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받아들임
법무장교생활을 같이 한 친구가 있었다. 일주일에 영어소설 한 권씩을 읽는 노력파였다. 그가 낸 번역서도 여러 권 있었다. 그가 삼십대 중반쯤이었다. 사무실에 앉아 있던 그는 갑자기 머리가 깨지는 듯 아팠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았다. 미세한 기생충알이 뇌수가 흘러내리는 관을 막아 뇌압이 올라갔다는 것이다. 그는 뇌수술을 받았다. 뇌수술 후 이상한 증세가 나타났다. 앞이 보이지를 않았다. 나는 친구인 그를 데리고 서울대 안과로 갔었다. 안과의사는 실명을 선언했다. 나는 그래도 입원을 시켜서 수술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의사에게 부탁했다. 담당의사는 그를 입원시키면 회복이 가능한 두명의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면서 거절했다. 섭섭했지만 의사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었다.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친구는 여러 안과들을 돌아다녔다. 어느날 그를 찾아갔을 때였다. 그에게 밥을 먹여주던 그의 아내가 저주같이 내뱉었다.
“세월이 이 순간 사십년쯤 흘러버렸으면 좋겠어요.”
그 부인의 속에 가득한 검은 안개를 알 것 같았다. 그에게 갑자기 닥친 불행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치료를 포기하고 절망한 채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어느 날 찾아간 나에게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죽으려고 더듬거리면서 의자를 밟고 올라서서 혁대를 풀어서 벽 위의 긴 대못에 걸었어. 혁대에 목을 매고 의자를 발로 찼지. 내 몸이 허공에 매달리는 순간 혁대의 버클부분이 가죽띠에서 빠져나오면서 나는 바닥에 나뒹굴었어. 목이 꺽어지는 것 같고 눈에서 불이 번쩍일 정도로 엉덩이가 아팠어. 너무 아파서 다시는 그렇게 는 못 죽을 것 같아.”
자살하는 순간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올 수 있구나를 알았다. 자살하기 위해서 물에 빠진 사람들이 숨이 끊어지기까지 순간의 고통이 일생 겪어온 것 보다 더 심하다는 말을 들었다. 다시 얼마의 시간이 흐른후 그를 찾아갔다.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자식이 셋이야. 집사람이 돈 벌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이대로 무책임하게 죽을 수는 없어. 우리 아버지도 엄마와 어린 나를 두고 목을 매 자살을 했어. 엄마와 내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게 살았는데 내 자식마저 나 하고 같은 운명을 만들어 줄 수는 없어. 이제부터 나는 맹인인 나 자신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어. 이제부터는 법률가의 꿈을 접고 맹인안마사가 될 거야. 안마라도 배워서 가족을 먹여살려야겠다고 결심했어. 그래서 맹인용 지팡이를 구해서 혼자 걷는 연습부터 시작했는데 정말 힘들어. 벽의 모서리에 부딪칠 때 마다 눈에서 불이 번쩍거리는 거야. 이거 장님이 되기도 너무 힘든 것 같아.”
그의 눈두덩에 거무스름한 멍자국이 보였다.
나는 비참해진 그를 보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 부부 역시 건강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나를 보면서 상대적으로 더 불행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보는 횟수를 점점 줄였다. 그 부인이 연락을 할 때만 가곤 했다. 몇 년 후 그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물거품이 꺼지듯 인생이 그렇게 허망하게 없어지는 걸 봤다.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 그를 그렇게 일찍 데려간 그분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더 이상 고생하지 말라는 신의 뜻은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가족은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았다. 변호사로 사십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수 많은 사람들의 불행과 슬픔을 목격했다. 세상의 색깔은 우울한 회색같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노인이 됐다. 정상적인 것 같아 보이던 사람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예외 없이 녹슬고 부서지는 것 같다. 내 나이가 되면 대부분 몸의 나사가 풀어지고 녹물이 벌겋게 흘러나오는 것 같다. 병이 들고 아프고 그러다가 죽음 저쪽으로 흔적 없이 사라져간다. 일찍 죽은 그 친구는 내게 ‘받아들임’을 알려준 것 같다. 맹인이 된 현실을 인정하고 안마를 배워서라도 가족을 먹여 살리고 아이를 키워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일찍 떠났지만 하늘에 계신 그 분이 대신 아이들을 잘 키워준 것 같다. 그의 아이들이 잘 자라 좋은 의사가 됐다는 소리를 전해 들었다. 어떤 불행이 닥쳤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게 병이든 가난이든 늙음이든 죽음이든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닐까.
부정한다고 해서 다른 운명이 올 것 같지 않다. 부정한다는 것은 오히려 부과된 운명을 더 무겁게 하는 것은 아닐까. 노년의 깨달음이라는 게 결국은 ‘받아들임’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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