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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내 남은 생의 첫날

Joyfule 2023. 10. 9. 00:29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내 남은 생의 첫날



따뜻한 봄볕이 내려 쬐고 있다. 내가 앉아 있는 레스트랑의 넓고 투명한 창으로 내려다 보이는 옥색의 섬진강이 미풍에 잔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강물은 바싹 다가선 산자락을 무심히 담고 있다. 그 위로 하얀 학 한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미끄러지듯 날고 있다. 강둑으로는 화사한 분홍의 꽃을 피운 벚나무들이 끝없이 도열해 있다. 연두색 기운이 산에 들에 온통 수채화처럼 풀린 봄이다. 나는 까페에 앉아 크로와상 샌드위치에 바닐라라떼 한잔으로 점심을 먹으며 섬진강의 봄을 즐기고 있다. 이제는 하루하루가 그 분이 준 선물 같다. 


오늘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어제 죽은 사람이 그토록 살기를 바라던 내일이 오늘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지금 이 순간은 그만큼 귀중한 것이 아닐까. 그런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지금 봄을 즐기고 있다. 사흘 전 봄 여행을 떠나왔다. 변산반도의 내소사를 찾아가 그 마당에 활짝 피어있는 홍매화를 보았다. 소록도를 지나 고흥반도 최남단에 있는 은가루를 뿌린 듯한 봄바다를 즐겼다. 고흥만의 벚꽃길을 걷고 이어서 섬진강변으로 온 것이다. 어떤 글에선가 읽었다. 봄은 매년 찾아온다고. 그러나 봄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 봄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말이다.

대학입시의 국어 시험시간이었다. 봄에 대해서 글을 쓰라는 작문 문제가 나왔었다. 검정 교복에 갇혀 지낸 까까머리 소년에게 봄이 어떤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색깔도 질감도 형태도 없는 무채색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다. 그때도 내게 봄은 있었다. 어둠침침하고 추운 독서실에서 점심을 먹을 때였다. 양철 반합에 점심과 저녁 두끼의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다. 딱딱하게 굳은 밥을 물에 말아서 김치와 함께 먹었었다. 그때 독서실 위쪽의 깨진 작은 유리창을 통해 노래가 흘러들어왔다. 가수 양희은이 부르는 ‘아침이슬’이라는 노래였다. 그 노래는 너울을 일으키며 내 마음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노래의 한 소절이 내게는 봄이었다.

이십대 초반 암자의 뒷방에서 고시공부를 할 때였다. 절 마당에 활짝 핀 벚나무에서 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윤기 있는 분홍의 작은 꽃잎들이 바람에 팔랑이며 떨어지고 있었다. 그 순수하고 아름다운 빛깔이 마음속까지 물들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봄도 미래에 대한 걱정에 이내 색깔이 바래고 말았다. 내 생애에 매년 찾아온 봄을 나는 매번 무채색으로 덧칠해 버렸다.

칠십고개를 올라 활짝 핀 벚꽃길로 다가온 봄은 다른 것 같다. 화사한 벚꽃의 빛깔을 있는 그대로 눈으로 받아들였다. 오후의 잔잔한 강가를 걸으면서 나는 그 강이 들려주는 소리를 마음으로 듣고 있었다. 더 이상 눈을 가리고 마음을 덮을 미래라는 걱정이 없어져서 그런지도 모른다.

이제 이런 아름다운 봄을 몇 번이나 감동을 가지고 맞이할 수 있을까. 걸을 수 없거나 감정이 무디어지면 봄은 봄이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섬진강의 물빛을 무심히 보고 있는데 친한 선배가 카톡으로 글 한 편을 보내왔다. 이해인 수녀의 글이었다. 대충의 내용은 이랬다.

수녀가 로스앤젤레스에 갔을 때 선물의 집에서 조그만 책갈피 하나를 샀다. 그 안에 적혀 있는 이런 글귀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오늘은 그대의 남은 생애의 첫날입니다.’

그걸 보는 순간 수녀의 마음에 큰 울림이 다가왔다. 삶에 대한 희망과 용기, 위로를 주는 멋진 메시지였다. 수녀는 평소에 늘 ‘오늘이 마지막인 듯이 살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그 메시지를 보는 순간부터 ‘오늘이 내 남은 생애의 첫날임을 기억하며 살게 하소서’라고 바꾸어 기도하게 됐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왠지 슬픔을 느끼게 하지만 첫날이라는 말에는 설렘과 기쁨을 주는 생명성과 긍정적인 뜻이 담겨 있어서 좋았다. 수녀는 오늘도 새소리에 잠을 깨면서 선물로 다가온 그의 첫 시간을 감사했다. 그에게 주어진 새로운 시간. 새로운 기회를 잘 살리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해야 할 일을 적당히 미루고 싶거나 게으름을 부리고 싶을 적에 수녀는 그 자신에게 충고한다. 한번 간 시간은 두번 다시 오지 않는다고. 정신을 차리고 최선을 다하자고. 성실하고 겸손하게. 문득문득 다시 생각하는 말, 그를 다시 움직이게 하고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말, 삶이 힘들 때 충전을 시켜주는 약이 되는 말 그것은 ‘오늘은 내 남은 생애의 첫날입니다’라는 말이라고 했다.

나도 그 말을 따라 생각해 보았다. 활짝 핀 벚꽃길을 걷는 오늘이 내 남은 생애의 첫날이다. 옥색의 섬진강이 들려주는 여러소리를 들으며 평안을 느낀다. 싱싱한 감동과 삶의 경이를 향해 내 남은 생의 첫 날의 걸음을 내디딘다. 나의 삶이 깨어 흐르게 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