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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 내프의 생애

Joyfule 2018. 2. 18. 16:58

 

 

야곱 내프의 생애

(JACOB KNAPP, 1799-1860?)


유명한 복음 전도자였던 야곱 내프 장로는 위로부터의 강한 능력을 받았으므로 한때 그의 이름은 영적인 능력에 대한 동의어가 되다시피 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회를 통하여 구원받았다고 고백한 때문에 그는 수를 파악하다가 잃고 말았으며, 100,000명이 넘은 후 집계하는 일을 포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내프 장로는 복음전도 사역의 개척자였다.
그는 아마도 미국 북부 지역에서 자신의 모든 시간을 복음 전도에 바쳤던 첫 번째의 사람이었다고 본다.
당시 복음 전도자들은 거의 없었다.
신약 성경에 나와 있는 이 중요한 직분은 거의 무시되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때에 옛 캘빈주의의 가르침이 우세한 때문이었다.
옛 캘빈주의 자들은 복음 전도자들의 절박한 호소가 없이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택함 받은 자들을 구원하신다고 믿었다.
그들은 복음 전도자들이 하나님의 택정을 입지 못한 사람들을 설득해서 신앙을 고백하게 할까봐 두려워 했다.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자녀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택정함을 입지 못했을 까봐 두려워한 때문이었다.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이런 신앙이 복음 전도에 큰 장애가 되었다.
웨슬리의 수고와 대 전도자들인 피니나 무디의 활동으로 이 숙명론적인 신앙은 물러나게 되었다.
내프 장로는 극단적인 캘빈주의 자들의 반대에도 불고하고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이 사람들에게 임하게 했고, 그의 사역을 통해 수많은 무리들이 그리스도께 회심토록 했다.


야곱 내프는 1799년 12월 17일 뉴욕 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양친의 생활 정도는 중산층에 속했다.
그들은 감독교회의 교인들이었으며 내프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출석했고 신조와 교리를 가르침 받았다. “나의 마음은 일찍부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나는 은밀한 기도를 드렸으며, 내 영혼의 미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를 하나님께서 내게로부터 데려 가시던 17세가 되는 여름까지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을 가지지 못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의 어머니의 죽음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그로 하여금 기도와 성경 말씀 연구에 빠지게 했고, 이전에 가질 수 없었던 간절함으로 하나님의 집을 찾게 했다.


그는 죄를 깊이 개달은 까닭에 안식을 누릴 수가 없었다.
“나는 자주 광으로 달려가거나 조용한 밤에 작은 숲을 찾아가서 하나님께 기도로 나의 마음을 쏟고는 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자신의 영혼에 관해서 고민했음으로 그의 건강은 나빠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한 주일 아침 나는 성경과 찬송가를 가지고 숲 속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때의 결심은 나의 영혼이 구원을 받지 못 한다면 결코 돌아오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보거나 들을 수 없는 거리쯤 가서 풀이 있는 언덕에 무릎을 꿇고는 기도하고 읽으며 읽고 또 기도했습니다.”
그는 간절히 기도했고 그의 영혼은 많은 고뇌의 어려움을 겪었다.
“나의 영혼은 기쁨으로 들뜨는 것 같더니 조금 지나자 죄책감의 무거움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급히 일어나 하늘을 우러러 보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나를 받으시기 위해 두 팔을 펴고 내려오시는 것을 보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 영혼은 내 속에서 뛰게 되었고, 복되신 주님께 찬양이 터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새들의 아름다운 소리는 나의 찬송과 조화를 이루는 것 같았고, 주위를 돌아보니 태양은 더욱 특별한 빛을 비추는 것 같았고, 나무들이 부드러운 바람에 춤을 추었고, 하나님의 뜻에 달콤한 복종을 나타내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자연들 즉 무생물이나 생물들이 다 큰 소리로 하남님을 찬양하는 것 같이(전에는 못 들었지만) 들렸습니다.”

그렇게도 분명하게 구원 받았던 내프는 약 1년 후 타락한 상태에 빠져서 약해졌음으로 운동을 신앙으로 여기게 까지 되었다.


죄에 대한 깨달음이 단도처럼 그의 마음을 종종 찔렀음으로 그는 자주 큰 양심의 가책을 받았었다.
그는 춤추는 곳에 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날 밤에 침례교회에서는 기도 모임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생각에 너무도 강하게 사로잡혔던 까닭에 춤추는 곳에 가는 대신 기도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와 그의 몇 동료들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돌라가기를 기도했다.
이것이 그 곳에 부흥이 일게 했으며 60여명의 청년들이 그리스도께 인도되게 되었다.


