견해를 알리는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1871년 1월 6일 발행된 첫신문에서, 국가교회 총회가 '믿음 소망 사랑으로' 세례를 주거나 그밖에 적합한 말로 세례줄 수 있다고 공표한 것에 대해 비판하였다.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주어야 한다. 마28:19)
이에 전국에서 많은 정통주의 목사들의 총회에 대한 반발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진짜'들을 가릴 수 있는 계기였을 뿐이고 그의 외로운 투쟁은 계속되었다.

1871년 카이퍼 박사는 "모더니즘, 기독교 세계에 있어서 신기루"라는 제목의 강연을 시작했다. 그 강의를 통해 그는 모더니즘(자유주의)의 체계를 정면공격하였다.
또 그 해 화란 개혁주의 선교협회의 연설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선교를 강조하였다.

독일과 화란의 개혁교회 연합모임이 300주년 되는 1868년 그 모임을 기념하여 개최를 시도했다가 연기가 되어 1872년에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의 교회 유형은 자유주의로부터 개혁주의자에 이르는 모든 분파를 포함하고 있어서, 그들이 300년 전의 개혁주의적 모임을 기념할 수 있는지는 의문스러웠다.
1872년 모임에서 발언권을 얻은 카이퍼는 많은 참가자들의 야유와 방해를 무릅쓰고 그 문제를 지적하였다.

그렇게 카이퍼 목사는 계속 외롭게 싸워나갔다.
교회개혁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회(총회?), 여당 성직자들, 교회위원회들, 교회재판소, 교인들은 교회개혁을 원치 않았다.
영향력있는 많은 목사들은 역시 그 일을 거들지 않았다.
단지 암스텔담 교회의 소수 개혁주의자와 철저한 정통주의자들만이 그의 사역을 높이 인정해 줄 뿐이었다.

1874년 봄... 그가 국회로 나서기까지 교회 안에서의 개혁은 그렇게 진행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정치적 관심에 이의를 제기한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정치공포증은 칼빈주의적인 것도 기독교적인 것도 윤리적인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