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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빈민 선교의 성자 노무라 목사,

Joyfule 2018. 2. 19. 20:39

  

70년대 빈민 선교의 성자 노무라 목사,

日서 은둔 첫 인터뷰… “청계천 빈민굴은 내 신학교였다”

 


1970년대 서울 청계천 선교는 세계 기독교계에서 빈민선교의 대표적 사례로 꼽는 역사적 사역이다. 이 사역은 전 재산을 팔아 헌신했던 한 일본인 목사의 피와 땀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무라 모토유키(78) 목사. 그는 젊음을 청계천 사역에 바쳤고 이 사역이 뿌리를 내리자 1985년 일본으로 돌아가 은둔하면서 한국 교회에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기자가 오랜 수소문 끝에 지난 14일 도쿄에서 4시간 거리인 야마나시현 야쓰가다케산 남쪽 산기슭 산골 교회로 그를 방문했을 때 노무라 목사는 “기어코 찾아오셨군요!”라며 마른 손을 내밀었다. 여위었지만 강한 손이었다.

노무라 목사는 “지금까지 해지도록 속옷을 입는 가난한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며 “산골 마을에서 20여년간 목회를 하며 유기견을 키우고 있다”고 근황을 알려주었다. 그는 “한국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나라”라며 감격해했다.

노무라 목사는 68∼85년 청계천 일대에서 제정구 전 국회의원(99년 작고·빈민운동가), 황화자 전 작은자복지선교회장(97년 작고), 김진홍 목사(구리 두레교회) 등과 함께 복음 전파와 구제에 힘썼다. 그는 청계천 빈민의 참상과 그곳 어린이들의 헐벗고 굶주린 모습에 충격을 받아 73년에는 도쿄 자택을 팔아 빈민 구제와 탁아소 건립 비용으로 사용했다.

노무라 목사는 박정희 정부가 청계천 일대 빈민촌을 철거하자 김 목사 등과 협력해 경기도 남양만 공동체 건설 이주비 수억 원을 마련하는 등 빈민선교에 젖줄을 댔다. 서독(독일)과 호주 교계를 찾아 지원을 호소, 탁아소 건립비용과 2000명의 절대 빈곤층 아이들이 20년간 매일 식사를 제공 받을 수 있는 급식비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아울러 남양만 이주 철거민들의 자립을 위해 뉴질랜드를 수차례 방문, 종자 소 600여 두와 최신 낙농기기를 들여왔다. 당시 그는 한국 중앙정보부로부터 조사를 받는 등 많은 탄압을 받았다.

그가 한국에 다시 알려진 것은 2007년 청계천 옛 사진과 관련 자료 2만여 점을 청계천문화관에 기증하면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한국에서 행한 선교 활동을 드러내지 않고 ‘노무라 할아버지’임을 강조했다.

노무라 목사는 “70년대 초 제암리교회를 찾았을 때 그곳 권사님들이 우리 가족을 위해 귀한 설탕물을 타주시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청계천 빈민굴은 내게 신학교였다. 예수의 얼굴을 본 곳도 그곳 움막이었다”며 한국 빈민선교의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야마나시=글·사진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

70년대 빈민 선교의 성자 노무라 목사,日서 은둔 첫 인터뷰… “청계천 빈민굴은 내 신학교였다”

  

1970년대 서울 청계천 선교는 세계 기독교계에서 빈민선교의 대표적 사례로 꼽는 역사적 사역이다. 이 사역은 전 재산을 팔아 헌신했던 한 일본인 목사의 피와 땀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무라 모토유키(78) 목사. 그는 젊음을 청계천 사역에 바쳤고 이 사역이 뿌리를 내리자 1985년 일본으로 돌아가 은둔하면서 한국 교회에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기자가 오랜 수소문 끝에 지난 14일 도쿄에서 4시간 거리인 야마나시현 야쓰가다케산 남쪽 산기슭 산골 교회로 그를 방문했을 때 노무라 목사는 “기어코 찾아오셨군요!”라며 마른 손을 내밀었다. 여위었지만 강한 손이었다.

