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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글 빵을 처음 산 손님

Joyfule 2024. 4. 8. 15:29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글 빵을 처음 산 손님  

 

삼십대 중반쯤이었다. 한 시사잡지로 부터 수필의 원고청탁을 받았다. 나는 고심하며 며칠간 썼다. 문학적인 글은 처음이지만 잘 썼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판결문, 변론문도 써 봤는데 붓가는 대로 쓴다는 수필을 못 쓰겠나 싶었다. 며칠간 고심해서 쓴 원고를 가지고 잡지사 편집장에게 갔다. 그가 내 원고를 잠시 훑어보곤 입을 열었다. ​

“저하고 잠깐만 저리로 가시죠”​

그는 잡지사 구석에 있는 칸막이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가 탁자 위에 나의 원고를 놓더니 의견을 얘기했다.​

“저는 우리 잡지의 귀한 지면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글의 도입 부분을 보니까 공자를 인용하셨네요. 왜 본인만의 것을 담지 않으십니까? 다시 써보시죠.”​

나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지만 항변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문필가로 정평이 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지적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았다. 내가 되물었다.​

“어떻게 해야 잘 쓸 수 있습니까?”​

“먼저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많이 읽어보셔야겠죠. 그리고 원고지로 자기 키만큼은 써 봐야 된다고 봅니다.”​

그날 저녁 나는 서점으로 가서 매대 위에 있는 수필집을 전부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일단 삼천편을 읽을 계획이었다. 공책에 네모 칸을 무수히 쳐놓고 한 편 한 편 수필 제목을 쓰고 분석하면서 읽었다.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어떤 것이 독창적인지, 재미가 있는지 서정적인지 철학과 의미가 들어있는 것인지 어렴풋하지만 알 것 같았다. 정신의 깊은 곳까지 파내려 간 글이 진짜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한 수필가의 글이 마음에 들었다. 그의 조용한 글에는 독창성과 깊이가 있었다. 그의 문장은 산마루에서 솟아나는 구름 같았고 문학적인격이 배어 있었다. 평생 수필을 쓰고 강의하다가 저세상으로 건너간 분이었다. 야산의 잡초 사이에서 살다가 간 들꽃 같다고 할까. 그 무렵 서점에 갔다가 실망스런 광경을 마주쳤다. 내가 좋아하는 외길 인생 수필가의 책은 먼지를 가득 뒤집어 쓴 채 구석의 서가에 박혀 있었다. 반면 매대의 화려한 베스트셀러자리에는 방탕한 여성 탈랜트의 노골적이고 음란한 글을 담은 책이 놓여있었다. 그 여성탈랜트의 글도 아닐 것 같았다. 누군가 뒤에서 대필을 해 줬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문장수업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이었다. 작가들이 노동을 해서 밥을 벌고 글은 성결한 문학의 제단 위에 모셔두기로 했다는 말들을 이해 할 것 같았다. 돈보다 문학에 만족하고 돈보다 소리를 좋아하고 그림에 빠지는 게 예술계가 아닐까.​

나는 습작을 시작했다. 자잘한 일상을 수필형태로 만들어 보았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다행히 감독자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법정에서 기다리는 순간도 사무실에서 쉬는 시간도 나는 조금씩 몇 줄의 글을 쓸 수 있었다. 일본의 한 작가는 작은 수첩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노동을 하다가도 쉬는 시간에도 글을 썼다고 했다. 시간은 남아도는 게 아니라 그렇게 쪼개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

원고지로 내 키만큼 쌓일 분량의 수필을 써 봤다. ​

글맛이라는 걸 조금 알게 된 것 같았다. 고요하고 긍정적이고 원숙한 것이 내가 좋아하는 맛이었다. 독창성이 있고 생각의 깊이가 있어야 했다. 조미료만 가득 친 글은 가짜였다. 문체가 평이해도 깊은 사상을 가진 사람의 글은 깊은 감동이 왔다. 관념이나 사상만 가지고 있다고 글이 되는 게 아니었다. 형상화 시킬 수 있는 도구가 좋아야 했다. 작가들 중에는 시골에 박혀 일생을 수도자 같이 살면서 문장을 갈고 닦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이 만들어 낸 문장은 보석같은 예술적 경지를 이루고 있었다. ​

과거에도 그런 문장의 도인들이 존재했다. 조선의 선비 김시습은 허허롭게 전국을 유랑하면서 이천편의 시와 몇 편의 소설을 남겼다. 자유로운 영혼인 허균도 시와 수필을 남겼다. 관직은 몇년에 그치지만 글은 영원하다. 그 선비들은 시와 수필이 되어 지금도 살아 있다. 나도 그들의 뒤를 따르고 싶다. 나는 매일 작업대에서 삶을 소재로 반죽을 만들고 있다. 거기에 서정과 철학을 썩어 영혼의 불에 구우려고 하는데 아직도 초보에 머무르고 있다. 블로그 진열장에 넣고 온라인 판매를 하는데 매번 미완의 빵을 내놓는 다. 능력의 한계 때문이라 죄송한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