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공부란 무엇일까
육십대 중반쯤의 남자가 화면 속 의자에 앉아 혼자 말하고 있었다.
“제가 서울대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박사학위를 받았죠.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세요? 평생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어요. 물론 서울대를 나오지 않고 박사가 되지 않아도 부자가 되거나 성공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을 보면 그때그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게 너무 힘든 것 같아요. 중고등학교 시절 육년 동안 공부를 열심히 한 것과 안 한 것이 일생에 그런 차이를 가져오는 겁니다.”
그의 옆에는 ‘공부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세워져 있었다.
듣고 보니 고등학교 삼년간 열심히 해서 서울대에 간 사람은 일생 우수하다는 증명서를 받은 셈인 것 같았다. 나는 그 증명서를 받지 못한 사람이다. 그의 말이 계속되고 있었다.
“저도 이제는 노인 세대 쪽으로 갔습니다. 새벽 네시쯤이면 일어나서 공부합니다. 만약 이 공부라는 걸 하지 않는다면 낮 열 두시까지 그 긴 시간 동안이 참 무료할 것 같아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일찍 일어나면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은 뭘하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텔레비젼을 시청하나? 아니면 운동을 하나? 다른 사람의 새벽을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다. 내가 보던 화면속의 남자가 이런 말을 했다.
“공부를 안 한 사람들의 특징을 댈 수 있습니다. 만나면 좌우편을 갈라서 특정 정치인을 씹는 게 대부분이예요. 얘기할 소재가 없는 겁니다. 그 다음이 골프 얘기죠. 그리고 쓰는 단어도 ‘대박’이라는 등 몇 마디 없어요. 용어가 다양하지를 못해요. 그게 공부들을 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인간은 마지막까지 공부를 해서 정신적 지평을 늘려나가야 할 것 같다.
며칠 전 고교동기인 친구를 만났다. 그는 내게 ‘한자 등급시험’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한자실력에 따라 급수가 다른 것 같았다. 뒤 늦게 왜 급수까지 따야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하얗게 바랜 친구는 아직 자기가 우수하다는 걸 입증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우수했던 그 친구는 운이 나쁜지 서울대학입시에서 실패했다. 그는 재수를 하면서도 방송국에서 하는 퀴즈대회에 나가 일등을 했었다.
서울법대를 졸업한 또다른 고교동기가 있다. 그는 실력이나 능력이 탁월했는데도 그 시절 사법고시를 포기했다. 육십대 중반이 넘은 나이의 어느 날 식당에서 그를 만났을 때였다. 그가 갑자기 스르르 뒤로 쓰러졌다. 그를 급히 응급실로 데리고 갔다. 가벼운 뇌출혈이었다. 연락을 받고 응급실로 달려온 그의 부인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서울법대를 나왔으면 됐지 뭐 하겠다고 나이 먹고 뒤늦게 방통대에 들어가 거기서도 꼭 일등을 하겠다고 밤을 새워 공부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일등을 하지 않으면 어때서?”
나는 그 친구의 잠재 의식 속에 들어있는 자기증명욕구를 알 것 같았다. 수재들은 끝없이 자기를 확인하고 증명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천재로 알려진 고교 선배가 있다. 그는 장관급 자리를 그만 둔 후 나이 일흔이 넘어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로스쿨에서 공부를 하고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최고령 나이의 미국 변호사로 그의 이름이 신문에 났다. 내 능력은 아직 빛이 바래지 않았다는 프라이드가 그렇게 공부를 하게 만든 것 같았다. 그렇게까지 자신의 우수성을 공인받고 싶은 것일까. 어려서 학교를 못 다녔던 팔십 할머니가 뒤늦게 대학졸업장을 받는 것도 결국은 형태가 다른 자기 증명의 심정이 아닐까.
그와는 또 다른 형태의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봤다. 대학에서 언론학을 강의하던 친구가 정년 퇴직후 몇년간 매일같이 도서관을 드나들면서 ‘장자’를 공부하고 책을 냈다.
내 또래의 어떤 변호사는 오랫동안 공부한 후에 불경해석을 여러 권의 책으로 발간했다. 대학 선배 한 사람은 회사를 퇴직한 후 지리산으로 들어가 십이년째 참선을 하고 불경을 공부하면서 수필을 쓰고 있다. 이런 종류의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인 자기증명보다는 내면의 산을 오르려는 건 아닐까. 그 산정에 서면 아래세계가 한눈에 들어오고 사물의 모습을 보다 넓은 시야에서 파악할 수 있을 거 같기도 하다.
나는 요즈음 동해 바닷가에서 호젓한 시간을 보낸다. 적막한 바닷가에 서 어떻게 혼자 지내느냐고 걱정해 주는 사람도 있다. 굳이 매일 도심에서 사람들을 인위적으로 만나고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일까. 알맹이가 없는 사람을 만나면 공허하다. 그 만남에는 울림이 없다. 만남이 아니고 그냥 스쳐 지나감이라고 할까. 그건 시간을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는 것 같다. 나는 요즈음 훌륭한 스승들을 모시고 늙은 학생이 되어 공부한다. 젊은 시절 무관심하게 대했던 공자와 맹자 그리고 노자선생을 모셔들였다. 수많은 사상가와 작가들과 책을 통해 만나 영혼을 교류하고 있다. 밀려오는 파도같이 그들이 전해주는 지혜가 방안에 넘쳐흐르고 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심오한 불경도 공부하고 예수도 더 깊이 알고 싶다. 자기 증명을 위한 공부보다 자기를 없애는 자아를 십자가에 매달아버리는 공부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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