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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눈물 - 장영희

Joyfule 2014. 7. 30. 04:44

 

 

 

엄마의 눈물 - 장영희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그때 가져온 짐 보따리가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그대로 다락방에 방치되어 있었다. 어제는 불가피하게 미국 대학에서 썼던 자료들을 꺼내야 할 일이 있어 10년 묵은 짐을 정리하는데, 다락 한구석에 ‘영희 짐’이라고 커다랗게 매직펜으로 씌어진 상자가 눈에 띄었다. 내가 유학 간 사이에 이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어머니가 내가 쓰던 물건들을 정리해 놓아 둔 상자였다. 고등학교나 대학 때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편지, 노트, 시험지 등등 태곳적 물건들 가운데 아주 낡은 와이셔츠 갑 하나가 끼여 있었다.

열어 보니 신기하게도 초등하교 다니던 때의 물건들이 담겨 있었다. 어렴풋이 생각나는 것이, 어렸을 때 ‘생명’보다 더 아낀다고 생각했던 보물 상자였다. 동생들과 싸워 가면서 모았던 예쁜 구슬병, 이런저런 상장들, 내가 좋아했던 만화가 엄희자, 박기준, 김종래 씨들의 만화를 흉내 내 그린 그림들, 그리고 맨 바닥에는 ‘3학년 7반 47번 장영희’라고 씌어진 일기장이 있었다.

호기심에 일기장을 대충 훑어보았다. 초등학교 3학년생이 썼다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꽤 세련된 필체로(오히려 지금 나는 악필로 소문나 있다) ‘동생 태어난 날-앗, 또 딸이다!’ ‘M&M초콜릿 전쟁’ ‘이 세상에서 제일 미운 애’ 등 재미있는 제목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짐 푸는 것을 잠깐 접어 두고 본격적으로 일기를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30년 전이라는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작고 어둡던 다락방이 갑자기 열 살짜리 소녀의 꿈과 희망으로 환해지는 것 같았다.

일기는 매번 ‘이제는 동생과 사이좋게 놀아야지’ ‘다음번에 벼락공부를 하지 말아야지’  그리고 마지막에는 언제나 해야지’라는 결의로 끝나고 있었다. '결의’는 곧 ‘실행’이라고 생각하는 순진무구함이 재미있어 계속 일기를 넘기는데, 문득 12월 15일자의 엄마의 눈물’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아침에도 엄마가 연탄재 부수는 소리에 잠이 깼다. 살짝 문을 열고 보니 밤새 눈이 왔고 엄마가 연탄재를 바께쓰에 담고 계셨다. 올해는 눈이 많이 와서 우리 집 연탄재가 남아나지 않겠다. 학교 갈 때 엄마가 학교까지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면서 깔아 놓은 연탄재 때문에 흰 눈 위에 갈색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 위로 걸으니 별로 미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올 때는 내리막길인데다 눈이 얼어붙는 바람에 너무 미끄러워 엄마가 나를 업고 와야 했다. 내가 너무 무거웠는지 집에 닿았을 때 엄마는 숨을 헐떡거리고 이마에는 땀이 송송 나 있었다. 추운 겨울에 땀 흘리는 사람!- 바로 우리 엄마다. 그런데 나는 문득 엄마의 이마에 흐르는 그 땀이 눈물같이 보인다고 생각했다. 나를 업고 오면서 너무 힘들어서 우셨을까. 아니면 또 ‘나 죽으면 넌 어떡하니’ 생각하면서 우셨을까. 엄마 20년만 기다려요. 소아마비는 누워 떡 먹기로 고치는 훌륭한 의사 되어 내가 엄마 업어 줄게요.

돌이켜보면 학창 시절, 내게 ‘학교에 간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간다’의 문제였다. 우리 집은 항상 내가 다니는 학교 근처로 이사를 하여 학교에서 고작 이, 삼백 미터 정도의 거리였지만, 그것도 내게는 버거운 거리였다. 게다가 비나 눈이라도 오는 날은 학교에 가는 일이 그야말로 필사적인 투쟁이었다.

아침마다 우리 여섯 형제는 제각각 하루의 시작을 위해 대 전쟁을 치렀는데, 어머니는 항상 내 차지였다. 다리 혈액 순환이 잘 되라고 두꺼운 솜을 넣어 직접 지으신 바지를 아랫목에 넣어 따뜻하게 데워 입히시는 일부터 시작하여 세수, 아침식사, 그리고 보조기를 신기시는 일까지, 그야 말로 완전 무장을 하고 나서 우리 모녀는 또 ‘학교 가기’ 전투를 개시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어머니는 나를 업어서 데려다 주셨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화장실에 데려가기 위해 두 시간에 한 번씩 학교에 오셔야 했다. 그때 일종의 신경성 요뇨증 같은 것이 있었던지, 어머니가 오시면 가고 싶지 않던 화장실도 어머니가 일단 가시기만 하면 갑자기 급해지는 것이었다. 때문에 어머니는 항상 노심초사, 틈만 나면 학교로 뛰어오시곤 했다. 어머니와 내가 함께 걸을 때면 아이들이 쫓아다니며 놀리거나 내 결음을 흉내 내곤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신기하게도 초등학교에 들어갈 즈음에는 이미, 철이 없어서였는지 아니면 그 반대였는지, 적어도 겉으로는 그것을 무시할 수 있었다. 오히려 일부러 보조기 구둣발 소리를 크게 내며 앞만 보고 걷곤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쉽사리 익숙해지지 못하였다. 아이들이 따라올 때마다 마치 뒤에서 누가 총이라도 겨누고 있는 듯, 잔뜩 긴장한 채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걸으시다가 어느 순간 홱 돌아서서 날카롭게 “그만두지 못 해!” 얘가 너한테 밥을 달라던, 옷을 달라던!“ 하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언제나 조신하고 말없는 어머니였지만, 기동력 없는 딸이 이 세상에 발붙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목숨 바쳐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 억척스러운 전사였다.
눈이 오면 눈 위에 연탄재를 깔고, 비가 오면 한손으로는 딸을 받쳐 업고 다른 한 손으로는 우산을 든 채 딸의 길과 방패가 되는 어머니의 하루하루는 슬프고 힘겨운 싸움의 연속이었다.

그뿐인가, 걸핏하면 수술을 하고 두세 달씩 있어야 했던 병원 생활, 상급 학교에 갈 때마다 장애를 이유로 입학시험 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던 학교들.... 나 잘할 수 있다고, 제발 한 자리 끼여달라고 애원해도 자꾸 벼랑 끝으로 밀어내는 세상에 그래도 악착같이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내 앞에서 한 번도 눈물을 흘리신 적이 없었고, 그것은 이 세상의 슬픔은 눈물로 정복될 수 없다는 말없는 가르침이었지만, 가슴 속으로 흐르던 ‘엄마의 눈물’은 열 살짜리 딸조차도 놓칠 수 없었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 어디선가 본 책의 제목이다. 오늘도 어디에선가 걷지 못하거나 보지 못하는 자식을 업고 눈물 같은 땀을 흘리며 끝없이 층계를 올라가는 어머니, “나 죽으면 어떡하지” 하며 깊이 한숨짓는 어머니, ‘정상’이 아닌 자식의 손을 잡고 다른 사람들의 눈총을 따갑게 느끼며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걷는 어머니, 이 용감하고 인내심 많고 씩씩하고 하느님 같은 어머니들의 외로운 투쟁에 사랑과 응원을 보내며 보잘것 없는 이 글을 나의 어머니와 그들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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