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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손실위험이 없는 투자

Joyfule 2024. 4. 1. 22:47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손실위험이 없는 투자  

 

살아오면서 어떤 순간이 즐거웠을까.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순간적인 연애도 달콤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묵은 된장같이 깊은 맛을 내게 준 것이 책읽기다. 세월 저쪽에 있던 기억 한 장면이 꿈틀거리면서 기어 나오고 있다. 이십대 중반 신촌역 부근의 쪽방에 세 들어 살 때였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나는 따뜻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엎드려 추리소설에 빠져있었다. 점심 무렵 석유풍로에 냄비를 올려놓고 인스턴트 우동을 한 그릇 끓여먹으며 소설을 계속보고 있었다. ​

죽은 아내의 복수를 한 주인공이 경찰에 쫓겨 골목길로 도망치고 있었다. 감정이입이 된 나는 고독한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오후에 책을 다 읽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좁고 궁상스런 방에 앉아 있지만 나의 내면에서는 행복한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재미있는 책을 읽으면서 평생을 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속의 시간과 공간에 들어가면 현실은 내게서 사라졌다. 마치 꿈속에서 들꽃이 가득한 벌판에 있는 것 처럼. ​

마흔살 때 나는 변호사였다. 하루는 대학 후배인 변호사가 놀러왔다. 그는 국회의원선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는 내게 세 개의 변호사의 길을 얘기했다. 정치인이 되는 길, 국제적인 법률전문가가 되는 길, 그리고 독서가가 되는 길이었다. 이상하게 그 마지막 길이 마음에 끌렸다. 변호사로서 돈에도 야심이 없었다. 그냥 아파하는 서민에게 다가가 얘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동네 변호사 정도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대신 무한한 책의 바다로 들어가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고 싶었다.​

그 무렵 사건의 의뢰인으로 원로 소설가 정을병씨와 인연을 맺었다. 신학대학에 다니던 그는 신을 문학으로 바꾸었다고 했다. 그리고 도서관을 자기의 대학으로 삼았다. 그는 구도자 같은 소박한 삶을 살기로 했다. 밥은 하루 한끼로 정했다. 쌀 한두줌과 김치 그리고 연탄 한 두장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살면 큰 돈이 필요없다. 그는 죽을 때까지 책을 읽기로 했다고 내게 말했었다. 그리고 그걸 실천했다. 칠십대 중반 삶의 마지막 무렵 그는 다른 정신세계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나는 고전부터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다양하게 보다 체계를 세워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문학, 역사, 철학, 종교, 전기, 사상에 걸쳐 여러 가지 풍미를 맛보려고 했다. 쿼바디스를 세 번 읽고 세 번 다 울었다. 톨스토이의 소설에서 그분을 본 것 같았다. 의사 출신 소설가 크로닌을 만나 전문가의 삶이 어때야 하는지를 배웠다. 나는 거기서 무수한 스승들을 만났다. 예수를 만나고 부처를 만나고 노자 장자를 만났다. 책 속에서 반성과 사색의 세계를 발견했다. 독서는 시공간을 넘어 나를 영원의 머나먼 다른 세계로 가게 했다. 책을 읽지 않았을 때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나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 변화 없는 틀에 박힌 생활이었다. 만나는 사람들은 소수고 보는 것 듣는 것은 신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이었다.​

마라톤 선수처럼 나는 내 페이스에 맞게 책을 읽어 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 영혼의 변화를 감지했다. 독서는 나를 진실에 다가서게 하고 내 영혼의 해방자이기도 했다. ​

맹자나 사마천은 하루 두 시간만 책 속의 다른 세계에 살면서 그날의 번뇌를 잊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육체적인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특권이 독서라고 했다. 이십년 정도 고시공부하듯 꾸준히 좋은 책들을 읽으면 내면의 우주가 현자들의 진리로 차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었다. 책은 영의 세계와 현실을 연결해주는 통로같았다. 몇 백년 몇천년 떨어져 살고 있어도 사상과 감정이 서로 통하는 데가 있으면 거기서 나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난 삼십년을 돌아보면서 나는 독서에 투자한 것이 괜찮았다는 생각이다. 좋은 책은 신선한 생선같이 살 자체에 맛과 향이 배어 있었다. 나쁜 책은 신선하지 않은 물고기 살에 소스와 후추 겨자로 억지로 맛을 냈다. 좋은 책을 읽으면서 내 영혼이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면서 즐거웠고 성취감도 얻었다. 근심과 걱정의 감옥에서 그리고 육체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방법 중에 독서가 가장 현실적이고 효과를 발휘할수 있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