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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

Joyfule 2021. 7. 31. 08:13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            


3) 본격적인 정치활동

1869년(32세) 우트레히트 중앙교회에서 비국립학교 설립 문제로 흐룬(칼빈주의적 정치노선을 지녔다.)을 처음 만난 카이퍼 박사는, 1871년 흐룬이 이끄는 반혁명당의 국회의원 후보자로 나섰지만 당선되지 못했다.
당시 정당활동에서 언론(신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던데 비하여 반혁명당은 그들을 지지하는 신문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때(1872년) 카이퍼가 주도하는 헤라우트 협회는 주간지였던 헤라우트지를 슈탄타르지라는 일간지로 재창간하였고, 그는 본격적으로 정치적인 언론활동을 벌였다.

1873년 그는 반혁명당의 임시 국가위원회 의장으로 선거전을 전개하였고, 그 선거에서 반혁명당은 인상적인 결과를 얻었다. 비록 '하우다' 주 예비선거에서 승리한 카이퍼가 본선거에서 지고 말았지만...
하지만 그들은 거기에 굴하지 않는 비전을 갖고 있었다.

1874년 카이퍼는 하우다 주의 중간선거에서 승리하여 하원의석을 차지하였다.
국회의원이 된 그는 국회의원과 목회를 병행할 수 없다고 규정한 헌법에 의해 명예퇴직을 했지만, 교회의 내부개혁을 위하여 피택장로가 되었다.

36세의 국회의원 카이퍼는 먼저 '교육의 자립(비국립학교 문제)'을 위해 투쟁하였다.
그리고 노동법 제정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연설과 슈탄다트지를 통한 정치 활동은 적절한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그럴수록 반대자들의 중상모략과 적대감정은 더해만 갔다.

급기야 그는 1876년 2월 심각한 신경쇠약에 빠져서 모든 일에서 손을 떼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는 편집장으로서 두 신문의 기사를 쓰고, 편집을 해야했고, 그를 향한 정치적 공세는 더 피곤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교회선거는 교회개혁을 후퇴시키는 결과로 진행되고 있었고, 고등교육법안은 자유주의의 기반을 뒷받침해 주었으며, 목회활동을 이은 정치활동은 재정적 어려움을 초래했다.
그는 힘든 상황에서 너무 자기 몸을 혹사시킨 것이었다.

결국 의사의 충고에 따라 카이퍼는 스위스 등지로 약 15개월간의 '휴양'을 떠나게 되었다.
1877년 5월에 화란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계획을 재정비하고서 7월 국회의원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자유로워진 그를 암스텔담 교회가 청빙하였지만 그는 모든 청빙을 거절하였다.
슈탄다트지는 그를 편집국장으로 위임하였고, 그는 계속해서 정치적 소신을 지켜나갔다.

그때까지 계속되었던 정치적 사회적 이슈는 단연 비공립학교에 대한 것이었다.
정부는 비공립학교에 재정지원을 할 수 없다는 기존입장을 재확인하면서 자유주의자들을 옹호했고, 카이퍼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교육협회는 병폐를 낳고 있는 국공립학교에 맞서기 위해 싸웠다.
여론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비공립학교를 억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세상을 떠난 흐룬의 뒤를 이어 반혁명당은 카이퍼를 지도자로 지명했다.
카이퍼는 이때 당시의 정당들이 할 수 없었던 혁신적인 일을 해내었는데, 바로 당조직과 정강을 갖춘 정당을 만든 것이었다.
반혁명당은 '원칙'있는 신념을 갖게 되었고, 카이퍼는 그것을 위해 슈탄다트지의 영향력을 십분 발휘하였다.

1879년 국민선거에서 반혁명당은 11석의 하원을 당선시켰다.
관례상 정당 지도자가 하원의석을 차지해야 했지만, 카이퍼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고, 선거 결과에 대해서도 흡족하였다.

그의 활동이 정치적으로 나아갔다고는 하나, 카이퍼가 교회개혁에서 마음이 떠난 것은 아니었다.
암스텔담 교회 선거위원회는 그를 장로로 임명하였고, 그는 다시 교회재판소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게되었다.

그의 교회적, 정치적, 사회적 활동은 이제 개혁주의 대학의 설립이라는 수순을 밟기에 적절하게 준비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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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퍼는 패배에 굴하지 않고 그의 동료들을 이렇게 독려했다.
"Ora et labora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