내프는 거기서 세례를 받고 침례교회에 참가하게 되었으며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열심 있는 일군이 되었다.
그는 그의 이웃들을 모아 기도회를 조직했으며 여러 영혼들을 주께로 인도했다. 그가 20세가 되었을 무렵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생활을 스스로 꾸려가도록 농장을 주려했으나 야곱은 교육을 받고 싶은 강한 소원과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복음 사역자로 부르고 계셨음을 느꼈다.
여러 가지 일들을 열심히 하고 가난과 무지로부터 오는 많은 심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훌륭한 교육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단련시켜 주시고 매일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도록 그는 은밀한 기도를 많이 드렸다.
이때에 그는 목사님이 안 계신 침례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했다.
약 두 달 동안에 그 교회에 나오던 거의 모든 청년들이 구원 받게 되었다. 한 때 내프는 학교에서 가르쳤으며 많은 집회를 학교와 다른 곳에서 가졌다.


그는 규칙적인 설교를 하려 하지 않았지만 많은 영혼들이 그의 수고로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되었다.
설교에 대한 자신의 무능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는 그만두려고 결심한 적도 있었다.
그는 규칙적인 설교를 하려 하지 않았지만 많은 영혼들이 그의 수고로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되었다.
설교에 대한 자신의 무능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는 그만두려고 결심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홍수처럼 밀어닥친 고통은 그로 하여금 결국 교회 당국에 설교할 수 있는 면허를 달라고 요청하게 만들었다.
1822년 그는 시험 설교를 거쳐 설교자로서의 허가를 받았으며 그때 그의 나이는 23세였다.
얼마 동안 그는 새로 창립된 해밀턴 대학교에서 신학 교육을 받게 되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여러 곳에서 설교하게 되었는데 사람들의 반감을 사지 않고 그들을 기쁘게 해주는 설교를 하려고 했으므로 그는 기쁨과 능력을 대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1825년에 그는 졸업장을 받았고, 뉴욕 스프링필드에 있는 한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어 5년간 목회하게 되었다. 그가 목회하는 동안 그 교회에서 약 60명이 고백하기를 그리스도께로 회심이 되었다고 했다.
그 후 그는 뉴욕 워터타운에 있는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그 교회에서 3년간 목회하게 되었는데 교회가 적고 가난했지만 담임하는 동안 약 200명의 회심 자들을 세례 주게 되었다.