노무라 목사는 “지금까지 해지도록 속옷을 입는 가난한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며 “산골 마을에서 20여년간 목회를 하며 유기견을 키우고 있다”고 근황을 알려주었다. 그는 “한국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나라”라며 감격해했다.

노무라 목사는 68∼85년 청계천 일대에서 제정구 전 국회의원(99년 작고·빈민운동가), 황화자 전 작은자복지선교회장(97년 작고), 김진홍 목사(구리 두레교회) 등과 함께 복음 전파와 구제에 힘썼다. 그는 청계천 빈민의 참상과 그곳 어린이들의 헐벗고 굶주린 모습에 충격을 받아 73년에는 도쿄 자택을 팔아 빈민 구제와 탁아소 건립 비용으로 사용했다.

노무라 목사는 박정희 정부가 청계천 일대 빈민촌을 철거하자 김 목사 등과 협력해 경기도 남양만 공동체 건설 이주비 수억 원을 마련하는 등 빈민선교에 젖줄을 댔다. 서독(독일)과 호주 교계를 찾아 지원을 호소, 탁아소 건립비용과 2000명의 절대 빈곤층 아이들이 20년간 매일 식사를 제공 받을 수 있는 급식비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아울러 남양만 이주 철거민들의 자립을 위해 뉴질랜드를 수차례 방문, 종자 소 600여 두와 최신 낙농기기를 들여왔다. 당시 그는 한국 중앙정보부로부터 조사를 받는 등 많은 탄압을 받았다.

그가 한국에 다시 알려진 것은 2007년 청계천 옛 사진과 관련 자료 2만여 점을 청계천문화관에 기증하면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한국에서 행한 선교 활동을 드러내지 않고 ‘노무라 할아버지’임을 강조했다.

노무라 목사는 “70년대 초 제암리교회를 찾았을 때 그곳 권사님들이 우리 가족을 위해 귀한 설탕물을 타주시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청계천 빈민굴은 내게 신학교였다. 예수의 얼굴을 본 곳도 그곳 움막이었다”며 한국 빈민선교의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야마나시=글·사진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


[성탄 특집 빈민의 성자 노무라 목사] “움막 여인에게 손 내민건 나 아닌 예수님”

 

(상) 1973년 성탄전야 청계천 뚝방촌

1973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의 청계천 하류 뚝방촌(현재 군자차량기지 일원). 청계천을 따라 뚝방 밑으로 형성된 빈민가에도 성탄 전야가 찾아왔다. 그러나 경사진 둑을 파고 지은 움막, 얼기설기 지은 판잣집 등 1600가구 어느 곳도 웃음소리가 새어나오지 않았다. 한기와 배고픔에 우는 아이들 소리, 어른들의 싸우는 소리만이 청계천 악취와 뒤섞여 삶의 고단함을 그대로 보여줬다.

이날 한국 정부로부터 어렵게 7일간의 체류비자를 얻어 입국한 일본인 노무라 모토유키(당시 41세) 목사는 슬럼가 주민들에게 말씀과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기 위해 이집 저집 허름한 문을 열며 기척을 살폈다. 73년 한 해만도 10여회에 걸친 청계천 방문이었다. 일본인 목사가 빈민촌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 한국 정부는 ‘안보’를 이유로 탐탁지 않게 여겨 중앙정보부 등이 사찰에 나서는 시대였다. 체류 기간이 7∼15일 정도로 제한된 이유이기도 했다.

지난 14일 일본 야마나시현 야쓰가다산 산골 베다니교회에서 만난 노무라 목사는 두툼한 앨범 10여권과 각종 자료를 보여주며 당시를 간증했다.

