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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새로운 자본주의

Joyfule 2024. 4. 19. 13:09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새로운 자본주의  

 

묵호역 플랫폼 주위는 엷은 어둠이 출렁거렸다. 밤 기차를 타려는 승객들이 군데군데 서너명씩 서 있었다. 그들 사이에 내가 묵고 있는 실버타운의 공동식당을 담당하고 있는 그녀가 끼어 있었다. 시골출신인 그녀는 열 살부터 밥을 지어 아버지가 일하는 밭으로 가지고 갔었다고 했다. 그렇게 밥짓는 일과 인연이 되어 나이 칠십이 넘은 지금까지 평생 밥 짓는 일을 해 왔다는 것이다. 낮에 식당에서 봤었는데 한밤의 플랫폼에서 만나니까 느낌이 다르다. 평소에 입이 무거운 그녀가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이십년 전 황량한 묵호의 산골짜기 실버타운으로 와서 밥을 하기 전에는 서울의 충무로에서 작은 밥집을 했었어요. 영화판인 그 동네에는 끼니때 밥을 사 먹을 돈이 없는 배우들이 많았어요. 공짜로 내 밥을 먹고 간 사람도 많은데. 그중에는 유명해진 사람도 있어요.”​

그녀는 그게 누구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인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남에게 밥을 해 준다는 일은 참 좋은 일 같다. 짐승도 자기에게 밥을 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실버타운은 죽음을 기다리는 대합실이라고 그곳에 있는 노인이 말했다. 그곳에서 먼길 떠나는 노인들에게 밥과 국을 만들어 먹이는 것은 보람 아닐까. 돈이 다가 아니다. 요즈음에는 스스로 만족하고 보람을 느끼는 일이 무엇인지 서서히 보이는 것 같다.​

서울로 올라와 사십년 가까이 작은 출판사를 한 여사장을 만났다. 한 시인의 소개로 이십오년전쯤 그녀는 내 사무실을 찾아왔었다. 남자로 치면 호걸풍이라고 할까. 하여튼 수수한 얼굴에 시원한 바람이 부는 들판 같은 느낌을 주는 분이었다. 그녀는 언젠가 원고가 되면 달라고 하면서 내게 돈을 주고 갔다. 이상했다. 나는 제대로 된 작가도 아니었다. 이름이 난 것도 아니고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출판사를 하는 다른 사람들은 태도가 그 반대였다. 나의 지적 허영심을 이용해 돈을 뜯어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자비출판을 유도하고 재고를 억지로 떠넘기려고 은근한 협박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는 정반대의 태도였다. 그녀를 소개한 시인이 죽는 바람에 연락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십오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버렸다. 내 마음의 구석에는 찜찜한 느낌이 오물같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런데도 선뜻 연락하지 못했다. 얼마 전 스마트 폰을 바꾸고 데이터를 이전하는 과정에서 오작동으로 그녀와 접속이 됐다. 그녀는 전화를 받자마자 “엄 변호사님?”하고 확인했다. 나는 마치 빚진 사람이 숨었다가 들킨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할까. 나는 얼른 자백을 했다. ​

“이십오년 전 돈을 받고 떼어먹었는데 나도 모르게 전화가 연결되어 버렸네요. 늦었지만 돈을 돌려드려야 할 것 같네요.”​

“그건 괜찮고요, 원고를 주시면 좋죠.”​

그녀의 대답이었다. 화통한 성격이 틀림없었다. 나는 당장 사람들이 많이 공감한 글들을 선별해서 그녀에게 카톡으로 보냈다. 상업성도 없는 내 글로 책을 만들면 손해만 볼텐데 이상했다. 그녀에게 사과겸 밥을 한끼라도 사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

점심시간 서울 변두리의 작은 식당에서 그녀를 만났다. 노인이 된 우리들은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 채 물어서 확인했다. 이런저런 얘기 중에 내가 알던 가난한 시인이 그녀의 사무실을 자주 찾아가 신세를 진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가난한 시인과 작가들의 책을 내주기도 하고 밥을 사기도 한 것 같다. 그렇게 삶을 풍요하게 하는 가난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흐뭇하다. 세상에는 소박한 가난을 가진 부자들도 있다.​

오래전 일이다. 연말 명동의 길거리에 자선냄비가 놓여있고 그 옆에서 사랑의 종이 울리고 있었다. 낡은 외투를 입은 영감이 지나가다가 봉투 하나를 자선냄비 속에 집어 넣었다. 그 봉투에는 억대의 수표가 들어있었다.​

강남에 있는 한 병원의 입원실이었다. 폐섬유증을 앓고 있는 한 노인의 옆에 희귀병을 앓고 있는 아이의 엄마가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노인은 다음날 말없이 그 아이의 수술비와 입원비를 납부해 주었다.​

변호사인 나는 그 노인이 누군지 알고 있다. 평생 자신을 위해서는 돈을 쓰지 않았던 사람이다. 보통의 양복 몇벌이나 구두 몇 켤레도 사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가진 돈을 노년에 그렇게 멋있게 쓰고 갔다.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박사는 유언장에 손녀 대학 학비 만달러만 남기고 전 재산을 기부한다는 유언장을 썼다. 많은 재산을 가졌어도 그 자신은 철저히 검소했다. 며칠 전 세상을 떠난 미국의 면세점 부자 찰스가 사십억 달러를 은밀히 기부했던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그는 십달러짜리 전자시계를 차고 임대아파트에서 살다가 생을 마친 거부였다. 카네기는 부자인 채로 죽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삼천억달러가 넘는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지난해 삼십억 달러가 넘는 지분을 기부한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의 창업주 이본 쉬나드는 소수의 부자와 수많은 빈자로 귀결되는 자본주의가 아닌 새 자본주의 형성을 바란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새로운 자본주의’란 외형적인 물질의 소유보다 얼마나 풍요한 영혼을 가졌는가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