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노년에 공부하고 싶은 것
서초동 법원가에서 이따금씩 보던 ‘고시낭인’이 있었다. 칠십대인 그는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평생 고시 공부로 세월을 보낸 것 같다. 인생 말년에 그는 노숙자 비슷한 신세가 되어 지하철 안에서 싸구려 칫솔을 팔기도 했다. 그리고 더러 동창인 변호사사무실에 들려 돈을 얻어간다고 했다. 그는 사법 고시를 하다 행정 고시로 지망을 바꾸었고 칠십이 넘어 뒤늦게 영어로 된 두툼한 경제학 원서를 읽고 있다고 했다. 그에게 있어 시간은 흐르지 않고 젊은 날 그대로 정체 되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의 비정상적인 삶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그게 나의 모습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전 의사인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정신병동에 갔는데 우리 고교 동창이 있더라구. 그 친구가 나를 알아보고 반가워하면서 자기가 서울법대를 졸업했는데 고시 양과에 합격했다고 하더라구.”
우리 시대는 수많은 우수한 인재들이 빛을 발해보지 못하고 사회의 쓰레기 통 속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밤 열시경 지하철 교대역 한 구석에 가만히 앉아있는 칠십대의 고시낭인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가 파는 칫솔을 사주면서 아직도 고시에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면 ‘천국 고시’에 도전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그런 고시가 있었느냐면서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그에게 경전을 열심히 공부하면 이 지상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나는 동해의 조용한 바닷가 근처의 방에 앉아있다. 세월이 고개를 넘으면서 황혼의 귀중한 순간들을 뭘 하고 지내야 가성비가 높게 사용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문득 ‘천국 고시’를 준비하는 고시생이 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명한 분들의 노년의 생활을 유심히 본 적이 있었다. 우리 시대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김상협 교수는 칠십이 넘자 평생 손에 들고 있던 정치학 책을 놓고 각종 경전에 몰입했다. 다석 류영모 선생도 북한산 자락에 집을 짓고 성경을 읽었다. 이 세상보다는 더 가까워진 저 세상을 알기 위해 공부하는 것 같았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을 것 같다. 미리미리 죽음과 그 너머의 세계에 대해 공부하고 그 시험을 통과할 준비를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살아보면 남들이 생각하지 않을 때 앞날을 생각하고 남들이 놀 때 절제하며 노력해야 한 발자국이라도 디딜 수 있었던 세상이다.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특별히 몰입할 취미가 없는 나는 공부가 재미있는 편이다. 바닷가의 조용한 방을 얻어 나는 ‘천국 고시’를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젊은 시절 고시 공부할 때의 법 교과서 대신 경전과 여러 정신세계에 관한 책들을 갖추어 놓고 있다. 논어, 맹자, 노자등 읽지 못했던 동양철학에 대한 책과 헤겔과 쇼펜하우어등 서양철학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다 놓고 본다. 역사와 문학을 공부한다. 노년의 공부는 목적이 없다. 공부를 위한 공부라 그런지 더 순수하게 몰입이 되는 것 같다. 내게 맞는 독특한 기도 방법을 개발했다.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연필로 그 안에 성경 속의 ‘시편 23장’을 쓰는 방법이다. 내가 아는 판사한테서 배운 기도 방법이다. 그 판사가 고교시절 선생님이 ‘시편 23장’을 천번 쓰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알려줬다는 것이다. 그는 고등학교 삼학년 때 ‘시편 23장’을 천번을 쓰고 그 고등학교 설립 이후 처음으로 서울법대생이 됐다고 했다. 그는 법대 시절 또 시편23장을 천번 쓰고 고시에 합격했다고 했다. 그는 사법연수원시절 다시 시편 23장을 천 번 쓰고 수석으로 졸업하고 판사가 되었다고 내게 알려주었었다. 간절한 소원은 없는 나이가 됐지만 괜찮은 기도 방법이라는 생각에 나도 실행을 해보고 있다. 사람마다 황혼이 여백을 사용하는 게 다를 것이다. 저세상으로 가는 길도 다 다를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의 세계에 관한 공부를 해 보는 것도 괜찮은 계획이 아닐까.
'━━ 감성을 위한 ━━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소원을 이루는 길 (0) | 2023.11.07 |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제3의 인생 (0) | 2023.11.06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편안히 죽을 권리 (2) | 2023.11.03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암은 신의 메시지 (0) | 2023.11.02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간호사들의 해방선언 (1) | 2023.11.01 |