“동료 일본인 목사 등과 청계천 움막의 비닐 문짝을 살짝 열며 한국말로 인사를 했어요. 그랬더니 한 아주머니가 놀라며 ‘조금 기다려 달라’고 했어요. 두어 평 남짓한 움막을 대충 치우는 듯하더니 우리를 맞았어요. 애 셋을 둔 과부였습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오들오들 떨며 이방인의 방문을 신기한 듯 바라보더군요.”

한국 통역이 하나님 말씀을 전하러 온 일본 목사님이라고 하자 여인은 밖으로 나가 한참 후 비닐봉지에 쌀을 구해 왔다. 그리고 “그 오염된 청계천 물(청계천변 지하수를 마시고 된통 설사를 한 적이 있었다)로 쌀을 씻어 연탄불에 밥을 하더라”고 말했다. 여인은 목자를 위해 상자 위에 청어를 올려놓고 들지 않는 칼로 토막 쳐 국을 끓였다.

“밥은 설익었고, 생선 냄새는 역했어요. 한데 여인이 신문지 위에 밥상을 차리면서 ‘목사님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세요’ 하는 겁니다. 안 먹고 싶었어요(웃음). 한데 애들이 덜덜 떨며 우리를 지켜보는 겁니다. 먼저 먹어야 아이들도 먹을 것 아닙니까.”

일행은 예수가 탄생한 말구유같이 허름한 그곳에서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노무라 목사가 수저를 들었을 때 아이들과 함께 한 사람이 더 있는 걸 보았다.

“제가 일본과 미국에서 대학을 세 곳이나 다닌 사람입니다. 저는 그날 거기서 예수 형상을 보았어요. 움막 거적을 배경으로 가난한 자와 함께하신 예수님을요.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또렷이 보여주셨어요. 청계천은 제게 신학교였습니다.”

노무라 목사는 그 후 여인과 아이들을 위해 판잣집을 얻어 주었다. 그리고 성도가 된 여인은 청계천이 철거되자 그와 김진홍 목사 등이 이끄는 새로운 주거지 남양만 간척지로 떠났다.

노무라 목사는 자신이 찍은 여인의 움막 사진을 가리키며 눈시울을 붉혔다.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듯 밥상을 대접한 그 여인이 훗날의 ‘남양만 활빈교회 조금자 권사’(98년 무렵 작고)이다.

또 다른 사진. “그 해 찍은 이 여인은 폐결핵으로 남편을 잃었어요.”

그가 보여준 여인의 사진 밑에는 파란 글씨로 ‘切なる祈り(간절한 기도)’라고 써 있었다. “청계천 뚝방촌에는 육신과 심령, 물질이 가난한 사람들이 수만 명이었다”며 “구원을 기다리는 그들에게 교회가 유일하게 손을 내밀었을 뿐 아무도 돌보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사진 속 여인은 포대기로 아기를 업은 채 기도하고 있다. 그런 엄마를 지켜보는 큰아이의 눈망울이 안쓰럽다. 노무라 목사는 “남편을 잃고 도시 빈민으로 전락한 여인에게 손을 내민 예수의 사랑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무라 목사는 누구

1931년 일본 교토 출생. 모태 신앙으로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 노무라 가스코(99)는 아오야마(靑山)대학 신학과를 졸업한 후 소비자운동에 나서 2005년 노벨상 후보에까지 오른 인물.

노무라 목사는 도쿄수의축산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해 켄터키성서대학, 남동부기독교대학, LA바이올라종합대학, 페퍼다인대학원 등에서 수학했다. 61년 귀국 후 목회 활동을 하다 70년대 초 청계천 빈민의 참상을 보고 충격을 받아 한국 빈민선교에 나섰다. 교회 주일학교 교사 시절인 50년 무렵 유학생 김오남(전 전남대 교수)씨를 만난 것 등을 인연으로 68년 한국을 첫 방문했었다. 부인 노무라 요리코와의 사이에 딸 메구미와 아들 마코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