내프가 복음 전도 사역에 대한 분명한 소명을 받은 때는 1833년이다.
그의 많은 칼빈주의적 형제들은 부흥 집회 같은 것을 믿지 않았으므로 그가 복음 전도 사역에 관여하는 것을 매우 반대했다.
그는 며칠 계속되는 집회를 갖기 시작했고, 이들 집회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드디어 나다나엘 켄드릭 박사로부터 조언을 받게 되었는데 뉴욕 주의 침례교 지방회로부터 제퍼슨과 오세고 카운티 지방에서 활동할 수 있는 부흥사로 임명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드디어 나다나엘 켄드릭 박사로부터 조언을 받게 되었는데 뉴욕 주의 침례교 지방회로부터 제퍼슨과 오세고 카운티 지방에서 활동할 수 있는 부흥사로 임명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 제안을 좋게 받아 들였는데 그런 임명은 나의 영향을 증가 시킬 것이고, 나의 반대자들을 침묵시킬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나는 140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지방회 모임에 가게 되었다.
나는 그 곳 형제들과 얼마 어울리지를 못했는데 그것은 내가 친구로 여겼던 사람들이 내게 싸늘하게 대해준 때문이다. 어느 곳에서나 개인적인 영향력이 인정되었던 켄드릭 박사와 같은 분의 서명이 곁든 나의 신청서였지만 즉시로 결정적인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한 분이 들은 바를 말해야만 했고 다른 이는 복음 전도의 방법에 대한 나의 견해를 설명해야 하는 긴 논쟁으로 서로 의견이 엇갈린 채 위원회에서 내게 대한 임명을 묻기로 했는데, 위원회는 반대 보고를 했고 나의 신청은 거절되었다. 슬픔과 굴욕감에 사로잡힌 상태로 나는 150마일 떨어진 로레인으로 예약된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가게 되었다. 약 50마일 까지 주께서 안전하게 인도해 주셨을 때 나의 말은 병들어 죽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오세고로 데려갈 형제를 구했고, 세켓의 항구로 가기 위해 배를 타게 되었다. 우리가 떠난 조금 후 강한 바람이 불었는데 한동안 생명을 보존할 기회가 끊어진 것 같았다. 나는 매우 상심해 있던 까닭에 사망과 생명 사이의 선택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바다로 인해 고통당하는 자신을 생각했고, 땅에서의 어려움과 거짓 형제들로 말미암은 고통을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경험할 수 없었던 보다 더 큰 기쁨과 슬픔을 위해 나를 지켜 주셨다. 지방회에 의한 거절은 잠시 동안 나를 낙심케 했다. 나는 임명을 받을 줄로 알았고, 그래서 교회들에게 큰 영향을 나타낼 줄로 알았는데, 반대하는 목사들은 더욱 많았고, 더욱 어렵게 되었다. 위원이 아닌 사람들도 터놓고 반대하게 되었고 매우 난폭하게 대했다. 내 마음은 수심에 잠겼고 나는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르게 되었다. 낙심 중에 나는 나의 짐을 주께 맡겼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힘썼다.
나는 주께 부르짖었다.
곧 주께서는 자신의 모습의 밝은 빛을 보이사 주님의 길을 알려 주셨다. 금식과 기도로 온 종일을 보낸 후 자정까지 금식을 계속했는데 내가 있던 곳이 하나님의 영광의 찬란함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의 임재가 내게 나타났는데 정확하게 보이는 형태는 아니었으나 그가 인격적으로 내게 오셔서 내가 그의 음성을 듣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게 일 할 장소가 없었느냐? ’ 하시기에 나는 ‘아니요, 하루도 쉰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내가 네 일을 복주고 지켜주지 않았더냐? ’ ‘아니요, 주께서 지켜 주시고 복주셨습니다. ’
‘그렇다면 네 형제들을 의지하는 대신 나를 의지하는 법을 배워라. 염려하지 말고 가서 네 일을 계속하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
그 날 밤부터 나는 나의 형제들의 좋은 의견들을 제쳐 놓겠다는 기쁜 마음이 있었고, 세상을 미련 없이 버린 것처럼 모든 것을 떠나 하나님 만을 의지하게 되었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 나는 나이든 형제들과 다른 이들의 의견에 지나치게 신경을 썼으므로 나의 젊음과 경험이 없음을 불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나의 유일하고도 실수가 없으신 안내자이심을 가르쳐 주셨다.”


“나는 기쁘게 하나님의 뜻을 따랐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임재가 내게 계속 머물게 되었다.
주를 의지하는 일에 우리는 얼마나 소홀했던가!
얼마나 우리는 피조물들을 의지했던가!
내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지시를 찾기 위해 노력한 후 내가 알게 된 사실은 하려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의 명확한 인상을 마치 귀에 들리는 음성처럼 얻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내게 대한 하나님의 임재의 표현에서 하나님은 나와 다른 복음 동역자들에 관한 것을 일러 주시지 않았으며 가장 부드러운 방법으로 그들을 떠나서, 그들은 그들의 길을 가게하고 나는 주님을 따르도록 명하셨다.
그래서 교단을 통한 증진에 대한 나의 동경은 고침을 받았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회심토록 하는 유일한 목적을 위해 남김없이 내 모든 것을 헌신 하도록 만들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변명을 심판 날에 맡기게 하시고, 악하거나 선한 보고를 통해서 계속 영혼 구원을 위해 일하게 하셨다.
일 년이 다 가기 전 하나님의 계획이 나의 것 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게 되었다.
복음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아 행할 때 나의 영혼은 매우 기뻤고 유익했다.
주께서 이 곳 저 곳으로 생각지 못했던 곳 까지도 인도하셨다.
하나님의 길을 따라 한발 한발 옮겨지도록 어려움은 나를 기도하게 했다.
풀무불이 7배나 더 뜨겁게 되지 않는 다면 순금이 되도록 찌꺼기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
나의 친절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내게 필요하지 않은 것을 주신 일이 없으셨다.”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이 깊은 체험을 얻고, 전적으로 헌신한 후 내프는 수많은 영혼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했다.
수천의 사람들이 그의 집회에서 회심되었다고 고백했으며 많은 이들이 성령 충만을 구해서 얻게 되었다.
복음을 전하는 그의 능력이 어찌나 강했던지 그가 가서 전하는 곳마다 불신자들은 창백해졌고 만인 구원설을 믿던 자들이 그들의 주장을 포기했던 것이다.


