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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Joyfule 2006. 6. 9. 00:42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尤, 1859-1916)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아버지 존(John Underwood)과 
어머니 엘리자벧(Elisabeth Grant Marie)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881년 뉴욕대학을 졸업하여 문학사학위를 받고 그해 가을
 '뉴 브런즈윅' 시에 있는 화란 개혁 신학교
(The Dutch Reformed Theologica Seminary)에 입학하였다. 
언더우드는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학업에는 물론 전도활동에도 열심을 내었다. 
1883년 여름과 이듬해, 즉 신학교 마지막 해에 그는 뉴 저어지(New Jersey) 주 
폼턴(Pomton)에 있는 교회를 맡았다. 
이 교회를 담임하는 동안 언더우드는 선교사의 비전을 갖게되었고 
1884년 11월 목사안수를 받고 뉴욕 시에 있는 한 교회의 협동목사로 있으면서 
인도선교를 위하여 의학을 1년간 공부하기도 하였다. 
그는 엘린우드 박사의 지원과 '맥윌리암스'의 기부(6천달러)로 1884년 7월 28일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 의하여 한국 최초의 목회선교사(Clerical Missionary)로 
파송되었다. 
언더우드는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1월 25일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 
그는 한국 사회가 갑신정변으로 불안한 상황이었으므로 일본에 우선 정박하였던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헵번(I, C, Hepburn) 박사의 집에 기거하면서 선교사업에 필요한 
훈련을 받는 한편 미국 선원들을 위한 전도집회를 열었고, 
이수정에게서 2개월간 조선말을 배우고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가지고 
한국으로 부임하였다.
언더우드가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이었다. 
언더우드는 4월 7일 위험을 무릅쓰고 상륙하였다. 
언더우드는 이 당시부터 아펜셀러와 함께 이수정 번역의 마가복음을 
재 번역하기 시작했으며 영한사전과 한영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하고 
1886년 3월 29일 설립된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당시 기독교가 공인되어 있지 않는 상황에서 목사, 혹은 선교사라고 
공공연히 드러낼 수 없었으나, 제중원 교사라는 직함은 
어디든지 통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그의 선교사업을 위하여 좋은 것이 되었다. 
언더우드는 1885년 말부터 고아원 운영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중 
1886년 2월 14일 미국 공사관을 통해 정부에 설립 허가신청서를 제출하여 
김윤식의 승인을 얻었다. 
고아원의 원장은 조선인이었으나 실제 운영은 언더우드가 맡았다. 
언더우드는 고아원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것을 장차 대학이나 신학교로 
발전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고아원 학생들 중에는 우사 김규식(尤史 金奎植)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후에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로녹대학(Roanoke College)에 유학하고 
귀국하여 언더우드의 비서로, 새문안교회의 장로로, 경신학교의 교사로, 
YMCA의 지도자로, 중국 망명 후에는 독립운동가로 활약하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입법위원 의장을 역임하였으나 한국전쟁기에 납치되었다. 
언더우드는 각처에 수많은 교회를 설립함과 동시에 각종 교육기관을 세우고 
관여하였으며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고, 제중원은 1900년 
오하이오 주 클리브랜드시에 거주하는 세브란스(L. H. Severance) 씨가 
거액을 기부하여 병원을 세웠다. 
고아원은 후일 경신학교가 되게 하였으며 1895년 새문안교회의 경영으로 
영신(永信)학당(후일 협성학교가 됨)을 세웠다.
그는 또한 교회 구역마다 초등학교를 세웠다. 
1900년대에는 두개의 신학교육기관이 있었는데 서울 소재 감리교의 
피어슨 성경학원과 장로교의 평양신학교였다. 
언더우드는 신학교의 설립 초기부터 평양에 내려가 교수하였다. 
언더우드는 고등교육 실시를 위하여 대학의 설립을 구상하여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였는데, 1915년 3월 5일 언더우드를 교장으로 하여 
미국 북장로교, 감리교, 캐나다 장로교 등 각 선교부와 연합으로 
서울 종로에 있는 기독교청년회 회관에서 60명의 학생으로 시작된 
'경신학교 대학부'가 연희전문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언더우드는 서울에 들어와 서서히, 그리고 착실히 활동을 전개하여 
1887년 9월 27일 정동에 있는 자기 집 사랑방에 14명의 조선인 신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새문안교회의 시작이었다. 
교회 창립에 모인 14명 중 13명은 언더우드가 입국하기 전 만주에서 
로스(John Ross)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던 서상윤 등의 인도로 신자가 된 이들이었다. 
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와 서상윤 등 초기 조선 신자들과의 공동 노력으로 
세워졌다고 말할 수 있다. 
새문안교회는 스스로 전도하고 스스로 신앙을 고백한 조선인 신자의 첫 교회였다. 
언더우드는 1880년대 후반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수행하였는데 
제1차 전도여행(1887년 가을)은 개성, 솔내, 평양, 의주 등이었고 
제2차 전도여행(1888년 봄)은 아펜젤러와 동행하여 평양까지 갔다가 
선교부의 소환으로 돌아온 시기이다. 
제3차 전도여행은 1889년 봄 신혼여행을 겸하여 개성, 솔내, 평양, 의주 강계, 
압록강변의 마을 등이었다. 국내의 전도여행의 성과는 지대한 것이었다. 
언더우드는 어학에 관심이 많아 다방면의 사전편찬을 주도했다. 
'한-영문법'이란 책을 출간하였는데 첫부분은 문법 주석이었고, 
둘째 부분은 영어를 조선말로 번역한 것으로 도합 총 425면이었다. 
이 책은 1914년에 개정되어 사용되었다. 
두번째 책은 1890년 요코하마에서 간행된 '한어자전'이었다. 
처음 조선에 부임하였을 때 사전의 필요를 절실히 느낀 그는 5년여 동안 
단어를 수집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첫째부는 게일(James S. Gale)의 도움과 한불자전(韓佛字典) 그리고 
어학선생 송순용의 도움을 받아 한영부(韓英部)로
둘째부는 헐버트(Homer B. Hulbert)의 도움을 받아 영한부(英韓部)로 편찬하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입국 1년 뒤 '마가복음'의 첫 임시번역본을 간행하였다. 
1887년 일본 방문에서 헵번 박사로부터 성서위원회 조직을 제안받고, 
2월 7일 번역의 감수를 위한 위원회 구성을 합의하고 4월 11일 위원회의
임시 헌장과 세칙을 통과시켜 상임 성서위원회, 번역위원회, 수정위원회를 두었다. 
이때 감리교회의 아펜젤러와 스크랜튼, 장로교회의 언더우드와 헤론
(1890년 헤론 사망 후 게일이 임명됨)이 번역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888년 조선야소교서회의 조직을 제의 이듬해 조직되어 언더우드는 총무로 
선출되었고, 1890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번역되었다. 
언더우드는 또한 콜레라 퇴치 작업에 힘을 기울이고, 그리스도신문을 발행하였으며, 
YMCA를 조직하여 이사로 활동하였다. 
일본의 교육령에 의하면 교육에 종사하는 자는 일본어를 익혀야 했다. 
그리하여 언더우드는 1916년 1월 초 일본으로 건너가 하루 9시간을 일본어
공부에 매진하였는데, 이런 강행군은 그의 몸을 심히 쇠약하게 하였고, 
병이 중하여 그해 3월 조선으로 귀환하였으나 31년 전 조선에 처음 입국했던 달, 
그리고 거의 같은 날 인천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났다. 
의사의 권고에 따라 9월에 애틀랜틱 시(Atlantic City)의 병원에 입원 
1916년 10월 12일 오후 3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조선에서 그렇게도 많은 일을 했던 큰 별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참고한 글 : 이광린, 초대 언더우드 선교사의 생애 &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
(언더우드의 부인),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e) 
조선과 조선인을 그토록 사랑했던 언더우드는 
한국 개신교회의 장을 연 위대한 선교사였다. 
그의 일생은 조선을 빼놓고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 사회와 교회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불타는 선교에의 열의는 물론 사회와 문화 다방면에 걸친 그의 업적은 
개화기 풍전등화와 같던 조선의 큰 빛이었다. 
개화기 조선의 암울했던 현실에서 언더우드와 선교사들은 그 현실을 직시했고, 
그 안에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증거하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았다. 
그들의 열정은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 속에 그대로 녹아 있으며 
그들의 사랑은 오늘의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강력히 지시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충족되지 않는 현실에서 그들이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리스도 복음뿐이었으나 그 복음의 힘(Power)이 오히려 
그들의 험난한 삶을 애정과 열정 그리고 헌신으로 이끌었다. 
이제 전환기의 조선은 그들이 배에 싣고 온 복음을 통하여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비록 초기 한국교회 중 몇몇이 자생적으로 교회를 이루기도 했으나 
그들 역시 복음의 빛은 선교사들을 통하여 받아들였다.
초기 한국교회의 성립과 성장에 있어서 선교사들의 복음적 열정과 희생적 헌신은 
비록 그들 중 일부가 조선 민족이 겪고있던 암울한 시대상황에서 
냉소적이거나 방관적 태도로 일관하고 때로는 군림하는 태도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를 일궈내는 일에 그들의 땀과 피가 조선인 신자들의 복음에 대한
열정적 수용태도와 헌신과 맞물림으로서 
극대화될 수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기독교대한 성결교회 주님의교회 - 목사 박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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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선교사님의 기도문> 
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 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있는 조선 사람 뿐입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일이 있을 줄 믿나이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출처 : 가이드 포스트 2001년 5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