“그때야말로 황금기였고, 하늘의 계절이었다. 그들에 대한 기억은 매우 귀한 것이었다.” 라고 내프는 말했다.
그의 수고가 너무 컸으므로 많은 이들은 그가 어떻게 일들을 계속할 수 있을까 의아해 했다.
집회 인도로 인한 심한 수고 뒤에도 그는 가끔 사슴처럼 날센 자신을 느끼게 되었다.
“적은 잠과 음식을 취하고도 성령의 충만을 받고는 얼마나 인내할 수 있으며, 또 일할 수가 있는가를 생각할 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잘 기름 친 기계가 적은 마찰로써 수년간 밤과 낮으로 잘 돌 수 있는 것과 같다.” 라고 내프는 말했다.


내프가 수고했던 많은 곳에서 사업들이 잠시 중단되었으며 집회가 하루에 세 번 열렸고, 자주 철야 집회가 있었다.
농부들은 마차에다 이웃 사람들을 태워서 집회에 데려오곤 했다.
너무 많은 군중이 모였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자리를 잡도록 서 있거나 집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영혼들을 위해 기도했다.
한 곳에서 내프가 집회를 인도하게 되었는데 기도하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았던지 회의주의 자였던 의사가 불안을 느껴 재산을 헐값에 팔아넘기고 캐나다로 이주했던 것이다.
그 의사는 말하기를 “기도하는 사람들 때문에 헛간에도 갈 수 없었고, 숲 속에도 갈 수 없었다. 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볼 때 나는 차라리 연옥(?)에서 사는 것이 낫겠다.”라고 했다.
내프가 집회를 열었던 뉴욕의 한니발 센터 교회는 생명이 없는 교회였고, 날씨는 우울했으며 모든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으므로 수십 명의 사람들이 회심되었다.
뉴욕에 있는 아우번에서 내프가 집회를 인도하게 되었을 때 하루는 난폭자들이 집회를 방해하려고 했다.
“같은 날 밤 그들 중 몇 명이 그 집회에 참석했다가 하나님의 진리의 능력에 의해서 꺼꾸러트림을 당한 후 사람들에게 들려 집으로 운반 되었다.”
뉴욕의 우티카에서 부흥회 기간 동안 800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회심되었다고 고백했다.
메릴랜드 발티모어에서 있었던 내프의 첫 번째 연속적인 집회의 결과로 10,000 명이 그리스도에게로 회심되었다고 고백했다.
1841년 내프가 보스턴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할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전 도시 위에 임하셨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임재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이 보였다”라고 내프는 말했다.
풀턴 목사님은 말하기를 “극장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반대로 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증가하게 되었다.” 고 했다.


1841년 마사추셑 로우엘에 “주께서 능력으로 임하셨고, 강력한 역사가 있었다. 한 큰 솜 공장이 쉴 수밖에 없었는데 직공들이 너무도 큰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으므로 그들이 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곳에서는 내프의 수고의 결과로 1,500여명이 그리스도께로 회심되었다” 고 고백했다.
그가 그 곳을 떠나게 될 때 “기쁨의 노래 소리와 많은 사람들의 울음 소리가 땅과 하늘을 흔들어 놓았다.”
마사추셑 살렘 전 도시가 1843년 내프의 부흥집회 시 하나님의 능력으로 뒤 흔들렸다. 그의 친구들이 자동차를 세내어 행렬을 지어 보스턴 까지 배웅했다.
“1860년 다시 보스턴에서 집회를 인도하게 되었는데 많은 기도가 성령의 충만이 있게 했고, 하나님의 임재 때문에 우리가 있는 곳에 오는 자들은 그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라고 내프는 말했다.
“그 당시 하나님의 은혜로운 충만이 어찌나 나를 가득 채웠던지 나의 약한 몸의 기관들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 까지 내프 장로와 관계된 특별한 일 중 몇 가지를 소개했다.
내프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사람들의 격동이 있었고, 영혼들이 구원을 간구하게 되었으므로 어떤 이들은 그 흥분을 불평하기도 했다.
“훨씬 덜 중요한 사업에나 운동이나 정치 등에도 사람들의 흥분이 있는데 신앙에 흥분이 없다는 것”을 내프는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죄에서 건짐을 받는 순간적인 구원에서 어찌 흥분이 없을 수 있는가? 사도행전의 기록은 세계가 뒤집힌 흥분의 역사적인 기록이다.”라고 내프는 말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